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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부신 날 Jun 05. 2024

(숲속의 빨간신호등) 10.첫 번째 동물회의

생태환경동화

10. 첫 번째 동물회의 

    

"정말 하루하루가 불안해서 살 수가 없어." 

가장 먼저 입을 연 동물은 무섬증을 제일 많이 타는 들쥐 까루였습니다. 


"그래요. 겁이 나서 도무지 길을 건널 수가 없어요."

뺨이 홀쭉해진 굴토끼 앵초도 한 마디 거들었습니다. 


"저쪽 산에 있는 내 새끼들은 굶고 있지는 않는지……."

오동통한 너구리 뚜루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도토리와 잣이 없으면 우린 모두 굶어 죽고 말 거예요."

청설모 설마도 침통한 표정으로 거들었습니다.     


"벌써 많은 친구들이 죽었어."

올리 할아버지가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습니다.

"손자가 죽던 날이 생각나는구먼. 쿨럭쿨럭. 여기서 리초랑 숨바꼭질을 하며 놀곤 했었는데……."

할아버지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습니다.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행복이 가득했던 우리들의 보금자리가…… 두 동강 나고 말았어. 쿨럭쿨럭쿨럭. 

할아버지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지 심한 기침으로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시원한 바람이 박달나무를 한 차례 흔들고 지나갔습니다. 


"이젠 먹을 것도 없어졌어."

족제비 타랑이 홀쭉해진 허리를 매만지며 말했습니다.


"맞아. 맞아."

올망졸망 앉아 있던 타랑 가족이 합창을 했습니다.

"휴, 여긴 먹을 게 없어. 빨리 오소리숲으로 건너가야 하는데, 쿨럭. 길을 건너려고 하면 그 놈의 괴물이 달려와 죽여 버리니……." 


한참 숨을 고른 올리 할아버지가 여우를 쳐다보았습니다.

"싸리 박사. 무슨 좋은 대책이 없을까?"

"험험. 저한테 제일 먼저 물어보실 줄 알았죠."


여우는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은 가슴 털을 한껏 위로 부풀렸습니다.

"여우가 그래도 똑똑한 편이죠. 제 입으로 말하는 게 쑥스럽긴 해도, 어쨌든 마을 어른이신 오소리 할아버지가 제게 첫 의견을 물어보신 것만 봐도 그 사실은 어느 정도 인정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책이 있다는 말인가요, 없다는 말인가요?” 

너구리 뚜루가 나무 위에서 풀쩍 뛰어내리며 말을 잘랐습니다. 싸리 박사는 흠칫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났습니다.

“대책이라면 …… 사실 저도 이 괴물은 처음 보는 거라서…… 음 그러니까 해결책이랄 것 까지는 없고……. 음, 혹시 저보다 조금 덜 똑똑하긴 하지만 부들 박사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부들 박사도 종종 좋은 해결책을 내놓곤 하니까 먼저 대답을 들어보는 것도 나쁠 것은 없겠죠."

잘난 체를 하다가 대답하기 힘든 문제에 부딪치면 다른 동물한테 슬쩍 떠넘기는 것은 싸리 박사의 특기입니다.


"글쎄, 왕똑똑 싸리 박사조차 모르는 걸 내가 어찌 알겠소?"

부들 박사는 얄밉게 행동하는 싸리에게 화가 났습니다. 눈을 부라리며 날개를 크게 퍼덕거렸습니다. 깃털이 마구 떨어지자 나무 아래에 있던 들쥐 까루가 눈을 찌푸렸습니다.


"나는 밤에만 다니기 때문에 잘 모르겠소. 혹시 구구는 알지도 모르지. 이곳저곳을 많이 돌아다니니까."

부들 박사의 말에 모든 시선이 산비둘기에게 쏠렸습니다. 


"흠흠……"

구구는 눈길이 부담스러운 듯 헛기침을 두어 번 했습니다.

"오래 전 일이에요.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한 번 간 적이 있어요. 그 때 비슷한 괴물을 봤던 것 같아요. 정확하진 않지만. 그런데 .......“

산비둘기 구구가 잠시 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함께 있던 다른 동물들도 동시에 침을 꿀꺽 하고 삼켰습니다. 

