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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부신 날 Jun 04. 2024

(취미가 독서) 11. 한 놈 아니고 한 작가만 판다

전작주의

[11화. 편독의 폐해 - 한 놈 아니고 한 작가만 팝니다]



책을 취미로 읽지만 모든 장르, 모든 작가의 책을 읽을 수가 없다. 당연히 편독하는 현상이 생긴다. 어릴 때 소시지는 좋아하고 김치는 좋아하지 않던 그 편식, 김치를 먹게 되자 싱싱한 대 부분을 좋아하고 잎 부분은 싫어서 먹지 않던 편식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독서도 편독을 하게 된다. 장르도 그렇겠지만, 작가 편독도 심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애독 작가가 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팬덤을 만드는 것처럼,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자신만의 팬덤 작가가 있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 작가가 자꾸 바뀌는 것에 있긴 하지만.


이렇게 한 작가의 작품만 파는 것을 조금 유식한 <전작주의 독서>라고 한다. 한 작가의 전 작품을 다 읽겠노라고 선언하는 하나의 주의이다.



"전작주의는 한 작가의 작품을 통해 일관되게 흐르는 흐름은 물론 심지어 작가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징후적인 흐름까지 짚어 내면서 총체적인 작품세계에 대한 통시, 공시적 분석을 하는 일정한 시선을 말한다." (조희붕, 전작주의자의 꿈, 24쪽)



전작주의는 반드시 독서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술, 음악, 영화, 배우, 감독 등 누구라도 사람과 관련된 것이면 전작주의를 할 수 있다. 전작주의 감상을 하게 되면, 작가의 문체를 사랑하게 된다. 나아가 작가의 생각, 문학적 성장 과정, 아픔, 고통, 사랑을 동일하게 느끼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당신은 독서를 취미라 하면서, 한 번이라도 전작주의를 꿈꾸어 본 적이 있는가?


만약 당신이 나를 전작주의 방식으로 책을 읽어보려 한다면 어렵지 않게 성공할 수 있다. 아직 내가 펴낸 책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부로 전작주의를 선언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작가가 몇 권의 책을 냈는가를 살펴보고 결정해야 한다고 조언을 주고 싶기 때문이다.



전작주의 독서법을 수행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가령, 폴 오스터라는 작가를 어떤 책을 통해 처음 만났다고 치자. 나는 <빵굽는 타자기>를 읽으며 그를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에게 푹 빠졌다. 하지만 그는 <뉴욕3부작>이라는 작품이 대표작이며 폴 오스터,라고 하면 대부분 그 작품을 먼저 이야기 한다.



어쨌든 다른 경로로 폴 오스터를 알았는데, 그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알아보니 <뉴욕 3부작>이라는 작품이 대표작이란다. 그래서 그 작품을 구해서 읽었다. 아, 그랬더니 이 작가, 정말 대단하구나. 이 작가 한번 파봐야겠다, 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그러니까 남녀간이라면 썸타는 단계에 돌입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몇 권 더 구해 읽어보니, 이 작가라면 이제 나는 이름만 들어도 무조건 구해서 봐야 하는 작가가 된다. 본격적인 데이트가 시작되는 것이다. 아니 결혼생활이라고 보아도 좋다.



결혼생활에 돌입하면 과거를 묻지 마세요,가 아니라 과거를 더욱 더 파보리라,가 된다. 전작주의 결혼 독서는 그렇다. 그래서 독자는 작가에 대한 콩깍지가 씌워진 채고 그가 과거에 썼던 모든 작품들을 구하기 위해 헌책방을 뒤지고 다니기 시작한다. 품절된 책이 3만원에 판매되고 있어도 거금을 주고 그 책을 사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 용기를 준다.



"어떤 종류의 글이든, 글은 그  글을 쓴 사람의 의도와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그 의도는 또한 글쓴이 자신의 내면 세계와 깊은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다. 즉 누군가의 글을 진정으로 좋아하고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의 개별적인 작품만이 아니라 그 작가의 전체적인 내면 세계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위 같은 책, 27쪽)



전작주의를 결혼에 비유한 김에 계속 몇 가지 비유를 더해보자. 독서라는 취미는 전작주의를 한다고 그 사람 책만 계속 평생 보고 살 수는 없다. 독서라는 행위가 늘 새로운 책, 새로운 작가의 출현을 기대하는 소망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폴 오스터의 작품을 열심히 구하고 읽는 중에, 우리나라 작가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를 읽고는 독자는 갑자기 신경숙 작가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렇다면 폴 오스터와의 사랑은 식었는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폴 오스터는 2024년 4월30일 사망했다. 이제 그의 작품은 종결되었다. 그의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표하지 않은 유작이 나오고 유족이 출판을 원할 경우 일부 더 작품으로 나올 수도 있겠지만, 그는 사망함으로써 작품세계는 종결된다. 그럴 경우 전작주의는 충분히 도전할 그 무엇이 된다.



