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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부신 날 Mar 28. 2024

[퇴직일기] 집에서 혼자 저녁을 먹었다

[퇴직일기]  집에서 혼자 저녁을 먹었다



아내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번에 이사하면서 아내 직장과 우리 집은 걸어서 거의 5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로 좁혀졌다. 그래서 6시가 넘었다 싶으면 하루종일 고생한 아내가 활짝 웃으면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 오히려 하루종일 집에 있는 나를 더 배려하는 동작이다. 나도 반가워 포옹을 한다.

나도 책상에 앉아 컴퓨터로 이런저런 일을 하느라 시간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어느새 6시30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깨톡.
대화글이 하나 올라왔다.

까먹었네. 오늘 회식인데.

아내가 근무하는 어린이집 원장이 이번 3월 새학기를 기점으로 바뀌었다.그래서 새로 오신 원장님이 단합을 위해 맛있는 저녁을 쏘신다는 것이다.

난 혼자 저녁 먹어야겠네.
저녁 맛있게 먹고 와.

명랑한 척 답장을 보냈다. 하던 일을 마저 끝내고 혼자 식탁을 차렸다. 퇴직한 뒤로 늘 같이 저녁식사를 했다. 내가 퇴직하기 전에는 아내는 늘 혼자 저녁을 먹었다. 너무 피곤해서 저녁 식사는 고구마 하나로 때우거나 김치 하나에 대충 먹거나 하는 식으로 먹었다고 했다. 혼자 먹는 저녁에 너무 많은 반찬을 꺼내거나 요리를 해서 먹을 힘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대충 급하게 먹고 쉬다가 차례대로 아이들이 집에 오고 내가 퇴근하면 퇴근하는 대로 식사를 차려주었다. 아내는 대충 저녁을 때웠지만 가족을 위해서는 어떻게든 뭔가 만들어주려고 노력을 했다.

그런데 내가 퇴직한 뒤로는 늘 저녁에 뭔가를 만들어 내놓았다. 힘들텐데도 푸짐한 저녁식사를 차렸다. 그러면서 웃는다. 혼자 먹으면 이렇게 안 할 건데 당신이랑 같이 먹으니까 차리는 거야. 그러니까 나도 잘 먹게 되고 좋네. 그렇게 아내는 피곤한 몸으로 계란프라이를 만들고 찌개를 만들고 뚝딱뚝딱 요술방망이를 손에 쥔 것처럼 이것저것 잘 만들어냈다. 그게 너무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가족 그 누구도 집에 없는 저녁. 혼자 저녁을 차려 먹으려니 귀찮은 마음이 들었다. 아내가 어제 저녁에 가지무침이랑 오이김치, 콩나물 무침, 김치찌개까지 만들어 놓았는데, 나는 모듬쌈과 쌈장을 꺼내고 김치찌개만 뎁혀서 상을 차렸다.

커다란 공간에는 오직 나만 있었고, 나는 나만을 위한 저녁 밥상을 차렸다. 그나마 오디오로 음악을 틀어놓아서 다행이다. 소리마저 없었다면 더 쓸쓸했으리라. 아내는 어떤 마음으로 매일 저녁 혼자 저녁을 먹었을까. 나처럼  음악을 틀어놓지도 않았을 텐데. 슬픈 상상을 하며 나도 저녁을 먹는다.

점심에는 거의 큰 딸과 같이 먹는다. 바이올린 레슨을 하는 큰 딸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부터 일을 하기 때문에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는다. 그래서 같이 점심을 먹게 되었다. 사귀는 남자 이야기며, 교회 이야기를 하면서 식사를 같이 하다보니 더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역시 한국 사람은 밥을 먹으면서 정이 더 깊어지나보다. 저녁 식사를 날마다 같이 했던 아내가 하루 없다고 갑자기 나에 대한 정도 뚝 떨어져버린다. 에잇, 저녁 한끼 그냥 대충 때우지 뭐. 아내가 어제 정성들여 해놓은 반찬을 하나도 꺼내지 않은 나쁜 남편으로 돌변했다.

막내딸도 오늘은 인턴 시절 같이 일했던 남자를 만나고 늦게 들어온다고 했고, 큰딸도 요즘 신나게 남친을 사귀는 중이다. 나도 여친이 없는 건 아닌데, 오늘 회식 하고 온다고 늦는다고 하니 괜히 더 적막해진다. 더 쓸쓸해진다. 하루를 폭삭 더 늙은 것 같다.

책도 있고 음악도 있지만, 아내가 없으니 저녁이 저녁이 아닌 것 같다. 음악도 처량하고 책도 빛이 바랜 채 슬픈 모가지로 나를 응시한다.

그래도 이렇게 퇴직일기랍시고 감정을 여기에 쏟아놓으니 조금은 살 것같다. 아내는 곧 돌아올 것이다. 암, 기다리는 자에게 기쁨이 찾아오리니, 맘 편히 먹고 음악 들으며 책이나 열심히 읽고 있자. 웅장한 음악이 막을 내린다. 4부 혼성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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