“그런데, 뭐요? 빨리 말해 봐요. 아이, 궁금해 죽겠네.”

족제비 타랑이 이야기를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지 마세요. 괴물들은 사람을 배 속에 넣고 다녔어요."

"사람들을 배 속에 넣고 다닌다구?"

“그건 말도 안 돼요.”

“구구 아가씨. 정말 제대로 본 거요? 혹시 다른 거랑 착각하는 건 아니요?”

"사람을 잡아먹는 게 아닐까요?"

"우리도 잡아먹을 게 분명해."


구구의 말 한 마디에 모두들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여우보다도 더 무섭다는 사람을 잡아먹는 동물이라니. 감히 어떻게 대적해야 할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레 겁을 먹은 동물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습니다. 그때 멧토끼 앙띠가 볼멘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땐가요? 우리 식구는 3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어요. 내가 배고픈 건 참을 수 있지만 우리 새끼들이 배고파 우는 건 차마 볼 수가 없어요. 뭔가 좋은 방법이 나올까 싶어 기다렸는데, 이게 뭔가요? 모두들 구구 말 한 마디에 걱정만 하고. 여긴 겁쟁이들만 모였군요. 흐흐흑."

앙띠는 새끼들이 보는 것도 잊어버린 채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으앙. 으앙. 엄마가 울자 멧토끼 새끼들도 덩달아 울기 시작했습니다. 회의장은 갑자기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 자, 앙띠 씨. 그걸 얘기하려고 모인 거니까 울음을 거두시구려."

옆에 있던 족제비 타랑이 부드러운 나뭇잎으로 앙띠의 눈물을 닦아 주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여우 싸리가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났습니다.

"앙띠 말을 듣고 부끄럽지도 않나요? 우리가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순 없어요. 우리 모두 괴물과 맞서 싸웁시다. 안 그러면 모두 괴물들의 밥이 되고 말 거예요. 아무리 힘이 세다 해도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싸운다면 우린 괴물 같은 놈을 몰아낼 수 있을 겁니다."

"맞아요. 힘을 합치면 될 거예요."

"같이 싸웁시다."

뚜루와 타랑도 당장 싸울 것처럼 일어났습니다. 부들 박사가 나뭇가지 위에서 눈을 부릅뜨고 말했습니다.

"해결책을 생각하지 못한 게 창피하다고 해서 그런 식으로 일을 벌이면 되나!"


싸리가 발끈하여 소리쳤습니다. 

"창피하다니. 나를 그런 동물로 깔보는 거요? 하긴 당신이야 밤에만 몰래 날아다니니까 놈에게 잡힐 염려도 없겠지만 ……"

싸리는 '몰래'라는 말에 일부러 힘을 주었습니다.

"나는 밤이라고 해서 몰래 날아다니진 않아. 어쨌든 싸운다고 어설프게 덤볐다간 모두 죽고 말 거야. 자네 아내가 그 때문에 죽었잖아. 그런데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양이군.“

“내 아내 얘긴 왜 꺼내는 거요? 아내는 비겁하지 않았소. 혼자라서 당해내지 못했지만 우리들이 힘을 합친다면 그땐 얘기가 달라질 거요.”

싸리는 씩씩거리며 부들 박사를 노려보았습니다.

“아, 자네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면 미안하네. 하지만 정체도 모르고, 질 게 뻔한 싸움에 우리가 말려들 필요가 없어. 우리는 그저 오소리숲으로 건너가기만 하면 되는 거라구. 그게 우리 모두가 사는 길이지."

부들 박사는 못 먹는 열매를 뱉어내는 것처럼 말을 툭툭 뱉어내었습니다. 그건 싸리를 살살 약 올리는 말투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맞아요. 우리는 이길 수 없어요. 우린 질 게 뻔하다구요."

앵초가 달리기를 자랑하듯 뒷다리를 앞으로 쭉 내밀었습니다. 토끼들이 빠른 건 여우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죽자살자 뛰는 토끼를 따라잡을 수 있는 동물은 몇 되지 않거든요.

“거기다 싸리 박사 말대로 하면 잘 될 일도 잘 안 돼요.”

들쥐 까루가 한 마디 내뱉고는 쪼르르 토끼들 사이로 숨어 버렸습니다.

