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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부신 날 Jun 12. 2024

(숲속의 빨간신호등) 11.두 번째 동물회의

생태환경동화

리초네 마당에는 이제 바람에 서걱이는 나뭇잎과 조각난 햇살만 바위 위에 남았습니다. 리초는 엄마가 곁에 없다는 것이 사실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어디선가에 숨어서 자기와 따오를 보고 있을 것민 같았습니다. 리초는 바위 옆에 웅크리고 앉았습니다. 따스한 햇살이 리초 등을 쓰다듬었습니다.

"엄마! 엄마!"

리초가 엄마를 부르며 눈을 떴습니다. 옆에서 잠을 자던 따오도 벌떡 일어났습니다. 잠깐 졸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날이 밝아 있었습니다. 엎드린 채 잠이 들어서인지 머리가 띵했습니다. 눈자위에는 눈물 자국이 그대로 뻣뻣하게 말라 털과 엉겨 있었습니다. 리초는 기지개를 켜고는 다리에 힘을 주어 억지로 일어났습니다. 따오도 길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습니다. 

"리초야, 안에 있니?"

오소리 야리 아주머니가 불쑥 리초네 마당으로 들어왔습니다. 

"어? 야리 아주머니. 여긴 어떻게?"

"할아버지가 꼭 가보라는 구나." 

“그러고 보니 우리 모두 가족을 잃었네요."

따오가 대단한 걸 발견한 것처럼 소리쳤습니다. 

"가족을 잃지 않은 동물이 어디 있겠니?"

“야리 아주머니는 두 아들을 잃은 것이 생각나 마음이 아픈지 잠시 이마를 찡그렸습니다. 야리 아주머니가 깨진 조롱박을 내밀었습니다. 

"너희에게 먹을 만한 식사가 될지 모르겠구나."

오랫동안 써오던 그릇인지 조롱박은 군데군데 금이 가고 구멍이 뚫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싱싱한 나뭇잎과 새순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리초는 한참을 들여다보다 고개를 옆으로 돌렸습니다.

"아주머니 성의를 생각해서 먹어야지."

따오가 미안해하며 조롱박을 받았습니다.

"죄송해요. 입맛이 없어요."

리초는 음식을 가져 온 야리가 고마웠지만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억지로라도 입에 넣어 봐. 그래야 돌아가신 네 엄마도 기뻐하실 거야."

따오가 연한 새순만을 골라 리초 입에 넣어 주었습니다. 리초는 차마 뱉을 수 없어 눈물 글썽한 눈으로 받아 삼켰습니다. 

그렇게 야리와 따오, 리초가 식사를 마칠 즈음 한 가족씩 리초네 앞마당으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맨 먼저 들쥐 까루 가족이 쪼르르 바위 앞으로 달려와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다음으로 청설모 설마 가족이 다람쥐 설마 새끼들과 함께 줄을 맞춰 들어왔고, 곧 이어 족제비 타랑 가족과 너구리 뚜루 가족이 다정하게 들어왔습니다. 굴토끼 앵초 가족과 멧토끼 앙띠 가족은 깡충깡충 뜀박질로 달려 왔습니다. 그 때마다 토끼들의 긴 귀가 바람에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한꺼번에 찰랑거렸습니다. 황금빛 털이 반짝거리는 여우 싸리네는 식사를 막 마쳤는지 입술을 핥으며 들어왔습니다. 부엉이 부들 박사 가족은 아직도 졸린 듯 하품을 크게 하며 날아왔습니다. 뒤이어 오소리 할아버지가 들어왔습니다. 모두 모여 이런저런 얘기를 한참 하고 있으려니 구구와 까치 부부가 날개를 펄럭이며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구구와 까치 부부는 리초네 앞마당을 두어 바퀴 돌다 부들 가족이 앉아 있는 신갈나무 옆 가지에 얌전하게 내려앉았습니다.

"야, 구구가 돌아 왔다."

"그래, 뭐 좀 알아낸 게 있나?"

"우리가 이길 수 있겠니?"

앵초와 앙띠, 뚜루, 타랑이 서로 먼저 물어보느라 앞마당은 금세 시끄러워졌습니다. 싸리 박사가 바위 위로 풀쩍 뛰어 오르며 소리쳤습니다.

"조용, 조용! 그래야 구구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게 아냐."

싸리는 새끼들이 자기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자 더욱 으스댔습니다

“그래. 구구 선생. 좋은 소식을 알아 왔나요?” 

싸리가 유난히 큰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우리 아빠가 사실상 대장이래.” 

“그래. 아빠 가슴에 털 좀 봐. 멋지지 않니? 나도 커서 아빠를 닮을 거야.” 

싸리네 아이들은 자랑스러운 듯 아빠를 쳐다보았습니다.

"깍깍. 조용히 하세요. 우리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까지 내려갔어요."

까치 부인 끼리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동물들은 쉬, 쉬 하며 서로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괴물들이 엄청나게 많았어요. 그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 달리기만 했어요.“ 

“거 참 미련한 녀석이군. 빨리 달리면 그만큼 힘만 더 들 텐데 말야.” 

부들 박사가 나뭇가지를 흔들며 한마디 던졌습니다.

“빨리 달리면 그만큼 힘이 드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요. 놈들도 그걸 모르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분명히 무슨 계획이 있는 행동이라구요.” 

