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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부신 날 Jun 11. 2024

(취미가 독서) 12. 밑줄긋기, 옮겨적기-독서내공

[12화] 밑줄긋기, 옮겨적기 - 독서의 숨겨진 내공


내 중학교 학창 시절은 무협소설에 푹 빠진 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필 집에 건전한 무협소설 시리즈가 몇 질 있었다. 이건 분명히 어머니나 아버지가 무협소설을 읽었다는 뜻이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 집에서 어렵게 장만해 준 계몽사 동화 전집을 완전히 독파하고 나서 자연스럽게 집 책장에 꽂혀 있는 다른 책으로 눈길을 돌렸는데 그것이 바로 무협지 소설이었다. 나중에 만화방이나 책대여점에서 무협지를 빌려 읽으면서, 그때 우리집에 꽃혀 있던 양장본 무협소설이 얼마나 건강하고 서사적인 양질의 소설에 해당하는지 깨달았다.


나는 시험 기간이 되면 무협지를 잔뜩 빌려놓고 밤샘 벼락치기 공부를 했다. 벼락치기는 아니고, 그동안 꾸준히 공부를 해 왔지만 다음 날 시험을 위해 다시 밤을 새워 공부하는 것인데, 중학생이 밤새워 공부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래서 내가 고안해 낸 특단의 아이디어가 바로 무협지를 읽으며 시험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말이 안 되는 '무협지 읽으면서 시험공부 하기'는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 가령 이런 식이다. 국어 과목의 시험 분량이 1장에서 6장까지라고 하면, 무협지도 그에 맞게 6등분을 한다. 그렇게 표시를 해 놓고 국어 과목의 1장을 공부한다. 그러면 벌써 슬슬 졸음이 오기 시작한다. 나는 눈을 부릅뜨기 위해, 정신이 번쩍 들기 위해 무협지 1장 분량을 읽는다. 그러면 내 눈과 마음은 무협지 이야기에 번개를 맞은 듯 번쩍 떠지고 천지가 개벽하며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미치게 된다.


이때부터 정신에 대한 극도의 자기절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얼른 공부를 마쳐야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시험공부도 하고 무협지도 읽는 일거양득이 된다. 물론 자기절제를 실패하는 날에는 무협지 7, 시험공부 3의 비율로 망치는 때가 생기곤 한다. 그때 나는 무협소설을 읽으면서 소림무술과 강호무림의 8대 문파 등 무협 소설의 판타지 프레임을 거의 이해하게 되었다. 가령 "반지의 제왕"이나 "나니아 연대기" 같은 판타지의 완성된 세계, 즉 가상의 세계에 대한 움직임의 법칙을 무협소설을 읽으면서 깨우친 것이다.


갑자기 독서 얘기하다가 중학생 시절에 무협소설에 빠진 얘기를 하는 것은, 고수, 내공,이라는 단어를 여기에서 써먹기 위함이다. 가령, 우리의 독서 세계가 무림의 강호 고수들 싸움과 같은 것이라면, 우리의 독서 내공은 무엇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빨리 읽기?

책 내용 정확히 기억하기?

서평 적기?


무협 소설을 읽다보면 초식이라는 말이 있다. 칼을 빼내어 몇 초식만에 상대를 쓰러뜨리느냐, 상대를 맞아 몇 초식까지 버티면 승산이 있다, 뭐 이런 개념으로 고수의 무공을 평가하는 게 나온다.


나는 독서의 내공을 빨리 읽기나, 기억하기, 서평하기가 아니라, 필사 즉 옮겨적기를 얼마나 하느냐로 평가하고 싶다.


보통 무림 고수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큰 소리치면서 자신이 강호의 고수라고 호통치는 사람들은 고수를 만나면 대개 몇 초식도 버티지 못하고 링 밖으로 탈락하고 만다. 고수는 내공을 숨긴다. 그래서 고수는 고수만 알아본다.


독서의 내공 역시 마찬가지다. 독서의 내공은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매달 15권의 책을 읽고 일 년에 170권 가량을 읽는데, 일 년 지나 다시 그 책을 보면 이야기 줄거리가 전혀 생각나지 않는 것이 많다. 읽는 데 급급하다 보면 그런 하수 수준의 내공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책읽기는 읽는 것만큼이나 읽은 책의 내용, 책에서 주는 교훈, 책에서 주는 영감 등을 따로 옮겨 적는 것이 좋다. 그것은 차곡차곡 자신의 씨앗이 되고 나중에는 자신도 모르게 수많은 열매로 보상을 해 줄 것이다.



