즈덴카 판틀로바의 『깡통반지』 27쪽에서
어른이 되어서 어릴 때 다니던 초등학교 교실을 찾아갔을 때처럼 황당한 것은 없다. 여러분도 그런 기억 한 자락 정도는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마치 소인국에 온 것처럼, 초를 반짝반짝 칠해 미끄럼을 신나게 탔던 넓은 복도는 갑자기 어른 두 사람이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좁아져 있었다.
전교생이 라면땅이며 오징이땅콩이며, 축구와 발야구, 고무줄놀이를 동시에 해도 넉넉했던 학교 운동장의 품은 이제 달리기를 하기에도 비좁은 트랙으로 전락해 있었다.
마이크로의 세계에서 충분했던 모든 것들은, 매크로 세계로 차원 이동을 한 뒤에는 너무 보잘 것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개미에서 갑자기 사람이 되어버린 것처럼.
기억은 과거를 현재처럼 붙들고 있지만, 현재는 과거를 빛 바래게 하고, 쇠락하게 하고, 무너지게 한다.
그것은 어른이 되어서 어린 시절을 집을 찾아갔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안겨 준다.
작가의 시선으로 책을 조금 더 읽어보자.
그녀는 문득 고향집이 몇 살 쯤이나 되었는지 궁금했다. 그것은 마치 세월이 흘러 친한 학교 친구를 만나고 젊은이가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변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석회가 떨어져 맨 벽돌이 드러난 그 유령의 모습에 그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의 유해를 들고 잡초 무성한 무덤가에 서 있는 사람처럼 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깡통반지, 27쪽에서)
고향집이 백발성성한 노인이라니. 잡초 무성한 무덤가라니, 작가의 비유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세월이 30년 아니 50년을 훌쩍 넘긴 것이었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죽은 건물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우리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과거는 50년 전에 정지 버튼이 눌러져서, 더 이상 움직임도 없고, 성장도 없고, 화사한 그대로, 아름다운 그대로, 언제나 영원할 것 같은 파스텔 톤으로 남아 있지만, 현재는 그동안 나뭇잎 떨어져 내리듯이 계속 쇠락하고, 노화하고, 아프고, 슬퍼져서, 이제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자녀를 보면서 30년 전의 자기 자신을 투사하지만,
아이들은 부모를 보면서 결코 30년 뒤의 자기 모습을 예언하지 못한다.
과거와 현재 또는 미래는 언제나 평행선을 달린다. 결코 만날 수 없다.
한 사람의 기억과 삶 속에 공존하지만,
과거는 정지 버튼이 눌려진 이후 눈에 보이지 않는 떨림으로 계속 세포가 죽어 나간다.
나치에 의해 홀로코스트 경험을 하고
90세가 넘어 마주하는 고향에 대한 작가의 시선은 담담하지만
지나치게 정직하다.
이 책은 그 시선을 따라가는 흑백사진 같은, 과거에 대한 이야기이다.
늙지 않는 기억은 슬프다.
50년 된 집은 이제 곧 사라질 것이다.
이번 추석에 고향에 간다면,
어린 시절 나를 품어주었던,
소인국의 그 쇠락한 집,
빚잔치를 하느라 눈물을 머금고 팔아야 했던 그 집에,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더 가보고 싶다.
어릴 적 집은 곧 헐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