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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부신 날 May 08. 2024

(숲속의 빨간신호등) 6.괴물이 나타났다

환경생태동화

6. 괴물이 나타났다

     

햇빛이 조금씩 뜨겁다고 느낄, 그런 여름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습니다.

"까악 까악. 모두 나와 보세요. 사람들이 사라졌어요."

까치 부부가 돌아다니며 소리쳤어요. 습관처럼 귀를 막고 있던 리초가 살며시 일어섰습니다.

"구구구.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구구 아가씨도 나뭇가지 사이를 날아다니며 동물들을 깨웠습니다.

"정말?"

굴토끼 앵초가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정말?"

얄라 아저씨도 고개를 쏘옥 내밀었습니다. 

"정말?"

저 멀리서 멧토끼 앙띠가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앵초는 용기를 내어 굴 밖으로 몸을 쑥 빼내었습니다. 시원한 바람이 쫑긋 세운 두 귀를 살랑살랑 간지럽혔습니다. 


정말? 정말? 정말?

토끼들이 알을 깨고 막 태어나는 새끼 새처럼 뾱뾱뾱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앵초는 조심조심 밖을 둘러보았습니다.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쿠르르릉 하며 땅이 흔들리던 소리도, 지잉 지잉 하며 나무를 베어내던 소리도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쿵쿵쿵 가슴 철렁 내려앉게 하던, 나무들이 쓰러지는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습니다. 멀리서 비잇종 비잇종 새소리만 바람결에 실려왔습니다. 앵초는 조금 더 용기를 내었지요. 두 귀를 최대한 높이고 살금살금 토끼풀밭 끝까지 가 보았습니다. 


"앗,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앵초는 너무 놀라 비명을 질렀습니다. 잘못 본 것이 아닌가 하고 몇 번이나 눈을 비볐습니다. 세상에. 토끼풀밭 끝쪽부터 여우들이 숨어 살던 여우골까지 숲 한쪽이 뭉텅 사라져 버리고 없었습니다 절벽처럼 깎인 채 벌건 맨몸을 그대로 누워 있었습니다. 흙 위로 군데군데 박혀 있는 커다란 돌멩이 사이에는 이제 막 뿌리를 내린 어린 풀들이 듬성듬성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토끼풀밭 아래로 심한 경사가 나 있었고 경사진 언덕 아래로는 처음 보는 이상한 길이 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흙을 퍼내고 나무를 베어내어 만든 새로운 길이었습니다. 고개를 삐죽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던 앵초는 너무 아찔하여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내려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야겠어.”

정신을 차린 앵초는 나지막히 말했습니다.   토끼풀밭을 지키는 대장이니까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토끼풀밭에 사는 토끼들이 위험에 빠지면 안 되기 때문에 이곳저곳을 미리미리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리막길 경사가 심해 보였지만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가늠하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이 정도쯤이야'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앵초는 경사길로 폴짝 뛰어 내렸습니다.


쭈르르 쭈르르. 내리막길은 생각보다 가파랐습니다. 앵초는 이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어 어 어'하며 소리를 지르다 살짝 튀어나온 돌부리에 걸려 몇 바퀴를 데굴데굴 굴렀습니다.

에퉤퉤.

앵초는 입안 가득 들어온 먼지를 뱉었습니다. 발바닥이 까지고 엉덩이에도 상처가 생겼습니다.

'그래도 토끼풀밭 대장을 하려면 이 정도는 참아야지.'

앵초는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여우에게 쫓기는 것도 아니었는데 이런 상처를 내다니, 가만히 생각해보니 대장답지 못한 행동이었습니다. 

'이 정도 경사에 미끄러지고.'

앵초는 도리질을 하며 까진 뒷발을 들어 입으로 호호 불었습니다. 경사 아래에는 빗물이 흘러가도록 좁은 배수로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양 옆으로 노란 풀꽃이 가득 피어 있었습니다. 상큼한 풀냄새가 물씬 풍겨 나왔습니다. 앙증맞게 생긴 노란꽃이 앵초를 부르고 있습니다. 


꼬르륵.

앵초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아무 것도 먹지 않은 게 생각났습니다. 앵초는 우선 배를 먼저 채우기로 했습니다. 줄기를 앞발로 잡고 이빨로 살짝 깨물어 보았습니다. 처음 보는 풀이었지만 다행히 먹을 만했습니다. 

'고마워. 노란 꽃들아.'

앵초는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잠시 동안 노란 꽃을 쳐다본 다음 열심히 풀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맡아보는 향이 좋았습니다. 토끼풀처럼 잎이 넓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독특한 맛이 납니다. 

'뜯어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앵초는 배고픔에 지쳐 있는 가족들이 생각났습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앵초는 음식을 배 속에 넣어 두었다가 배 고플 때 야금야금 꺼내먹는 리초가 생각났습니다. 앵초는 질릴 때까지 풀을 뜯어 먹었습니다.

