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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부신 날 May 29. 2024

(숲속의 빨간신호등) 9. 지도자를 뽑다

환경생태동화 

9. 지도자를 뽑다     


풀밭 대장 앵초는 자신이 뭔가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대로 있다간 숲속의 모든 동물이 굶어 죽고 말 겁니다. 새롭게 나타난 무시무시한 적 앞에서 이제는 모두가 힘을 합쳐야 했습니다. 앵초는 알림글을 써서 토끼풀밭 곳곳에 붙였습니다.      


알립니다.     

오늘 해가 질 무렵,

리초네 앞마당에서 

비상사태 해결을 위한

긴급 모임을 갖고자 합니다.

빠짐없이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토끼풀밭 대표 앵초 드림.     


저녁이 되자 동물들이 하나 둘 리초네 마당으로 모였습니다. 리초와 따오는 바위 옆에 말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리초는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눈이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온 굴토끼 앵초와 얄라 그리고 멧토끼 앙띠 가족이 리초 옆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찍찍찍찍. 들쥐 까루 가족이 시간에 늦을까 봐 허겁지겁 달려왔습니다. 부엉이 가족이 커다란 날개짓을 하며 신갈나무 가지 위에 앉았습니다.  그 뒤를 이어 산비둘기 구구와 까치 부부가 그 옆 가지에 앉았습니다. 오소리 할아버지와 얄라 아주머니가 들어왔고 족제비 타랑 가족과 너구리 뚜루 가족이 순서를 정한 것처럼 차례차례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바위 반대편 잡풀 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들쥐들은 불안한 듯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꼬리를 들썩거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청설모 설마가 늘어난 식구들과 함께 쪼르르 달려왔습니다.


"다 왔나요?"

앵초가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뱀 선생하고 여우가 아직 안 왔군."

부엉이가 대답했습니다.


"뱀도 오나요? 여우도요?"

들쥐 까루가 걱정스럽게 물었습니다.


"뭐 자격 제한이 있는 건 아니니까, 이 곳에 사는 동물은 누구나 참석해야겠죠."

앵초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습니다.


"안 왔으면 좋겠다."

까루가 앵초 눈치를 보며 말했습니다.


"뱀 선생이나 여우 선생도 다 같이 이 곳에 사니까 안내문을 안 보았을 리는 없을 테고. 조금 더 기다려 보다가 안 오면 그냥 진행합시다. 안내문을 붙였으니까 참석 안 한 동물은 스스로 그 책임을 져야 할 거요."

부엉이가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천천히 말했습니다.


"설마 나를 따돌리려는 건 아니겠지?"

그 때,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여우 싸리가 새끼들을 데리고 불쑥 나타났습니다. 깜짝 놀란 들쥐와 토끼들이 허둥지둥 숨을 곳을 찾았습니다. 여우 세 마리를 동시에 보다니, 들쥐들은 몸을 달달달 떨었습니다. 정말 여우가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나 봅니다. 싸리는 무척 초췌한 얼굴이었습니다. 얼굴은 푸석푸석했고 눈도 썩은 나뭇잎처럼 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들쥐 식구를 보자 퀭한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불쑥 나타나면 어떻게 하나? 토끼와 들쥐 입장도 생각해 줘야지 ."

부엉이가 싸리를 나무랐습니다.


"들쥐가 무서워하지 않을 동물이 토끼와 사슴 빼고 누가 있겠나?"

여우 싸리는 목이 잠겼는지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우리 새들은 사람이 산에 나타난 뒤로 더 이상 들쥐를 잡지 않기로 했다네. 나무 열매와 벌레들만 잡아먹었지. 인간이 나타난다는 건 곧 동물들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거든. 인간과 맞서려면 같은 동물들끼리 적이 되어서는 안 되지." 

부엉이는 같은 동물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습니다. 


앵초가 얼른 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얘긴데요.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약속을 하나 하고 진행을 했으면 합니다. 지금부터 여기에 모인 동물들끼리는 서로 잡아먹지 않겠다고요. 그렇지 않으면 회의를 시작할 수 없어요. 목숨을 내 놓고 회의를 할 순 없으니까요."