취미를 독서로 하는 사람으로서, 사망한 작가의 작품은 전작주의 도전에 가능케하는 대상으로 자리 잡는다. 현재 생존해 있는 분이라도 히가시노 게이고처럼 일 년에 서너 권씩 출간되는 다작가가 아니라면 책이 나올 때마다 구해 볼 수 있다.


(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라플라스의 마녀>를 읽고 그의 작품세계에 빠졌다. 전작주의를 해보려고 그가 과거에 출간한 햇병아리 작품들도 샅샅이 훑어 읽었는데, 그가 신간을 펴내는 속도가 너무 빨라 나는 전작주의를 포기했다.)



전작주의로 한 작가를 사랑하고 그의 작품을 읽을 때, 일부일처제로 사랑할 것인가, 일부다처제로 사랑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폴 오스터만이 나의 반려작가로 유일하다,고 선언하면 그렇게 해야 한다. 하지만 유일성을 내려놓고, 나는 폴 오스터를 사랑하지만, 신경숙도 사랑하고, 김훈도 사랑하고,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건 자유다.



나는 헌책방에서 <전작주의자의 꿈>이라는 책을 읽고서 독서법에 "전작주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전작주의는 해보면 안다. 얼마나 무섭고 뜨거운지. 그것은 열병 같은 것이다.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는 갱년기 증상의 땀띠다. 그 작가와 그 작가를 사랑하는 작가와 그 작가를 인용하는 작가까지 그 경계를 너머 사랑하는 무시무시한 질병이다.



나는 대학시절에 이외수를 좋아했고, 신경숙을 좋아했다. 그의 작품이라면 무엇이든 탐독했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 가면 그의 작품들이 시들시들해지기 시작한다. 너무 비슷한 유형으로 이야기가 만들어지면 그렇다. 아, 이제 이 작가는 여기까지구나, 하는 감이 온다. 그럴 때면 과감히 전작주의를 버린다.



지금 내가 반려작가로, 전작주의를 추구하는 작가는 두 사람이 있다. 둘다 얼마 전 돌아가셨다.



외국인 작가로는 예를 든 "폴 오스터" 작가다. 그의 작품들을 헌책방에서 사서 모으고 있는데 아직 다 읽지는 못했다. 얼마 전 돌아가셨는데 놀랍게도 <4 3 2 1>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현재로선 그의 마지막 작품이다. 800쪽이 넘는 책이 1권, 2권으로 나왔다. 보통 민음사 판으로 책을 냈다면 다섯 권 이상 대작으로 나왔을 것이다.



또 한 분은 우리나라의 이어령 선생님이다. 내가 작가가 아니라 선생님으로 부르는 몇 분 가운데 한 분이시다. 그가 천재적인 문학평론가로서, 작가로서 내노라 하는 글들을 써서 한국 문단을 휘저었다고 하는데. 나는 그의 노년의 책만 읽었다. 그래서 그를 전작주의로 올려놓고 책을 모으고 있는데 쉽지 않다. 이어령 선생님이 직접 쓴 책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이어령 선생님에 대하여 쓴 책도 전작주의에 포함된다.



또 다른 후보로는 박완서 선생님이 있다. 마흔에 홀연히 나타나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분. 그리고 수원에 도로명까지 가지고 있는 신세대 여성 나혜석.



그리고 마지막 한국인 후보와 외국인 후보는 여기서 밝힐 수 없다. 나만 알고 싶은 작가나 작품이 있지 않은가. 연재 중에 언젠가는 밝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전작주의.


독서가 취미라면, 제 취미는 독서랍니다. 라는 말 한 마디 뱉을 정도가 된다면, 한 작가 정도는 전작주의를 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독서가 반열에 오를 수 있다.



폴 오스터의 신작, <4 3 2 1>의 아리쏭한 제목과 두께의 묵직한 압박을 보라. 챕터 1을 읽었는데, 마치 대하소설 토지 앞부분을 읽는 듯하다. 가보자. 전작주의는 모으기도 해야 하지만, 읽기도 해야 한다. 결혼을 해보면 안다.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실천해야 하는 것. 알라뷰만 카톡으로 날려선 안 된다. 당신을 온몸으로 사랑하는 것을 책읽기로 증명해야 한다. 수집가는 전작주의자가 아니다.


오늘 이 글을 쓰고 나서, 헌책방에서 1993년도판 이어령씨의 책이 왔다.


1993년도 판인데  10쇄를 찍은 책이라니 놀랍기만 하다. 종이 질이 쉬 부서질 것처럼 낡아 읽어내기가 쉽진 않겠지만, 조심조심 그의 1980년대 생각을 내 청춘시절과 비교해 읽어봐야겠다. 들춰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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