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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부신 날 May 01. 2024

(숲속의 빨간신호등) 5.시끌벅적 토끼풀밭

환경생태동화

5. 시끌벅적 토끼풀밭   

  

풀잎이 들썩들썩 하더니 앵초 아주머니가 쏘옥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여기저기서 토끼들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합니다. 물론 도망쳐 온 토끼들도 하나둘 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커다란 토끼 한 마리가 앵초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혹시 앵초님이 누구신가요?"

자기 이름을 부르자 앵초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세히 보니 건너편 언덕에 살던 멧토끼였습니다. 귀도 한 뼘이나 길었고 뒷다리도 튼튼해 달리기도 잘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앵초랍니다. 죄송하지만 이름이?"

앵초는 멧토끼의 이름을 몰라서 우물거렸습니다. 토끼 사회에서 이름을 부르지 않는 건 대단한 실례거든요. 그런데 상대방이 먼저 이름을 밝히지 않고 앵초를 찾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앵초는 멧토끼가 무척 예의가 없는 토끼라고 생각했습니다.


"아, 예. 저는 앙띠라고 합니다. 뒤에 있는 토끼들은 저희 가족과 친척들이지요. 무례하게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워낙 급하게 쫓기다 보니……."

"험, 그, 그거야, 어쩔 수 없었다니까……. 토끼끼리는 서로 도와야죠. 근데 어쩐 일로?"


어느새 앵초 주위로 많은 굴토끼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멧토끼를 처음 보는 아기 토끼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멧토끼들을 구석구석 훑어보았습니다. 굴토끼들이 많이 모이자 앙띠는 서둘러 입을 열었습니다.

"처음 만났는데 부탁을 드리려니 죄송하군요. 저희도 이 곳에서 함께 살 수 없을까 해서요."

"이 곳이라면……."

"예. 토끼풀밭에서요. 저희들은 저기 뒷쪽 언덕에서 굴토끼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살았지요. 그런데 여러분도 알다시피 사람들이 산을 다 파헤쳐 버렸답니다. 풀섶도, 나무도, 바위도 몽땅 사라지고 말았어요."

"살 곳도, 먹을 것도 없어졌겠군요."

"거기다가 족제비들이 갑자기 쫓아오는 바람에……."


앵초는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같은 토끼로서 이렇게 어려움에 처해진 걸 모른 체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토끼풀밭 상황도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닙니다. 새끼들이 많이 자라서 한창 먹을 때가 되었거든요. 앵초는 새끼 토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얄라 아저씨가 불쑥 끼어들었습니다.


"어서 오세요. 앙띠님. 그리고 멧토끼 여러분. 토끼풀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같은 토끼니까 서로서로 돕고 살아야죠.  아무 걱정 말고 여기서 지내세요. 뭐, 여기 풀들이 몽땅 없어지기야 하겠어요?"

좀 전까지 흥분해서 씩씩거리던 얄라 아저씨였지만, 기다란 두 귀가 개망초처럼 예쁜 앙띠를 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촐랑거리며 웃었습니다. 앵초는 얄라에게 눈을 한 번 흘기긴 했지만 이미 뜯어 버린 나뭇잎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미 뜯어 버린 나뭇잎이야, 하는 말은 토끼 사회에서 즐겨 쓰는 속담입니다. 이미 뜯어 버린 나뭇잎은 다시 나뭇가지에 붙여 자라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하거든요. 그게 맛이 없더라도 말이죠. 말을 뱉고 나서 그걸 지키지 않는 건 예의 없는 토끼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앵초는 기쁜 마음으로 멧토끼 식구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럼요. 아직은 먹을 게 조금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배를 채우시고 차차 의논해 보도록 하죠."

앵초는 두 앞발을 활짝 펼쳐서 반갑게 맞이한다는 표시를 했습니다. 앙띠도 앞발을 활짝 펼쳤습니다. 얄라도 앞발을 활짝 펼쳤습니다. 그러자 거기에 모인 모든 토끼들이 앞발을 활짝 펼쳤습니다. 어느새 토끼들은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토끼마냥 서로 즐겁게 뛰어 놀며 풀을 뜯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날 저녁, 들쥐 까루가 무려 서른 마리의 가족을 이끌고 토끼풀밭에 나타났습니다. 그 다음날에는 청설모 설마가 가족 열 셋을 데리고 토끼풀밭으로 왔고, 그 다음날에는 다람쥐 모야가 일곱 마리의 새끼와 함께 토끼풀밭으로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이 흙을 깎아 없애는 바람에 바위 밑이나 나무 구멍 또는 땅 속에 집을 짓고 살던 짐승들이 모두 도망쳐 온 것입니다.


