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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부신 날 Mar 15. 2024

(책꼬리단상) 일상의 연약함

모방범 중에서

[일상의 연약함]

요 일 년 사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뭐든 기억해두는 것이 습관이 되고 말았다. 매 순간들을 사진을 찍듯 머릿속에 새겨둔다. 사람들과 나눈 대화에서 눈에 들어오는 풍경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머릿속에 보관해두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일상사들은 매 순간마다 단단히 붙잡지 않으면 언제 소리도 없이 부서져버릴지 모를 정도로 연약하기 때문이다. (미야베 미유키, 모방범1, 8쪽)




장르소설이긴 해도 가끔 시선을 잡아끄는 문장들이 있다. 평범해보이는 극 중 행인들처럼 그냥 스쳐 지나갈 문장일 수도 있지만,  내 감정이나 내 정서 또는 그날의 독서 관점이나 개인적인 환경에 따라 어떤 문장은 나를 파고 들어온다.


요즘 니체를 읽느라 너무 머리가 피곤해졌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를 쓰다> <안티크리스트> <칼 야스퍼스의 "니체와 기독교">까지 온통 니체로 일주일을 보냈다. 머리를 조금 식힐 겸 버리지도 못하고 계속 껴안고 있던 두툼한 장르소설 모방범을 읽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점심 때 살짝 펼쳐든 책인데 어느새 100쪽을 지나고 있다. 평범한 서술 같은데도 묘하게 독자를 끄는 서술의 힘이 있다.


요 일 년 사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뭐든 기억해두는 것이 습관이 되고 말았다. 매 순간들을 사진을 찍듯 머릿속에 새겨둔다. 사람들과 나눈 대화에서 눈에 들어오는 풍경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머릿속에 보관해두는 것이다.




사실 이런 수준의 기억은 드라마나 소설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우리 눈과 뇌는 그렇게 정밀하지 않다. 과학적으로 인체를 분석한 결과는 그렇다. 하지만 나는 저 작중인물의 마음을 안다. 그가 왜 그렇게 노력하는지. 아직 전체 서사를 몰라 첫장에 나온 저 문단이 가지는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일상의 연약함을 알기에 일상 풍경 하나까지 보관해두고 싶다는 저 심정은 알 수 있겠다.


평범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힘을 가진 것인지,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말하고, 손을 뻗어 만지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내가 생각하는 것, 보는 것, 먹는 것, 만나는 사람, 나누는 대화, 풍경, 감정, 정서까지 모두 하나하나 그것들이 얼마나 내게 소중한 것인지 알기 때문에, 나는 저 문장을 읽으며, 그냥 지나쳐버리지 못한 것이다.




엊그제 머리를 감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를 바닥 타일에 부딪히며 넘어졌다. 어지럼증이 갑자기 나를 덮치면서 순간적으로 기억을 단절시켰다. 나는 분명히 머리를 감으려고 샤워기를 들고 물을 뿌리고 샴푸를 바르고 머리를 헹구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중간 과정이 사라지고 나는 머리를 바닥 타일에 처박은 상태로 고꾸라져 있었다.


눈을 뜨니 어지러웠다. 하루가 너무 빨리 소모되는 것 같아서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 행동을 개시한다는 것이 그렇게 되어 버렸다. 일단은 수면제의 영향이라고 판단을 했다. 지난번 병원 면담 때 의사선생님이 수면제에서 항우울증 약 용량을 조금 높인다고 말을 했었다. 어떤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면서 넘어지기도 한다면서 약을 먹어 보고 어떤지 말을 해달라고 했었기 때문이다.



수면제 탓이라고 말을 하고 가족을 안심시키기는 했지만, 어머니와 누나에게 뇌졸중 전력이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나를 살펴야 한다. 이제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기억에 담아두어야 할 일상이 되고 있다.


지금은 평온하다. 처가댁도 평온하고, 우리집도 혼자 계시는 어머니가 외롭긴 하지만 아직 크게 걱정할 일은 없다. 그렇지만 일상의 이 평화는 언젠가는 깨질 것이다. 연세가 많기 때문에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다만 순서만 모를 뿐이다.


순서를 모른다는 점에서는 나도 예외일 수 없다. 누구도 예외는 없다. 예외없음의 불가항력 진리 앞에서 우리의 일상은 연약하다. 그래서 소중하다.


기억할 수 있다면 최대한 기억하고, 남기고, 사랑하자.

우리의 일상은 연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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