'예의 바른 앵초가 영 엉망이군. 이름도 모르는 풀을 마구 뜯어 먹다니.' 

앵초는 갑자기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름도 모른 채 풀을 먹는 건 아주 예의 없는 토끼들이나 하는 행동이거든요. 배고픔이 앵초를 이렇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미안. 꼭 네 이름을 알아 놓을 게. 하지만 네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먹은 건 알지?"

앵초는 살며시 풀잎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 이제 길을 보러 가야지.'


앵초는 배를 동동 두드리며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배가 부르니 긴장도 풀리나 봅니다. 하품이 햇살처럼 쏟아져 나옵니다.

"어, 이상하다? 위에서 볼 땐 분명히 길쭉한 길이 있었는데?"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높다란 울타리가 앵초 앞을 가로 막고 있습니다. 풀쩍 뛰어 올라 보았지만 어림도 없습니다. 앵초는 좁은 풀섶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한참을 내려가자 드디어 토끼풀밭 위에서 보았던 길이 나타납니다. 길 양편으로는 나무가 띄엄띄엄 줄을 지어 서 있었습니다.


“엥? 무슨 나무들이 이렇게 서 있어?”

 앵초는 입을 가리고 킥킥 웃었습니다. 어떤 나무들이 이렇게 줄을 지어 태어날 수 있을까요? 숲에 있는 나무들은 모두들 제각각이거든요. 키도 제각각, 몸매도 제각각입니다. 쭉쭉 하늘로 뻗은 나무가 있는가 하면, 뱀처럼 몸을 뵈뵈 꼬며 자라난 나무도 있습니다. 어떤 나무는 옆으로만 가지를 펼쳐 햇빛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가 하면, 어떤 나무는 하늘 꼭대기에만 잎을 매달아 놓아 아무 것도 먹지 못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 있는 나무들은 키도 비슷비슷, 생긴 것도 비슷비슷, 이파리를 매달고 있는 높이도 비슷비슷했습니다. 앵초는 길 위에 발을 살짝 얹어 보았습니다. 햇볕을 받아서인지 따끈따끈합니다. 그런데 길치고는 이상했습니다. 흙처럼 폭신하지도 않을 뿐더러 풀 한 포기 보이지 않습니다. 그새 리초네가 와서 새순이 올라오는 족족 다 먹어 치워 버린 게 아니라면 정말 이상한 길입니다. 흙 색깔도 이상한 데다가 동물 발자국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동물들이 이렇게 흔적도 없이 지나갔을까?' 

앵초는 코를 가까이 댔습니다. 그때 바람과 함께 갑자기 뜨거운 열기가 가슴께로 훅하며 밀려왔습니다. 동물 냄새는커녕 참기 힘들 정도의 역겨운 냄새가 뿜어져 나왔습니다. 앵초는 깜짝 놀라 얼른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습니다. 머리가 띵해져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잽싸게 코를 막았습니다. 지금까지 온 숲을 뒤덮었던 바로 그 냄새였습니다.


크아앙.

그 때 요란한 소리를 지르며 길 위로 달려오는 동물이 있었습니다. 앵초는 얼른 몸을 엎드렸습니다. 동물은 순식간에 앵초를 스쳐 지나 길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얼마나 빨리 지나갔던지 어떻게 생긴 동물인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뒤로 계속해서 이상한 동물들이 길 위를 달려갔습니다. 


"거기서 뭐해?"

얄리가 토끼풀밭 위에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내사랑 얄라구나. 새로운 길이 생겼어요. 어떤 길인지 살펴보는 중이었지요. 이제 올라갈 게요."

앵초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몇 번 폴짝폴짝 뛰어 봤지만 그 때마다 줄줄줄 미끄러졌습니다. 앵초는 머리를 긁적였습니다.

"내가 내려가서 구해줄 게."

 얄라가 소리쳤습니다. 

"내려오면 안 돼요!"

앵초가 앞발을 마구 흔들었지만, 얄라는 어느새 데굴데굴 구르며 경사길을 우당탕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에퉤퉤. 풀섶에 떨어진 얄라는 입 안 가득 고인 흙을 뱉었습니다. 

"내사랑 얄라, 다친 데는 없어요?"

"응, 괜찮아. 내가 도와줄 게. 어서 올라가자."

"경사가 너무 심해 올라갈 수가 없어요."

앵초는 얄라에게 눈을 살짝 흘겼습니다. 얄라도 앵초처럼 몇 번 폴짝폴짝 뛰어보았지만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여긴 풀이 참 많군."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던 얄라가 놀란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곤 금세 코를 파묻고 풀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음, 좀씀바귀는 풀도 꽃도 향기도 참 좋아. 그렇지, 내 사랑 앵초?"

