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부신 날 Apr 05. 2024

[퇴직일기]  식물을 사랑하는 일

조팝나무에 대하여

[식물을 사랑하는 일] - 조팝나무에 대하여



나이가 들면 식물을 사랑하게 됩니다. 더 사랑하게 됩니다.


어쩌면 계절의 변화를 식물을 통해 익히고 느끼고 그래서 또 나이가 먹어가고 인생이 익어가는 걸 체감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봄이 오면 조팝나무에서 언제 꽃을 피우나 기다립니다. 조팝나무의 꽃잎이 제 눈에는 너무 이상적이고 완벽하고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얀 꽃이 좁쌀처럼 생겨서 조팝나무가 되었다는 이름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작은 것은 나를 상징하는 것이니까요.



저는 초등학생 때 아주 작은 아이였습니다. 1학년이 되었을 때 키 작은 순으로 번호를 매겼는데 저는 언제나 남자와 여자 아이를 합친 가운데에서도 가장 작은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1번 아니면 2번이 되었습니다. 1학년 때 노란 옷을 입고 학교를 갔는데, 선생님들이 노랑병아리라고 저를 부를 정도였습니다. 저는 12월생이었고, 거의 마지막인 25일에 태어났기 때문에 또래에 비해 체구도 작았습니다. 건강기록부를 작성하기 위해 키를 재고 몸무게를 재고는 선생님께서는 몸무게칸에 적힌 기본 치수를 자를 대고 죽죽 긋고는 새로 적은 뒤 제 몸무게를 그 아래에 적었습니다. 몸무게 칸의 가장 앞쪽에 있던 숫자가 20kg이었는지 30lg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하여튼 저는 가장 작은 숫자보다 더 작은 몸무게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작은 꽃, 작은 나무, 작은 것, 밀려나는 것, 소외되는 것, 버려지는 것을 보면 마치 어린 시절 저를 보는 것 같아 조금 더 마음이 갑니다. 작다는 것은 생존을 해야 하는 정글 같은 곳에서는 언제나 약자이고 결국 희생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지만 보란 듯이 자기의 꽃잎을 피어 올리는 들꽃이나 나무를 보면 저는 가만히 앉아 들여다보며 말을 겁니다.




이 세상에 나오느라고 많이 힘들었겠구나. 하지만 용기 잃지 말고 살아내야 해.

어디선가, 언젠가는 너의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이 꼭 나타날 테니까.

봐, 벌써 내가 이렇게 네 앞에 앉아서 너를 마주하고 있잖아.

지금은 네가 내게 가장 소중한 존재야.



제게 식물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해준 건 황대권 선생님의 <야생초 편지>입니다만 그보다 먼저 동화를 쓰기 위해 많은 식물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때 제게 도움을 준 책이 있습니다. 바로 보리출판사에서 펴낸 세밀화로 그린 <나무도감>과 <곤충도감>입니다.




저는 책을 찾아서 읽고 밖으로 나가 이 나뭇잎이 그 잎이 맞는지, 이 꽃이 그 꽃이 맞는지 여러 번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어떤 효과가 있고 어떤 동물들이 즐겨 먹는지를 찾아보았습니다.


조팝나무 꽃은 그렇게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저의 첫 장편동화 <숲속의 빨간 신호등> 첫 장면에 조팝나무가 나오는 장면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1. 아기 사슴 리초>


어엄 마아!

아기 사슴 한 마리가 숲 한 가운데서 엄마를 찾고 있습니다. 소리는 길게 메아리치며 한참을 바람처럼 맴돌다 사라졌습니다.


“엄마! 어디 있어!”

다시 소리쳐보지만 바람에 나뭇잎만 살랑거립니다. 잠시 귀를 쫑긋거리던 아기 사슴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으앙!

눈물은 보송송한 솜털 사이사이로 미끄러집니다. 한참을 울고 난 아기 사슴은 제 풀에 지쳐 코를 훌쩍거립니다. 그 때였습니다.


샤라락.

등 뒤에서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가 났습니다.


"엄마?"

