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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부신 날 May 22. 2024

(숲속의 빨간 신호등) 8. 리오의 죽음

환경생태동화

8. 리오의 죽음


다음날 아침, 엄마 여우가 괴물에게 당했다는 소문은 물수제비처럼 통통 튀며 빠르게 퍼졌습니다. 모두를 벌벌 떨게 만드는 무서운 소문이었습니다. 여우만큼 강하고 빠르고 날렵한 동물은 없었습니다. 얼마나 빠른 놈이길래 여우가 당했을까?  얼마나 힘이 세길래 여우가 한 방에 나가 떨어졌을까? 각자 혼자만의 괴물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괴물은 온갖 추측이 덧입혀져 전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용 같은 괴물로 탈바꿈했습니다. 어떤 동물은 꼬리가 아홉 개 달린 괴물이라고도 했고, 어떤 동뭉른 눈이 여섯 개 달린 괴물이라고도 했습니다. 또 눈에서 나오는 빛을 보면 눈이 멀어버린다고도 했고, 괴물에게는 몸 뒤에는 빨간 눈이 달려있다고도 했습니다. 온갖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그렇지만 다음날,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너구리 뚜루는 새끼 둘을 토끼풀밭에 남겨놓고 나머지 두 아들만 데리고 길을 건넜습니다. 뚜루는 운이 좋았습니다. 그들이 길을 건너자마자 커다란 괴물이 바람처럼 지나갔습니다. 가슴을 쓸어내린 뚜루는 오소리숲에서 맛있게 식사를 했습니다. 오소리숲에는 먹을 것이 풍부했습니다. 뚜루는 나머지 두 새끼도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소리숲에 새끼를 남겨 놓고 다시 토끼풀밭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이번에도 정말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막 길을 건너자마자 괴물이 씽 하고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뚜루는 다시 오소리숲으로 건너갈 수 없었습니다. 괴물들이 길 위로 다니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하루이틀 기다리다 지친 너구리 아이들은 날마다 길가에 나와 엄마를 부르며 울었습니다. 


"친구가 불쌍해."

오소리 야리의 큰 아들 오비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구해주러 가자."

동생 오티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장단을 맞추었습니다. 둘은 엄마 몰래 길 가로 갔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새로 생긴 길로는 가지 말아라.”

엄마 오소리가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피, 엄마는 늘 하지 말라는 것뿐이야.”

오비와 오티는 엄마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괴물이 길 위로 지나다닌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그건 단지 소문일 뿐이었습니다. 두 친구가 길 건너편에서 울고 있는데, 소문 때문에 길을 건너지 않는다는 건 친구를 배신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구해 줄게. 울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오비가 길 건너편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어서 건너 와서 나를 구해 줘. 무서워 죽겠어.”

너구리는 합창을 하듯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신기하게도 쉴 새 없이 지나다니던 괴물들이 조용해졌습니다.

“이 때야.” 

오비와 오티는 겁도 없이 훌쩍 길 위로 뛰어 올랐습니다. 참기 힘든 괴로운 냄새가 길 위에 가득했습니다. 


“위험해!”

너구리 친구가 외쳤습니다. 그러나 이미 늦었습니다. 오비와 오티가 갑자기 그리고 동시에 나타난 서너 마리의 괴물을 발견한 순간, ‘괴물이다!’ 하고 외친 바로 그 순간, 괴물들은 어느새 두 오소리의 코 앞까지 다가와 있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어서 건너편에 있던 너구리 친구들조차도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 감았던 눈을 떴을 때, 오비와 오티는 이미 이 세상 친구가 아니었습니다. 


야리 아주머니와 올리 할아버지는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뚜루는 몸 둘 바를 몰라서 죄송하다는 말만 수없이 했습니다. 자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뚜루는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했습니다. 얼마나 슬퍼했던지 이제는 오히려 두 아들을 잃은 야리 아주머니가 뚜루를 위로해 줄 지경이 되었습니다.     

 

다시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제는 풀이 싫어. 계속해서 풀만 먹었더니 질렸단 말야."

리초는 하루 종일 엄마를 쫓아다니며 보챘습니다. 엄마 사슴은 대답이 없었습니다.

"엄마, 응? 어제는 열매 먹는 꿈까지 꿨단 말이야."

한참을 고민하던 리오가 일어섰습니다. 며칠을 굶었는지 얼굴이 부스스했습니다. 눈은 퀭하니 들어갔고 뺨도 홀쭉해져 있었습니다. 리오가 슬프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을 맘껏 먹이지 못한 이 어미의 죄가 크구나.”