"맞아. 앞으로 우린 힘을 합쳐야 하는 한 식구야. 그걸 약속하지 못하는 동물은 그냥 돌아가게. 대신 함께 행동할 생각은 말아야 하네."

오소리 올리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모든 동물들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올리 할아버지가 여우를 보며  말했습니다.

"싸리 박사. 자네 입으로 직접 약속을 해줘야 하네. 토끼와 들쥐 말고도 족제비나 너구리는 물론, 내 딸인 야리도 자넬 무서워하고 있거든. 참, 얼마 전에는 두 달도 안 된 아기 사슴 따오에게 달려들었다가 물 속에 빠졌다는 소문이 나돌던데, 사실이라면 여기 고아가 된 따오한테도 정식으로 사과를 하고 말이야."

"저희들도 여우가 무섭긴 마찬가지죠."

산비둘기와 까치가 입을 모아 얘기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싸리 박사를 무서워하지 않는 동물은 오소리와 나뿐이군."

부엉이가 비꼬듯이 말했습니다.


"올리 할아버지. 그리고 부들 박사님. 저를 싸리 박사라고 정중히 불러 주시니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저희 가족은 어쩔 수 없이 여러분과 적으로 지냈습니다. 사실 그건 우리 잘못만도 아니지요. 맨 처음 동물을 만들고 식물을 만든 그 누군가가 우릴 그렇게 살도록 만들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저희 때문에 피해를 입은 모든 가족에게 진심으로 깊은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그리고 영원히 여러분을 괴롭히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의 행복한 가정을 파괴하지 않겠습니다. 엄마 여우의 죽음을 걸고 맹세합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고 나니 가정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어요. 그건 여러분 가정도 마찬가지겠지요. 특히 나로 인해 부모님을 잃게 된 많은 동물 가족에게 진심으로 깊은 사과를 드립니다. 저의 이 말은 믿어도 좋습니다. 저도 아내를 잃었습니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 일을 위해 우리가 다 같이 여기에 모인 것이지요. 저도 이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여러분과 함께 할 것을 맹세합니다. 다만 여러분께 부탁하고 싶은 것은, 저를 부를 때 '싸리 박사'라고 불러 달라는 것입니다. 저를 박사로 인정하지 않는 분이 몇 분 계신 것으로 압니다만 저희 여우의 지혜는 온 지구상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요. 제  요구는 그것뿐입니다. 저도 저희 조상들의 부끄럽지 않은 후손 여우로 이름을 남기고 싶습니다."


여우는 공손하게 말을 마치고는 넙죽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모두들 놀랐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놀랐습니다. 늘 잘난 체만 하는 여우 싸리가 자존심을 낮추고 용서를 구한 것에 놀랐고, 저토록 논리정연하게 자기 할 말을 잘 한다는 사실에 두 번째 놀랐고, '당신에게 내 목숨을 맡긴다'는 복종의 뜻을 나타내며 등을 보이며 절을 한 것에 세 번째로 놀랐습니다. 놀라긴 했지만 대부분 쉽게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아무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여우 가족은 뭘 먹고 사나요? 싸, 싸리 박. 사. 님."

침묵을 뚫고 들쥐 까루가 쥐꼬리만한 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싸리 박사라고 마지막 말을 할 땐 중요한 걸 잃어버린 것처럼 더듬거렸지만 박사란 말에 힘을 주었습니다. 


동물들의 눈이 여우 싸리에게 쏠렸습니다. 그건 정말 궁금하고도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싸리는 혀를 내밀어 입과 코를 슬쩍 훑었습니다.

"사실 그 동안 우리들은 아래 물가에서 개구리나 지렁이, 애벌레들을 잡아먹었지.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지만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야. 이제 적당히 적응하기도 했지만."


휘유.

몇몇 동물들 입에서 안도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습니다.