"이런 젠장, 누가 그런 허튼 소리를 퍼트리고 다니는 거요?"

싸리 박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습니다. 싸리는 바위 위로 훌쩍 뛰어 올라 앞발을 높이 쳐들었습니다. 여우 새끼들이 존경하는 눈빛으로 아빠 여우를 쳐다보았습니다.

"힘을 합쳐 놈을 몰아냅시다! 건너편으로 용케 건너간다 하더라도 우리가 언제 놈한테 당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언제까지 무서워 떨며 숨어 지낼 겁니까?" 

싸리는 웅변을 하는 것처럼 침을 튀기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괴물을 없애는 것만이 우리 마을의 평화를 쟁취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죽은 가족을 생각합시다."

"싸웁시다! 싸웁시다!"

너구리와 족제비도 큰 소리로 따라 외쳤습니다.


"안 됩니다. 건너갈 방법을 찾아봅시다."

이번에는 토끼와 다람쥐, 청설모 등 덩치 작은 동물들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동물들은 어느새 싸리 박사 편과 부들 박사 편으로 갈라졌습니다. 서로 목소리를 높여 자기 주장을 외치느라 회의장은 시장판처럼 시끄러워지고 말았습니다.     


"조용! 조용! 쿨럭쿨럭……."

오소리 할아버지가 박달나무에 몸을 의지한 채 힘겹게 일어섰습니다.

"싸우는 것도 그렇고 건너가는 것도 그렇고, 둘 다 우리에겐 위험한 일이야. 그렇지만 여기서 몽땅 굶어 죽을 순 없지. 먼저 괴물이 어떤 놈인지를 알아야 해. 그래야 싸우든지 건너가든지 할 수 있지 않겠나? 쿨럭쿨럭."

"하지만 무슨 수로 정체를 알아낸단 말입니까? 그 놈들은 너무 빨라서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다구요!"

싸리 박사가 입을 삐죽거리자 튀어나온 입이 더욱 뾰족하게 보였습니다.

"쯧쯔,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싸운단 말인가?"

부들 박사는 기가 찬다는 듯이 대꾸했습니다. 싸리 박사가 분을 참지 못하고 부들 박사를 노려보았습니다. 부들 박사도 지지 않고 부리부리하게 큰 눈방울로 싸리 박사를 마주 보았습니다. 두 박사는 지지 않겠다는 듯이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눈으로만 상대를 노려보았습니다.     


구구구. 정적을 깨고 산비둘기 구구가 앞으로 나왔습니다.

"제가 마을에 내려가서 알아볼 게요. 저는 집비둘기랑 비슷하게 생겨서 사람이 쫓아내지 않을 거예요."

"그거 좋은 생각이군. 쿨럭."

오소리 할아버지는 분위기를 바꿔 준 구구가 고마운지 얼른 말을 받았습니다.

"저희도 같이 가겠어요."

사이좋기로 소문난 까치 부부, 우리와 끼리가 옆에서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좋아요. 그럼, 구구와 까치 부부가 다녀오면 그 때 이 문제를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쿨럭쿨럭"


오소리 할아버지는 결정을 내린 것처럼 모두에게 돌아가라는 손짓을 했습니다. 올리 할아버지는 힘겨운 걸음으로 리초에게 다가갔습니다. 

"혼자라서 무섭지?"

할아버지가 리초를 꼬옥 껴안았습니다.

"조금만 참으렴. 모두들 네 가족이 되어 줄 거야. 쿨럭."

"녜. 할아버지. 고마워요."

리초는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리초야, 힘 내. 따오도.”

“네. 고맙습니다.” 


다른 동물들도 나가면서 리초와 따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러곤 모두들 바쁜 일이 있는 것처럼 급히 숲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싸리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빨리 가지 않고 서성거렸습니다. 새끼 여우들이 아빠에게 빨리 가자고 칭얼거렸습니다. '따오. 지난 번에는 미안했어.' 싸리가 불쑥 말을 던졌습니다. 따오가 무슨 말인지 잘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에 싸리는 새끼들을 데리고 급히 자리를 떴습니다. 시끌시끌했던 리초네 앞마당이 다시 조용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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