아기 사슴은 노란 씀바귀 풀숲으로 폴짝 뛰었습니다. 놀란 실잠자리 두어 마리가 화라락 날개를 펼치며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스르륵스르륵. 잠자리의 까만 꼬리들이 아찔한 아지랑이가 되어 하늘로 꼬물꼬물 올라갑니다. 아기 사슴은 콧잔등에 엉겨 붙은 거미줄을 떼어내려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어댑니다.


휘리릭.

이번에는 오른쪽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엄마야?"

아기 사슴은 하얀 개망초 풀숲으로 폴짝 뛰었습니다. 놀란 무당벌레 한 마리가 화라락 날개를 펼치며 날아오릅니다.


비이잉비이잉. 무당벌레의 까만 점 일곱 개가 햇살에 미끄러지며 허공에 흩어집니다. 풀잎이 아기 사슴 얼굴을 쿡쿡 찌릅니다. 아기 사슴은 몇 걸음 비틀거리다 픽 주저앉아버렸습니다.


"리초야!"


멀리서 아기 사슴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얀 조팝나무 덤불이 흔들거립니다. 꽃 한 무더기가 하얀 구름이 되어 뛰쳐나옵니다. 꽃사슴 뒤로 노란 씀바귀와 하얀 개망초가 휙휙 바람처럼 지나갑니다.


"이런. 울지 마라. 우리 아가."


조팝나무를 헤치고 달려온 엄마 사슴은 아기 사슴을 껴안았습니다. 리초는 엄마를 만나자 다시 서럽게 울기 시작합니다.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엄마가 없어진 줄 알았잖아.”




조팝나무 하얀 꽃은 봄이 되면 금방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많은 지자체에서 관상수로 심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막 작은 꽃들이 봉우리를 맺고 있는 것도 볼 수 있고, 어느 가지에서는 활짝 피어 봄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빼어나게 해줍니다.


연둣빛 나무잎도 순하고 여립니다. 보드라운 게 꼭 동화 속 아기사슴 리초를 닮았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 나무줄기가 온통 하얗게 조팝나무 꽃잎으로 뒤덮이게 되면 그야말로 눈 부신 게 아닌, 봄 부신 날이 됩니다.



<조팝나무 꽃>



멀리서 보면

마치 좁쌀밥 같아

그게 모든 걸 먹는 걸로만 보던

가난한 사람들의 항변 같은 것이지


이렇게 예쁘게 노란 좁쌀을 본 적이 있던가

맞아. 멀리서 보면 꼭

흰 쌀밥에 드문드문 좁쌀 알갱이 심어놓은 것 같지


그게 소원이었던 시절

흰 쌀밥만 먹어보면 소원이 없겠다던 시절

어쩌다 쌀을 구하면

쌀은 줄이고 양은 늘이려고

좁쌀도 넣고, 콩나물도 넣고, 밤도 넣고

그렇게 맛난 밥들을 먹었지

가난이 죄가 아니라

가난한 부모가 죄인이던 시절



하나둘 이제 꽃망울 터뜨리는구나

곧 세상을 하얗게 뒤덮겠구나

온 세상이 배부를 때까지

꽃 기운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까지

너는 터져 나오겠구나


(후조 이태훈 쓰다)





그래서 제 블로그 프로필 사진은 조팝나무 꽃으로 나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작지만 아름다운, 작지만 작지 않은, 홀로 피어도 아름답지만 무리 지으면 더 아름다움을 극대화시켜주는, 작고도 아름다운 꽃, 조팝나무 꽃.


오늘 아침에는 산책을 하러 나가서 조팝나무 꽃 사진만 잔뜩 찍고 왔습니다. 이제 막 피어나고 있습니다. 시에서 적은 것처럼 이제 곧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사방에서 하얗게 터져 나올 것입니다. 봄이 팡팡 팝콘처럼 우리 가슴 부풀어오르도록 터져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꽃은 터지지 않고 제 자리를 지킵니다. 제 자리를 지킬 수 있어서 우리는 행복한 마음, 배부른 마음, 깨끗한 마음으로 봄을 걸어갑니다. 조팝나무 꽃이 피기 시작해서 참 아름다움 봄이 되고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봄부신 날, 그리고 서울여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