리오는 혀로 리초와 따오의 얼굴을 핥았습니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릴래? 오소리 숲에 가서 맛있는 열매를 따 올 게."

리오는 리초의 뺨에 조용히 입을 맞추었습니다.


“하지만 거긴......”

따오가 걱정스럽게 말했습니다.


“알아. 하지만 조심하면 될 거야.”

엄마 사슴이 얼굴 가득 웃음을 지었습니다. 


"엄마, 같이 가요. 나도 갈래요."

리초가 따라나섰습니다.


"안 돼. 리초야. 엄마가 금방 갖다 올 테니까 그 때까지 조금만 참고 있으렴."

엄마는 리초를 떼어 놓았습니다.


“따오야, 네가 좀 데리고 있으려무나. 우리 철부지 리초를 맡아주지 않겠니?”

“예.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어, 어머니.”

“어머니라구?”

엄마 사슴이 놀라 고개를 들었습니다.

“따, 따오야.”

리초가 흥분하여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엄마 사슴 눈가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혔습니다. 

“고맙구나. 내 아들 따오야.”

“고맙긴요. 이제야 어머니라고 불러서 죄송해요. 하지만 맘속으로는 늘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따오는 겸연쩍게 웃었습니다. 엄마 사슴은 따오에게 다가가 살며시 따오를 껴안았습니다. 리초도 따오를 껴안았습니다. 셋은 목을 어긋맞춘 채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습니다.     


리오는 조심스럽게 새로 난 길로 갔습니다. 길 건너편에서는 뚜루의 두 아들이 엄마를 부르다 지쳐 훌쩍이고 있었습니다.

"얘들아!"

리오가 조심스레 아기 너구리들을 불렀습니다.


"앗, 리초 엄마다!"

아기 너구리들은 리오를 보자 반가워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쪽에 열매가 많니?"

리오가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계속해서 괴물들이 붕붕거리며 지나가는 바람에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네. 많아요. 어서 와서 우릴 구해주세요."


아기 너구리들이 큰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갈 테니까."


리오는 괴물들이 뜸해지길 기다렸습니다. 밤이 깊어지면 괴물들이 숨을 죽이듯 조용해질 때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한참 시끄럽게 달려가던 괴물들이 뜸해졌습니다. 리오는 용기를 내어 오른쪽 앞발을 길 위에 올려 보았습니다. 아무런 울림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뒷다리까지 모두 올렸습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길 중간 지점까지 조심조심 걸어갔습니다. 가만히 고개를 서서 냄새를 맡았습니다. 약하게 무슨 냄새가 나는 듯합니다.


붕.

괴물이 나타났습니다. 리오는 엉겁결에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오던 길로 되돌아가야할지 길 건너편으로 뛰어가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엄청난 속도로 달려온 괴물이 리오를 들이받았습니다. 리오는 아기 너구리 앞에서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리오가 죽은 다음날, 다람쥐 모야가 도토리를 구하러 길을 건너다 죽고 말았습니다. 청설모 설마는 졸지에 다람쥐 식구들까지 보살펴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설마가 길을 나서면 아기 청설모와 아기 다람쥐들이 그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녔습니다. 평소에는 먹을 것을 가지고 서로 다투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토끼풀밭 동물들은 슬픔에 목이 잠긴 채 하루하루를 맞이했습니다. 리초는 밤새도록 울고 또 울었습니다. 이제는 엄마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따오가 옆에 있었지만 따오도 그저 펑펑 눈물을 쏟을 뿐이었습니다.      


토끼풀밭은 풀뿌리까지 캐 먹어 점점 사막처럼  변해갔습니다. 토끼들은 굴 입구를 막는 데 사용한 풀까지 몽땅 먹어치워 굴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습니다. 토끼풀밭에 사는 동물 가운데 괴물한테 당하지 않은 가족이 없었습니다. 토끼풀밭에는 배고픔과 죽음의 소리만이 가득했습니다. 여우 싸리도 슬픔에 겨워 눈물을 흘리고만 있었습니다. 아내 없이 혼자서 새끼 여우를 키우며 먹을 것을 찾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이제 이 일은 개개인의 일이 아니라 토끼풀밭에 사는 동물 모두의 일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리초와 따오는 엄마가 만들어 준 아늑한 장소에 조용히 누웠습니다. 이곳도 이미 다른 동물들에게 알려져 더 이상 비밀스런 곳은 아니었습니다. 풀잎들은 뜯겨 나간 지 오래였습니다. 그나마 박달나무와 덤불잡목이 빽빽이 있어 바람을 피해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흐릿한 회색 달이 리초와 따오를 희미하게 비추었습니다. 두 사슴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 잠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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