"좀씀바귀라고요? 내사랑 얄라는 모르는 게 없군요."

앵초는 얄라를 부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았습니다.

"뭘 그까짓 것 가지고. 우리 토끼풀밭에는 없지만 약간 낮은 산이나 들판에는 많아."

얄라는 다시 열심히 풀을 뜯어 먹었습니다.

"좀씀바귀야. 고마워."

앵초는 미안한 마음으로 뒤늦게 인사를 했습니다.

"하여튼 우리 이쁜 앵초는 예절이 너무 바르다니깐. 꽃들은 듣지도 못할 거요. 그리고 우리가 먹어 주는 걸 감지덕지 고마워 해야 할 거라구."

"그렇지 않아요. 꽃들은 벌들에게 꿀을 내주고 또 사랑해서 아기 꽃을 낳는다구요. 우리랑 똑같아요. 다를 게 하나도 없지요."

"너무 생각이 깊으면 아무 것도 먹지 못할 거요.

"그래서 저는 나비랑 벌이 꿀을 다 퍼간 꽃잎만 찾아 먹으려고 노력한다구요."

"좀더 아래로 내려가 봅시다."

배를 채운 얄라는 앵초 마음은 생각지도 않고 깡충깡충 풀섶을 따라 아래로 뛰어갔습니다. 앵초도 그 뒤를 따라 깡충깡충 뛰었습니다. 


크아앙.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길 위로 동물 하나가 지나갔습니다. 얄라는 너무 놀라 그만 앞으로 떼구르르 뒹굴고 말았습니다.

"저게 뭐지?"

"모르겠어요. 처음 보는 동물인데 무지하게 빨라요."

앵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정말 빠르군. 태어나서 저렇게 빠른 동물은 처음이야. 정말 처음이야.”

얄라는 겁을 잔뜩 먹어 모기소리처럼 작게 속삭였습니다.

"저기 올라가는 길이 있어요."

앵초가 위를 가리켰습니다.

"처음 보는 길인데?"

가파른 경사가 끝나고 오른쪽으로 소나무와 아카시아 나무 사이로 좁은 흙길이 보였습니다. 얄라와 앵초는 순식간에 위로 뛰어갔습니다. 그러나 길처럼 보였던 길은 어느새 희미해지고 울창한 덤불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길이 아닌가 봐."

얄라가 자귀나무 아래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자귀나무는 솜털처럼 화사한 연분홍 꽃을 막 피워내고 있었습니다. 무성한 자귀나무 잎사귀들이 토끼들이 닿을 수 없는 높이에서 살랑대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배가 부르지만 자귀나무도 낮게만 매달려 있다면 연한 이파리는 좋은 식사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앵초가 뛰어 이파리를 따먹기엔 한참 높았습니다.

"가만, 저건 무슨 소리죠?"

앵초가 귀를 쫑긋 세웠습니다. 

“무슨 소리? 난 안 들리는데.”

얄라가 눈을 껌벅거렸습니다. 앵초가 두어 걸음 앞으로 가더니 갑자기 덤불 뒤로 사라졌습니다.

"내사랑 얄라. 빨리 와 봐요."

덤불 속에서 앵초 목소리가 튀어 나왔습니다. 얄라는 목소리를 따라 덤불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앗, 어떻게 이런 곳이?"

얄라는 몇 번이나 눈을 비볐습니다. 앵초 뒤를 따라 들어간 곳은 이 세상 위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한 아늑하고 평화로운 초원이었습니다. 나무들이 호위하듯 원을 그리며 풀밭을 빙 둘러싸고 있었고 널따란 바위가 주인처럼 떡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갑자기 리초와 따오가 불쑥 앞으로 나와 인사를 했습니다. 얄라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두 사슴 때문에 그만 엉덩방아를 찧었습니다.

"어떻게 오셨어요? 여긴 우리 비밀 집인데...." 

리초가 방긋 웃었습니다.

“여기가 너희들 집이라고?”

앵초와 얄라가 동시에 소리쳤습니다.

“쉿! 엄마가 주무셔요”

리초가 잠자고 있는 리오를 가리켰습니다. 리오는 박달나무 아래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여기가 너희 집이었구나. 이렇게 좋은 집에서 사는 줄 몰랐네.”

얄라가 부러운 표정으로 웃었습니다.

“우리집도 좋잖아요. 비도 막아주고 바람도 막아주고, 여긴 넓은 것 빼고는 뻥 뚫려서 뭐, 그저 그런데, 뭘.”

앵초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휘휘 건성으로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아참, 그럼 토끼풀밭으로 가는 길을 알겠구나."

얄라가 갑자기 생각난 듯 소리쳤습니다.

"그럼요.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지요."

따오가 눈 감는 시늉을 하며 말했습니다. 그제서야 앵초는 자기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생각해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길을 찾게 되었다는 안도감에 한숨을 피유 하고 내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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