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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부신 날 Jan 30. 2024

스토너, 아버지 그리고 조병화

오늘은 당신이 그립다

[스토너, 아버지 그리고 조병화]

2024년 1월30


가끔 소설을 읽을 때

긴 호흡 느린 호흡으로 책을 일어야 할 때가 있다.

한 구절씩 소처럼 되새김질하면서 읽어야 하는 책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스토너다.

내게는 그렇다.


이미 두 번 읽은 책이지만,

이번에 처음 참여하는 독서모임에서

2월 토론도서로 선정되어 다시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첫장부터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첫 부분을 읽으면서 나의 아버지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스토너는 그가 살아 있을 때에도 그를 특별히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에도 그의 이름을 입에 잘 올리지 않는다고 했다.


마치 15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말하는 듯했다.

아내에게 그 얘기를 하자, 평범한 사람들 중에 그렇게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고 했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아침에 잠깐씩 서로의 아버지에 대해, 그들의 고단하고 힘들었을 삶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나의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었다. 광복되던 해에 북에서 내려와 가족이라곤 고모 한 분 뿐이었다. 더블백 두 개가 결혼할 당시 전 재산이었다고 했다. 어머니의 아버지인 외할아버지는 그런 사위를 못마땅했고 결혼하고나서 내가 초등학생 6학년이 되던 때에 처음으로 우리 집을 방문했다.




아버지는 그 당시 보기 드물게 함경북도 원산에서 대학을 다녔다. 원산 앞바다에서는 바다를 뛰어넘는 고래를 볼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2학년을 마치고 중퇴를 했고 어떤 국가적 사변 등으로 인해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아버지는 뜻하지 않게 장기군인에게 주는 국군연금 조건인 20년을 3개월 앞두고 강제전역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 가족에게 경제적인 부분에서 불행을 자초하는 시작이 되었다.


전역 후 사업을 하게 된 아버지는, 당시 대학을 다닌 사람이 없었던 시대에 한자를 잘 읽고 글을 잘 쓴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의 온갖 법적 서류를 잘 써주는 사람으로 통했고, 덩달아 증인처럼 보증을 함께 써주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보증은 나중에 우리 가족을, 집문서를 바람처럼 날리는 이유가 되었다.


아버지는 마음이 너무 좋아 만나는 사람들에게 호기롭게 자신이 뭔가를 대신 해주겠다는 약속을 남발했고, 그건 지극한 사랑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랑은 어머니에게, 가족에게는 고통이었고, 결국 우리 집은 빚잔치를 하고 성인이 된 우리는 뿔뿔이 각자의 삶의 터전을 만들어갔다. 아버지는 손을 대는 사업마다 사기를 당했고 술꾼이 되었다. 길에 널브러진 아버지를 떠메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정말 슬프고 창피했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언제나 남북처럼 전쟁을 했다. 아들인 나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겠노라고 다짐을 했다.


어머니는 우리 자녀들이 들으라고, 너희들이 졸업만 하면 아버지와 이혼할 것이라고 말했고, 졸업이 다 끝나자 너희들이 결혼만 하면 즉시 이혼할 것이라고 말했고 그래서 나는 정말 내가 결혼하면 우리 부모는 이혼할 것으로 생각했다. 어머니의 말이 너무 단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혼은 계속 미루어졌고 결국 아버지는 식도암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가끔 아버지가 없이 맞이하는 명절에 당신에게 존칭을 하며 그를 회상하곤 했다.


그 당시엔 다 그랬겠지만 나는 아버지와 큰 정서적 교감이 없었다. 아버지는 늘 어머니에게 경제적 무능력자로 낙인이 찍혔고 그런 표현은 자녀들인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가 돈만 좀 제대로 벌어오면 이런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텐데. 학교 단체 영화 관람을 갈 수 있을 텐데. 돈 300원이 없어서 단체 영화 관람을 가지 못할 때는 다른 핑계를 둘러대느라 정말 진땀을 빼야 했다.