여우 싸리는 입이 귀 밑까지 찢어졌습니다. 며칠 동안 식사를 하지 못해 거의 굶을 지경이 되었거든요. 그런데 먹을거리들이 알아서 들어왔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요. 다람쥐는 언제 먹어봤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했습니다. 그러나 싸리는 곧 경쟁자가 많아졌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너구리나 족제비도 들쥐를 좋아하거든요. 게다가 오소리까지 함께 왔으니 어쩌면 더 좋지 않은 상황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여우 싸리는 조심조심 토끼풀밭을 맴돌았습니다.     


이제 토끼풀밭은 훨씬 많은 토끼와 동물들로 와글와글 시끄러워졌습니다. 새로 온 오소리 오티와 오비는 이내 리초, 따오랑 친구가 되었습니다. 리초와 따오는 오티, 오비랑 서로 웃고 장난치며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가끔 함께 어울려 술래잡기 놀이를 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엄마 사슴 리오는 더욱 예민해져 수시로 고개를 들고는 여우 냄새를 맡았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토끼풀밭이 끝나는 수풀 쪽에 여우가 어슬렁거리고 있습니다. 언제 뛰어들지 모르기 때문에 잠시도 안심할 수가 없답니다.     

 

여긴 울창한 숲이었지

여긴 먹을 것도 많았고

여긴 공기도 상쾌했어

아, 행복한 우리 숲

아, 행복한 우리 토끼   

  

이젠 숲이 사라지고 있어

이젠 먹을 것이 없어지고 있어

이젠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하고 있어

아, 불쌍한 우리 숲

아, 불쌍한 우리 토끼     


멧토끼 앙띠가 노래를 지어 불렀습니다. 흥겨운 박자였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슬픈 노래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풀밭에 나와 있던 굴토끼, 멧토끼, 청설모, 다람쥐, 들쥐 그리고 리초와 따오는 모두 귀를 쫑긋 세우고 노래를 들었습니다.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던 동물들은 금세 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노래는 숲 전체에 빠르게 퍼져 갔습니다. 청설모 설마는 '아, 불쌍한 우리 토끼' 부분을 '아 불쌍한 우리 청설모'로 바꾸어 불렀습니다. 다람쥐 모야도 마지막 토끼 부분을 '아 불쌍한 우리 다람쥐'로 바꾸어 불렀습니다. 앙띠는 다른 동물이 그렇게 바꾸어 불러도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기분이 좋아져 아침이고 밤이고 하루종일 흥흥거렸습니다. 비탈길 아래에 둥지를 튼 족제비와 너구리 그리고 오소리도 이 노래를 들었습니다. 심지어는 여우 싸리도 이 노래를 듣고 따라 부를 지경이 되었습니다. 언제까지 이 토끼풀밭에서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지, 그건 토끼나 여우나 마찬가지로 풀기 힘든 숙제였거든요.      


사람들의 고함 소리와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점점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습니다. 쿠르르릉, 콰콰콰쾅, 지지지잉, 쿠쿠쿠쿵.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고, 먹었던 것도 체하게 만드는 못된 소리와의 거리는 점점 더 좁혀졌습니다. 리초와 따오는 도무지 낮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밤에 활동하는 족제비, 오소리, 너구리, 들쥐 들도 잠을 못 자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시끄러운 소리는 이제 저녁까지 이어졌습니다. 사람들이 밤잠도 자지 않고 일을 했거든요. 덕분에 숲은 밤이 되어도 대낮처럼 환했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전등이란 것으로 불을 밝힌 것입니다. 어둑어둑한 밤이 되어야 활동을 하는 동물들은 사람들 때문에 생활이 온통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식사를 해도 소화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온 몸이 이유 없이 쿡쿡 쑤시고 아픈 증상을 호소하는 동물들이 늘어났습니다. 유난히 깔끔을 떠는 토끼와 오소리 들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한숨을 푹푹 내쉬며 식사를 해야 했습니다. 리초는 날아오는 흙먼지 때문에 계속해서 콜록콜록 기침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토끼풀밭 바로 아래까지 와서 불을 밝히고 일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동물들은 무서워서 감히 가까이 가서 볼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가끔씩 까치나 비둘기가 와서 새로운 소식을 알려 주곤 했습니다. 토끼풀밭 아래로는 숲이 통째로 사라져버려 휑하니 비어있다고 했습니다. 나무들은 물론이고 흙도 하나 남기지 않고 다 없애 버렸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들 할 말을 잊었습니다. 동물들은 낮이건 밤이건 꼼짝 하지 않고 자기 집에 숨어 있어야 했습니다.       