"좋아요. 앞으로도 꼭 그래 주세요. 싸아리 박사님."

앵초가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몇몇 토끼는 갑자가 바뀐 앵초 대장의 목소리에 키득거렸지만, 앵초는 정말 대장처럼 근엄하게 서 있었습니다. 싸리는 자신을 박사로 불러주는 것에 기분이 좋아져 싱글벙글 웃었습니다. 앵초는 지금이야말로 토끼풀밭 대장 이름에 걸맞는 통솔력을 보여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새끼들에게 엄마가 아닌 대장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자식들 중 누군가는 자신의 뒤를 이어 토끼풀밭을 지키는 대장이 되어야 하니까요. 여기에서 여우를 무서워하지 않고 마주 서서 이야기 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열 마디 설명보다 나은 교훈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아직까지 겁을 집어 먹은 채 여우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는 남편 얄라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작은 동물들은 여우와 같은 장소에 함께 있는 것이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지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습니다. 여우 가족을 흘끔거리며 몸을 부르르 떠는 동물도 있었습니다. 앵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일단 여기에서 앞으로 우리 동물을 이끌 지도자를 선출했으면 합니다. 저는 토끼풀밭의 대장 토끼로서 오늘 이 모임을 열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하나의 마음으로, 하나의 목표를 위하여 뛰어가야 할 때입니다. 토끼 풀밭에 둥지를 튼 모든 동물을 대표하여 이 위기를 멋지게 풀어나갈  지도자를 추천해주십시오."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였습니다. 


“우리 엄마가 대장 아니었어?”

토끼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내심 앵초가 회의를 주도하여 약한 자를 대표하여 줄 것이라 생각했던 작은 덩치의 동물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

여우 싸리가 몇 번 몸을 틀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습니다. 시간이 계속 지나갔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시원한 바람이 동물들의 등을 한번씩 만져주고 떠나갔습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만 없지. 누가 좋을까?"

부엉이 부들 박사가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습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까치 부인 끼리가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부들 박사를 추천합니다. 같은 새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지혜롭고 또 용맹스럽거든요. 이 어려움을 가장 잘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흠흠. 끼리 부인, 고마워요. 하지만 내가 추천받으려고 말을 꺼낸 게 아니니까 오해 없길 바랍니다. 제가 새들 가운데서 박사로 불리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지도자가 될 순 없어요. 하늘과 숲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지도자, 그리고 세상 경험도 풍부한 지도자여야 합니다. 저는 새를 대표하는 박사로 남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부들 박사가 점잖게 사양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올리 할아버지가 어떨까 싶은데요. 어른들 얘기로는 이 산에 엄청난 산불이 났을 때 오소리 할아버지 때문에 다들 살아났다고 했어요. 그 정도의 지혜면 지도자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얄라 아저씨가 오소리 올리 할아버지를 추천했습니다. 멧토끼 앙띠가 활짝 웃었습니다. 여우가 무서워하는 올리 할아버지라면 토끼도, 들쥐도 좋아할 게 분명합니다. 다람쥐나 청설모, 그리고 족제비, 너구리, 까치와 비둘기도 모두 대 찬성일 거구요. 


올리 할아버지는 잠시 망설였습니다. 귓속말로 딸 야리와 뭔가를 소곤거렸어요. 마침내 올리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습니다.

"쿨럭. 내가 그럴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구먼. 부족하지만 이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다면, 지난 번 산불 때처럼 이번에도 여러분과 함께 이 산을 지켜야지. 쿨럭쿨럭."


와아. 모두들 크게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습니다. 

"싸리 박사는 내가 의장 되는 게 별로 반갑지 않은가 보구먼. 기쁜 표정이 아닌 걸 보니."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나요."


여우 싸리는 얼른 표정을 바꾸고 열심히 꼬리를 흔들며 박수를 쳤습니다. 올리 할아버지는 바위 앞에 있는 박달나무, 리초와 따오가 숨바꼭질을 하던 그 박달나무 앞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숲속 마을에 모처럼 활기가 넘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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