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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부신 날 Apr 04. 2024

봄부신 날, 그리고 서울여행

<봄부신 날, 그리고 서울여행>


어제는 서울을 다녀왔습니다.
퇴직하고 처음 가는 서울길이었습니다. 지하철을 탔는데 퇴직했던 회사를 지나쳐 갔습니다. 마음이 심란하지는 않았는데 그렇다고 그냥 무심하지도 않았습니다.



서울 가는 길이 여행길일 수 있을까요.
저희 가족은 2000년도에 창원에서 서울로 이사를 왔습니다. 새천년이라며 들떠있는 부류와, 컴퓨터가 몽땅 멈춘다느니 지구가 멸망한다느니 하며 온통 겁을 주는 세상이 있었습니다. 부산에서 자라 서울이란 곳을 처음 밟아본 저희는, 어디서 왔냐는 질문만 들으면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부산은 제2의 도시고, 광역시인데, 부산에서 왔다고 하면, 모두들 아, 촌에서 왔구만,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산 촌사람이 서울생활 8개월을 보내며 시를 몇 자 적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찬신문사의 제21회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시부문에서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공식적으로 시인으로 등단을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이상한 방식이긴 합니다) 당시 이탄 시인님이 심사를 하시고 심사평을 해주셨습니다. 회사 직원이 와서 꽃다발도 전달해주고 점심식사도 등단자들과 함께 먹고 헤어졌습니다.

제 시는 쉬운 글로 적혀 있습니다.
그래서 읽기도 쉽고 독자의 마음에 쉽게 가 닿습니다.
시가 책에 활자로 박혀 실리면, 그때부터는 독자의 글이 됩니다.
제가 어떤 마음으로 이 시를 썼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천상병 시인이 이 땅에서의 삶을 소풍이라고 했던 것처럼, 저는 서울생활 8개월을 여행이라고 했습니다. 여행이었지만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아마 천상병 시인도 많이 힘들었기에 소풍이라고 말했을 겁니다. 저희 가족은 서울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10개월만에 서울을 떠났습니다. 그랬더니 서울은 정말 여행을 잠시 다녀간 것이 되었습니다.




어제 서울로 올라가던 오전에는 비가 왔습니다.
비가 오면
우리의 발바닥들은
인생이 흘린 모든 눈물과 만납니다.
그래서 걸을 때마다 질척질척 소리가 납니다.

도시화된 길들은
비가 흙에 스며들지 못하도록 막아섭니다.
눈물이 갈 곳이 없습니다.
마치 예수가 유대인들의 배신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처럼
눈물은 결국 돌고돌다 배수구로, 검은 죽음의 늪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완전한 패배이고 돌이킬 수 없는 항복입니다.



갑자기 화병에 있던 꽃송이 하나가 똑 하고 떨어집니다.
갑작스런 죽음입니다.
아무런 전조증상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웠던 꽃들인데
바람에, 비에, 중력에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속수무책으로 떨어집니다.
그저 죽음을 숙명처럼 받아들일 뿐입니다.

우리의 눈물이 턱을 지나 땅으로 스며들 듯 떨어지는 것처럼
낙하하는 꽃잎들은 가볍습니다. 울지 않지만
점점이 놓인 잎들은 마치 내 눈물 같습니다.
내 가슴 같습니다.



그러나 알고 있습니다.
눈물이든 빗물이든 땅으로 스며든 모든 것들은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을.

3일이면 될까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눈물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됩니다.

그렇게 등단을 하고, 6년 뒤에 첫 시집이 나왔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봄시. <봄부신 날>이 첫 시로 나오는 시집입니다.




이 시는 나름 유명해져서, 네이버에서 <봄부신 날>을 검색하면 많은 블로그에서 인용되어 나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조금 옛날 일입니다. 지금도 검색이 되는지는 검증을 안 해봤습니다.)

눈, 부신 게 아니라
봄, 부신 게다

나는 두 눈
그것 밖에 없는데
봄이란 봄은 죄다
가슴 풀고 앉았다

이 봄 끝나면
세상 끝나는 양
제 몸 속 진액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가슴으로 쏟아낸다

그 부활 보려고
실눈 뜨다

아,
눈 멀어 버렸다


(이태훈, 봄부신 날, 전문)




4월은 또 어떻구요.
제가 만 가지 아름다움을 만나는 계절이라고도 했는데, 4월은 또 만 가지 슬픔을 만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그렇게 4월에, 꽃 피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벌렁거리는 이 아름다운 계절에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많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 4월은 뜨겁습니다.

두 팔 다 벌려도 안아주지 못하는
보라빛 사랑의 열병들이
바다에서 하늘에서
산에서 강에서
피 흘리며 대신 죽어간 당신 만나려
뜨겁게 모여 있습니다.
뜨거운 바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제 서울에 갔다가 밤 늦게 수원으로 돌아왔습니다.
갑자기 제게 등단의 꿈을 실현시켜 준 <서울여행>이라는 시가 생각났습니다.
이탄 시인님이 제 등을 두드리며, 잘 써서 뽑아준 게 아니라, 등단은 그때부터 시작하는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첫 시집 이후 아직 두 번째 시집을 못내고 있습니다. 벌써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퇴직 이후, 서울 갈 일이 없었는데, 어제, 비가 오는 오전, 우산을 챙겨들고 서울을 나들이했습니다.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여기저기 피어 올라오는 보라빛 제비꽃처럼, 노란 민들레처럼, 온몸으로 웃으면 좋겠습니다.

혼자 있어도 결코 외롭지 않은 공간의 공유.
봄으로 꽉 채워진 생명의 환희.
그냥 봄 속에
꽃처럼
콱 박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그런 날입니다.
두서도 없고 맥락도 없지만,
이번 봄은 모두에게,

눈 부시는 봄이 아니라,
봄이 그 자체로 부시는
그런 봄날이길 함께 소망해봅니다.

날씨가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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