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가라
(한강 읽기) 묵묵한 책
어디서부터 펼쳐 읽어도 될 만큼 이 책을 잘 안다.
다른 책들과 함께 태연히 책장에 꽂혀 있을 때,
이 책의 좁은 등은 비밀을 나눠 가진 사람의 옆얼굴처럼 묵묵하다.
(한강, 바람이 분다, 가라. 17쪽)
한강의 책을 다시 읽다보니, 문장 하나가 완성된 글로 다가온다.
처음 읽었을 땐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다.
그러나 밑줄이 예외없이 쳐져 있는 걸 보면 그때도 내 감정선을 흔들었던 모양이다.
어디를 펼쳐 읽어도 어떤 내용인지 단번에 알아차리는 책.
숱하게 읽어 닳고 닳아진 책.
겉으로는 태연하게 다른 책들과 함께 놓여 있지만,
사실은 나와 비밀을 나눠가진 내 형제 같은 책이 있다.
한강은 그런 책을 '이 책의 좁은 등은 비밀을 나눠 가진 사람의 옆얼굴처럼 묵묵하다.'고 표현했다.
얼마 전 다른 책을 읽다가 '묵묵'이라는 책을 알게 되어 가슴에 새기고 카트에 담아 놓은 책이 있다. 고병권 작가의 <묵묵>이라는 책인데, '침묵과 빈자리에서 배우는 기쁨'이라는 부제목이 달려 있다. 그래서 '묵묵'이라는 말에, 묵묵함이라는 단어에 일종의 신비로움, 경외감, 그 무게를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한강 작가가 그 단어를 가져와 책과 함께 병치했다.
'비밀을 나눠 가진 사람의 옆얼굴처럼 묵묵한' 것은 어떤 것일까?
그냥 '비밀을 나눠 가진 사람처럼 묵묵한' 것이 아니라.
'비밀을 나눠 가진 사람의 옆얼굴처럼 묵묵한' 것이어야 했던 이유.
'묵묵하다'는 말 없이 잠잠한 상태를 가르킨다.
묵직한 침묵의 상태.
그러나 그 묵묵함 안에는, 믿음과 신뢰가 담겨 있다.
말을 하진 않지만, 너를 알고 있다는눈빛은 형형하다.
어디를 펼쳐도 즉시 어떤 내용인지, 어떤 이야기의 한 부분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가 어쩌면 한강 작가가 생각하는 묵묵함의 신뢰 수준일지 모른다.
앞얼굴은 너무 많은 것을 드러낸다.
묵묵하지도 않다.
그래서 옆얼굴이어야 한다.
책표지 역시 사람을 혼란스럽게 할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마찬가지로 묵묵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책등이어야 한다.
다른 책들과 함께, 다른 사람과 함께
모른 척 묻혀 있으면서도
둘 만의 비밀을 간직한 상태.
그것이 바로 '묵묵'이다.
'묵묵하게 걸어갈' 때 역시 그 묵묵함 속에는
누군가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가지고 있을 때이다.
말하지 않은 비밀을 가지고 있을 때이다.
오늘도 묵묵하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갈 당신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