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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부신 날 Jun 26. 2024

(숲속의 빨간신호등) 13.리초의 모험

환경생태동화

13. 리초의 모험     


시간이 지나갔지만 빨간 등을 어떻게 만들지, 어떻게 나뭇가지에 매달지를 말하는 동물들은 없었습니다. 생각만 하는 데도 땀은 비질비질 샘물처럼 흘러나왔습니다. 초여름 햇살은 따가왔습니다. 


"맞다." 

갑자기 앵초가 빨간 눈을 크게 뜨고는 벌떡 일어섰습니다. 기다란 두 귀도 쫑긋 위로 올라갔습니다.

"산딸기를 이용하는 거야. 산딸기를 모아 둥글게 하면 빨간 신호등이 되지 않을까요?"


"멋진 생각이야. 이렇게 앉아 있지만 말고 어서 산딸기를 모아 보자구."

부들 박사가 큰 날개를 퍼덕거리며 동물들을 부추겼습니다.


"멍청하기는. 산딸기가 어딨어요. 이쪽 산에는 먹을 게 다 떨어지고 없다니까요."

싸리가 불쑥 나타나며 한 마디 툭 던졌습니다. 


"맞아. 나도 어제 산딸기를 찾아 다녔는데 하나도 찾지 못했어." 

따오도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앉아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나 혼자라도 찾으러 가야겠어요."

너구리 뚜루는 자식들을 생각하자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뚜루가 뛰어 나가자 타랑도 뒤따라 뛰어 갔습니다. 


"같이 가지 않고 뭐하고 있는 게야? 쿨럭쿨럭. 한 알이라도 모아 봐. 배고프다고 먹어 버리면 안 돼. 그리고 산딸기가 아니더라도 빨간 색 열매는 모두 찾아 와. 그럼 추울발!"

올리 할아버지가 큰 소리로 외치자 눈치를 보던 동물들이 모두 산 속으로 흩어졌습니다.      


리초는 비탈 아래 연못을 지나 새로운 길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엄마 품만 따라다니다가 혼자서 먹이를 구하러 다니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따오가 따라오나 살펴보았지만 따오는 다른 길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섭섭했지만 이제는 혼자서 다닐 만큼 충분히 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그러지 않더라도 이제는 혼자서 살아남는 법을 익혀야했습니다. 그렇지만 숲에는 먹을 만한 열매라고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쪽 터는 여우와 오소리, 너구리들이 살림을 꾸린 곳이라 이미 샅샅이 뒤진 뒤였습니다. 리초는 조금씩 더 깊이 들어갔습니다.


'돌아가야겠어. 길을 잃을지도 몰라.'

막 걸음을 돌리는 순간 리초 눈에 빨간 열매가 들어왔습니다. 리초는 잘못 보았나 싶어 눈을 껌벅거려 보았습니다. 무성한 나뭇가지에 가려 잘 보이지 않기는 했지만, 바위 위쪽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새초롬히 매달려 있는 것은 빨간 앵두가 틀림없었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것만 해도 너무 힘들었어. 길도 없는 데 바위 위로 올라가서 앵두를 따는 건 너무 위험해.' 

'그렇지만 내가 앵두를 따 가지 않으면 빨간 신호등을 만들 수 없게 될지도 몰라.'

리초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멀리 서 있는 앵두나무를 바라보았지만 그 길은 너무 험해 보였습니다. 


'리초야, 용기를 내.' 

그 때였다. 살풋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엄마!" 

'마음 먹기에 따라서 어려운 일도 쉽게 풀린단다.'


엄마 목소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살랑거리다 사라졌습니다. 리초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앵두나무쪽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바위 앞에 다다랐습니다. 바위가 너르기는 하였지만 울퉁불퉁 뾰족뾰족 솟아 있어서 중심 잡는 것이 힘들어 보였습니다.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다리를 감싸고 돌아 나갔습니다. 리초는 앞발로 바위를 두어 번 탁탁 친 뒤 바위 위로 올라섰습니다. 쭈볏쭈볏 몇 걸음 앞으로 내디뎠습니다. 입을 내밀어 보았지만 닿지 않았습니다. 다시 앞 다리에 힘을 잔뜩 주고는 조심조심 머리를 앵두나무쪽으로 뻗었습니다. 빨간 앵두가 눈 앞 가까이에 보였습니다. 


'고개를 좀더 뻗어야 해.' 다리의 떨림이 온몸 가득 밀려왔습니다. 

'조금 더. 조금 더.'


리초는 목을 억지로 뻗어 앵두 열매를 입 안에 넣었습니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습니다. 넣을 수 있을 만큼 앵두를 입안 가득 넣었습니다. 리초는 고개를 돌려 슬쩍 바위 아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겁이 덜컥 났습니다. 갑자기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습니다. 하늘이 노랗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리초야, 우리들은 내리막길에 무척 약하단다. 앞다리가 짧기 때문에 바위를 내려갈 때는 아주 조심해야 해. 미끄러지기도 하고 바위 틈에 다리가 낄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엄마가 앞마당 바위 앞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순 없어. 내 힘만 더 빠질 뿐이야.' 리초는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뒷걸음질로 내려가야겠어.' 리초는 뒷발 한쪽을 끌듯이 살짝 들었습니다. 한 걸음 내려오는데 시간이 멈추어 선 것처럼 길게 느껴집니다. 뒤를 볼 수 없어 뒷발길로 발 디딜 곳을 찾아야 했기에 행동은 더욱 느렸습니다. 

“야, 드디어 땅바닥이야.”


리초는 기뻐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악!

갑자기 긴장을 놓아서인지 다리에 힘이 쭈욱 빠지면서 쿠당탕 미끄러졌습니다. 리초는 비명을 지르며 울퉁불퉁한 바위 위에서 데구르르 한 바퀴를 굴렀습니다. 바위 모서리에 튕긴 리초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땅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입술이 터지면서 입 안에 넣어 두었던 앵두가 모두 흩어졌습니다. 리초는 땅바닥에 한참을 가만히 엎드렸습니다. 서늘한 기운이 코 속으로 들어오자 정신이 퍼뜩 들었습니다. 아직 입 안이 얼얼합니다. 앵두 하나가 경사진 풀섶을 따라 밑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입니다. 리초는 아픈 것도 잊고 터지고 짓이겨진 앵두를 찾아 엉금엉금 기었습니다. 흙이 묻어 더러웠지만 눈에 보이는 대로 다시 입 안에 넣었습니다. 흙 알갱이가 혀 신경을 콕콕 건드립니다. 터진 앵두에서는 달콤한 향이 가득 배여 나왔습니다. 리초는 앵두를 삼키지 않으려고 볼을 더욱 크게 부풀렸습니다. 흙이 목에 걸려 자꾸 기침이 나오려고 했습니다. 입 천정은 벌에 쏘인 것처럼 따끔거렸습니다. 이마가 찢어졌는지 시큰거렸습니다. 리초는 바위에 기댄 채 간신히 일어섰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뼈가 으스러지는 통증이 리초를 괴롭혔습니다. 가끔씩 정신도 흐릿해졌습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다쳤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몇 번이나 넘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엄마 젖을 빨아대던, 그 마지막 힘까지 짜내어 다시 일어섰습니다. 엄마 얼굴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습니다. 마음속으로 엄마를 불렀습니다. 리초는 온 신경을 다리에 둔 채 두 눈을 부릅떴습니다. 땀방울인지 핏방울인지 모를 액체가 몸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리초야!"

친구들이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리초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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