다음날 밤에는 부엉이 부들 가족과 까치 부부 우리와 끼리 그리고 산비둘기 구구 아가씨까지 몽땅 토끼풀밭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새들은 나무가 없어지는 바람에 둥지까지 빼앗기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몇몇 새들은 새 둥지를 찾아 건너편 산으로 떠났지만 친구들을 생각한 부엉이와 까치 그리고 산비둘기는 토끼들이 있는 곳에 남는 걸 선택했습니다. 낮에 활동하던 모든 동물들은 이제 낮과 밤을 바꾸어야 했습니다. 낮에는 도통 돌아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 소리가 사라져야만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귀를 막은 채 억지로 눈을 붙이고 있던 동물들은 주린 배를 안고 토끼풀밭으로 우르르 몰려 나왔습니다. 하지만 토끼와 들쥐들은 마음 놓고 토끼풀밭으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새끼들의 칭얼대는 소리 때문에 새끼들은 숨겨 놓고 나가야 했습니다. 먹이를 구하는 동안 족제비가 살며시 들어와 새끼를 잡아갈 수도 있었기 때문에 아빠가 나갈 때는 엄마가 집을 지켰습니다. 행여 찍찍찍 소리라도 내면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사방에서 여우나 족제비들이 달려들었습니다. 토끼들은 살며시 냄새를 맡곤, 번개처럼 토끼풀을 향해 뛰어갔다 되돌아 왔습니다. 토끼굴 주변은 이제 풀들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가끼이에 와 있다는 토끼풀밭 끝쪽은 아직 풀이 먹을 만큼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사람이 무서워 아무도 가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멧토끼 한 마리가 사람에게 잡혀 갔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는 더욱 겁을 냈습니다. 까치가 전해준 말을 따르면 사람들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토끼를 구워서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냥 죽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불에 굽기까지 하다니. 토끼 대장 앵초는 뜨거운 불에 살갗이 태워지는 것을 생각하다 그만 눈을 질끔 감았습니다. 앵초가 아직 아기였을 때 산불이 크게 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삼촌 가족을 몽땅 잃어버렸습니다. 엄마는 늘 불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토끼와 들쥐, 청설모와 다람쥐의 행동이 조심스러워지자 이제는 너구리와 족제비, 여우가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들쥐 한 마리를 놓고 서로 싸우다가 놓친 적도 있었습니다. 숲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기억이 나질 않아

숲이 어떤 모양이었는지

나무가 얼마나 무성했는지

풀잎이 얼마나 풍성했는지  

   

이젠 친구들이 사라졌어

이젠 풀밭도 사라졌어

결국 숲도 사라지고 말 거야

결국 마음도 사라지고 말 거야

아, 불쌍한 토끼풀밭

아, 불쌍한 우리 토끼"      


멧토끼 앙띠가 새 노래를 발표했습니다. 노래는 어느새 슬픈 가락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동물들은 이번에도 마지막 부분을 바꿔 불렀습니다. 까치는 애절한 목소리로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까치 부인 끼리의 노래는 너무 슬퍼서 이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동물이 없었습니다.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리초는 흙을 파헤쳐 먹을 걸 찾아보았지만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끔씩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흙을 헤치고 올라오는 새순을 발견할 때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열매가 바람에 툭하며 떨어진 것을 발견할 때마다 너무 감격하여 조금씩 아껴먹곤 했습니다. 열매는 대부분 높은 곳에 매달려 있어서 리초는 침만 흘렸습니다. 조금 남아 있는 풀들은 온통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남아 있는 숲은 하루가 다르게 볼품 없는 황량한 산으로 변해갔습니다. 코를 찌르는 냄새는 점점 더 지독해졌고 괴상한 소리들은 머리를 쿡쿡 쑤셨습니다. 심한 먼지와 텁텁한 공기는 동물들을 점점 병들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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