그런데 오늘 스토너를 다시 읽으면서, 아버지를 떠올리게 되었다. 아버지에게 자신의 한 평생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들인 나는 어떤 자녀였을까. 그분의 삶은 언제 행복했을까.


그럴 때면, 아버지가 연애시절에 엄마에게 선물했다는 시집을 꺼내본다. 1955년 조병화 시인.




겉표지 제목은 내가 집으로 가져오면서 쓴 글씨이고,

안표지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선물할 때 쓴 글씨이다.





1955년이면 내가 태어나기 10년 전이다.

누나와 나는 연년생인데, 그 10년 전 아빠와 엄마는 어떤 사랑을 했을까.


조병화 시인의 <사랑이 가기 전에> 시집의 첫 시는 <그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라는 제목의 사랑시인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 중의 하나다. 아빠에게 이런 감성이 있었다니, 군인이었던 젊은 혈기의 아버지에게. 새삼 놀랍고도 사랑의 신비한 힘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이 첫 2연에서 나는 그냥 멈추어버리고 만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는 세상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사랑의 첫 두 구절을 본 적이 없다.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인생이 겉잡을 수 없이 허무하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믿고

당신과 같이 나를 믿어야 했습니다.


스토너에 슬론 교수가 스토너를 불러 문학을 얘기한다. 너는 문학과 사랑에 빠진 거야.

아버지와 어머니도 1955년에는 그러했을 것이다. 아주 간단한 이유로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아버지와 어머니는 철천지 원수가 되었을까. 하지만 어머니는 속으로 아버지를 끝까지 사랑했다고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지금 어머니를 보노라면 그렇다. 그래서, 왜 그때 이혼하지 않았느냐고 물어볼 수가 없다.



스토너는 농과대에서 문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공부를 계속하기로 했다. 부모님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겠지만 그는 그런 상실감 때문에 사랑이 더 커졌음을 느낀다고 표현한다.


나는 어렴풋하게 그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린 시절, 늘 술을 먹고 들어오는 아빠와, 그런 아빠를 향해 늘 소리치고 울부짖었던 엄마를 피해 나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던 나는, 엄마를 미워했고 증오했다. 그런데 이제 독거노인으로 홀로 생활한 지 15년, 거동을 하지 못해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어머니. 늘 강직하고 엄했던 어머니가 아들 걱정을 하고, 자신은 아무 걱정 하지 말라며 80이 넘은 나이에 아들을 여전히 걱정하는 것을 보면서, 그때의 아버지의 좋은 모습만 기억하며 회상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때론 상실감, 헤어지는 것, 사라지는 것, 소멸되는 것들이 사랑을 더 크게 만들 수 있겠다고. 그래서 내 내면아이는 이제 어른이 되었고, 더 이상 엄마를 증오하거나 미워하는 아이가 아니라  나를 이땅에 태어나게 해 주신 그것만으로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주는 정말 좋았다.

일주일 동안 비상약을 한 번도 먹지 않고 견뎌낼 수 있었다.

일요일 아침 교회에 가서 딱 한 번 먹었다.


그런데 어제부터 아침 상태가 그닥 좋지 않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내에게 말할 수가 없다.

나보다 더 걱정을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오롯이 홀로 견뎌야 하는 하루다.

오후에는 좀더 좋아질 것이다.


어제 외주 알바 하나를 끝냈는데

이번에는 일정이 너무 빡빡한 일을 하나 해야 한다.

늘 아침에는 햇살을 쬐면서 책을 읽고

오후에만 세 시간 정도씩 일을 했는데

이번 주는 아침부터 일을 해도 다 못 마칠 것만 같다.

건강 관리 잘 하면서, 일도 잘 마칠 수 있는 일주일이 되면 좋겠다.


그래도 스토너를 읽고 사랑을 떠올릴 수 있어서 감사한 아침이다.

아침 햇살을 기다렸는데,

이제 이쪽으로 오기 시작한다.

참으로 감사한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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