집에 이광수 전집이 있었는데, 나는 세로로 쓰여진 두툼한 이광수 전집 십여 권을 중학교 3년 동안 독파했다. 무정, 유정, 사랑, 사랑의 다각형 등을 읽으며 한국 근현대소설의 맛을 알았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대학입학 시험을 치고 나서는 대학에 입학하기까지 쉬는 기간에 약 100여 권의 책을 읽었다. 학교 선생님들은 수업 일수가 있어서 들어오면 그냥 영화 비디오 하나 틀어놓고 자유시간을 주었다. 나는 그때 책을 읽었다.



펄벅의 <대지>, 헤르만 헤세의 <지성과 사랑>, 스탕달의 <적과 흑> 호든의 <주홍글씨>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 가와바다 여스나리의 <설국> 브론테의 <제인에어> 서어밋 몸의 <인간의 굴레> 를 읽었다. 조지오웰의 <1984>와 <동물농장>을 읽었고, 조반니노 꽈레스끼의 <신부님 힘을 내세요> 시리즈를 읽었으며,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읽으며 신앙과 실존의 물음표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심지어는 뜻도 모르면서 파스칼의 <팡세>까지 읽었다.   



이것들이 사라지지 않고 내게 기록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책을 읽으면서 자그마한 공책에 무언가를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책이 내게 감성적인 부분을 건드린 내용에 대하여 일일이 손으로 옮겨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다만 쪽수를 적어놓지 않아서 지금 개정된 작품으로 그 부분을 찾으려고 하니 번역자도 다르고 해서 쉽지 않았다.



나는 무슨 생각으로 "연민이란 딴은 부질없는 것이다. 모든 것은 자연의 섭리다" (서어밋 몸의 '인간의 굴레' 중 필사 부분) 같은 글을 옮겨 쓴 것일까. 그러니 이런 글을 옮기고 생각하는 사내와 그런 연민 같은 단어는 라면에 밥 말아먹는 것처럼 아무 생각이 없는 고3 남학생과의 내공 수준은 하늘과 땅 차이가 될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실업(직장을 잃는 것)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깨닫고 늘 마음에 새기고 있었는데- 그것은 늘 아버지가 실직 상태였기도 했고, 그것 때문에 내 부모는 늘 싸웠다-, 그것은 서어밋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 옮겨 적은 한 문장이 나를 평생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필립이 이 곳에서 배운 것이라곤 이 곳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삶의 최대의 비극이 이별이나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직업을 잃는 것이 비극인 것이다."



물론 평생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고 해도 직업을 잃지 않는 건 아니다. 나는 무수히 직업을 잃었고 늘 다시 새로운 일을 했다. 하지만 내가 오랫동안 다녔던 특허 업계에서 완전히 퇴직하고도 새로운 전업 작가 일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은 어쩌면 여기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독서의 내공이다.



"새는 알에서 빠져 나오려고 노력한다.

그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 곁으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라크사스라고 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중에서)



'아브락사스'가 영지주의의 한 갈래로 나온 신의 이름인 것도 알지 못한 채, 새가 알에서 빠져 나오려고 하는 그 마법적인 말이 좋았다. 자신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태어날 수 없는 운명적인 운명.



연필로 밑줄을 긋고 무언가를 적어 놓고 그것을 다시 공책에 옮기고 하는 작업은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했다. 읽은 모든 책의 밑줄 그은 부분을 다시 옮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쉬운 일이 아닐 뿐더러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스티커를 잔뜩 붙여 놓는다. 최근에는 내가 소장할 것이 확실한 책인 경우에는 샤프로 밑줄도 긋고 궁금한 부분은 글로 적어놓기도 한다. 그리고 반드시 옮겨놓아야 할 중요한 글들이 많은 책은 공책에 적는 것이 아니라, 네이버 밴드 나만의 '밑줄긋기' 방에 옮겨 놓는다. 



그러면 나중에 밑줄 그은 부분만 읽어도 책에 대한 이해가 쉽고, 서평 쓰기도 훨씬 수월하다. 무엇보다 단어 검색이 가능해져서 필요한 글을 쓸 때 얼른 꺼내어 참고하기에 좋다.



책읽기, 밑줄 긋고 스티커 붙이기, 밑줄 그은 부분을 다시 옮겨 적기,  옮겨 적은 글을 참고하여 서평 적기 등 어느 것 하나 시간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고, 에너지가 소비 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계속 그렇게 하는 것은 진정 그렇게 하는 것이 나에겐 고통이 아니라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즐거워서 그 일을 할 때, 내공은 갑절로 올라간다.


내가 옮겨 적은 오래된 공책을 살피다보니 레마르크의 <개선문>에서 이런 글귀를 적어 놓은 것을 발견했다. 한 마디로 필사의 내공력을 설명해주는 글이리라.


"책이란 비록 모든 것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다른 것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곳까지 인도해주는 힘이 있었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개선문> 중에서)




독서는 힘이다.
그것도 다른 것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미지의 장소에 인도해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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