싸리가 논리정연하게 말했습니다. 모두들 싸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계획은 무슨 놈의 계획. 놈들은 그저 빨리 달리는 데 재미를 붙인 미친 놈들이라구.”

부들 박사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싸리 말을 무시했습니다. 싸리는 부들 박사가 자기 말을 인정해주지 않자 갑자기 바위에서 부들 박사가 있는 나뭇가지로 풀쩍 뛰어 올랐습니다. 깜짝 놀란 부들 박사가 급하게 날아올랐고 그 바람에 옆 가지에 앉아 있던 까치 부부와 구구까지도 푸드덕거리며 날아올라야 했습니다. 새들의 날개짓에 한동안 깃털이 날리며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습니다.

"못된 성질이 꼭 엉덩이에 뿔난 원숭이같군요. 내가 말만 하면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을 하니."

싸리가 골이 나서 투덜거렸습니다.

"그 놈의 생각이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 하니까 그렇지."

부들 박사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찼습니다. 

"그 놈의 생각이라구요? 누구한테 놈이라는 겁니까? 나도 인정받는 싸리 박사라구요.

싸리가 화가 나서 씩씩거렸습니다.

“자, 조용히하고 끼리 부인의 말을 계속 들어 봅시다. 쿨럭쿨럭. 그리고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중단시키면 둘 다 퇴장 시켜 버릴 거요.” 

올리 할아버지가 화를 내자 그제서야 조용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 낸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어요."

끼리 부인이 무리를 휘익 둘러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 표정은 뭔가 중요한 비밀 하나를 혼자만 알고 있을 때 짓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괴물들은 빨리 달리긴 하지만 반드시 멈추어 설 때가 있어요. 그 때를 이용한다면 어쩌면 우리 모두 오소리숲으로 옮겨갈 수 있을지도 몰라요."

"달리다 멈춘다고? 우리 산에서는 한번도 멈추어 선 적이 없었어. 멍청하게 움직이다간 뼈도 못 추릴 걸."

싸리 박사가 냉큼 말을 받았습니다. 부들 박사는 싸리 박사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말을 짧게 내뱉었습니다.

"얘길 좀더 들어봅시다!"

"예. 제가 얘길 하죠."

구구가 말을 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만든 길,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걸 도로라고 불렀어요. 그런데 그 도로에는 신호등이라는 것이 곳곳에 세워져 있었어요. 보통 때는 녹색인데 일정한 시간을 두고 빨간색으로 바뀌었어요. 그러면 괴물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달리기를 멈추고 신호등 앞에 딱 서 버리는 거예요."

"신호등이라고?"

"정말 달리다 멈춘단 말인가요?"

"우리 길에는 신호등이 없잖아."

“그래서 무작정 달리기만 하는군.”

구구가 말을 끝내길 기다렸다는 듯이 동물들은 또 다시 궁금한 것을 쏟아 내었습니다.

"구구구구. 조용히 좀 하세요. 아직 이야기가 안 끝났어요."

구구가 소리를 질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까치 부부가 마당을 한 바퀴 돌며 소란을 잠재워야 했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에요. 신호등 색깔이 바뀌자 괴물들은 줄을 지어 멈춰 섰어요. 사람들은 괴물들이 멈추어 서는 걸 기다렸다가 길을 건너갔구요. 우리도 빨간 색 신호등을 세운다면 길을 건널 수 있을 거예요."

구구가 말을 마치고는 마당을 한 바퀴 돌아보았습니다.

"놈들을 믿을 수 없어. 사람이 괴물에게 길을 만들어주고 괴물은 그 길로만 다니고 있어. 그러니까 사람과 괴물은 서로 도와주는 사이야. 우리들도 그런 관계로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식구들이 있잖아. 그런데 우린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 사람들처럼 신호등이니 뭐니 해서 달리기를 멈추지 않을 것은 뻔한 이치야. 만약 우리가 신호등을 만든다고 해도 괴물은 결코 달리기를 멈추지 않을 거야."

싸리 박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싸리 말에 많은 동물이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싸리는 박사처럼 논리정연하게 말을 잘 했습니다.

"우린 놈과 싸워 이기기만 하면 돼. 그러면 언제든지 길을 건너갈 수 있다구! 신호등인지 뭔지 골치 아프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 모두들 왜 그렇게 생각이 짧은 거야!"

싸리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옳소! 옳소!"

"싸웁시다."

"싸워 이기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싸리 박사의 말에 다시 너구리와 족제비들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냉정하게 생각해야 돼. 우리 숫자로 녀석과 싸우는 것은 자살이나 다름없는 짓이야."

부들 박사는 싸리를 날카롭게 쏘아 보았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소리숲에 있는 풍성한 음식입니다. 우리는 길만 건너면 됩니다. 싸운다고 해서 이길 보장도 못하는 데, 무모하게 싸울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빨간 신호등만 만들 수 있다면 건너갈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 함께 신호등을 만들어 다같이 길을 건너갑시다."

부들 박사는 굵은 나뭇가지를 꽉 잡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그 눈은 강한 자신감으로 빛났습니다.

"부들 박사님 말이 맞아요."

"우리 모두 신호등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생각해 봅시다."

부들 박사의 말에 많은 동물들이 찬성했습니다.

부들 박사와 싸리 박사 사이에 다시금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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