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가라
(한강 읽기) - 침묵의 속성
나는 침묵을 겁내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은 침묵할 수 있는 공간과 약간의 돈을 갖기 위해서다. 음악을 크게 틀어놓은 채 하루의 일을 마치고 나면 어깨를 주무르며 오디오를 끈다. 어둠과 추위 속에서 두 손을 뻗어 불빛을 쬐듯, 한 끼니의 따뜻한 밥을 먹듯, 침묵의 연하고 막막한 파장 속에 몸을 담근다. (바람이 분다, 가라, 한강, 17쪽)
나는 음악 듣기를 좋아한다. 가장 좋아하는 취미가 독서와 클래식 음악 듣기다. 그래서 내 곁에는 늘 음악이 있다. 거실에도 오디오 장비가 있고, 안방에도 있다. 지금은 사라진 mp3 플레이어도 3개나 가지고 있으며, 출퇴근 시간에 유선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다. 음악은 내가 떨어뜨려 놓을 수 없는 나만의 충전 수단이다.
집에서 음악을 들을 때면 시간에 따라 다른 장르의 음악을 듣는다. 조금 전까지는 모차르트의 혼 협주곡을 들었지만 이제 거의 밤 10시에 가까워지기에 조용하고 느린 첼로 앙상블 음악으로 바꾸었다. 이 시디 음반을 다 듣고 나면 나는 더 이상 음악을 켜 놓을 수가 없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잠을 방해하는 소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가 오면 나도 침묵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오디오를 끄면 홀연히 음악은 사라진다.
책과 노트북과 나만 남는다.
1인칭 시점의 책을 읽다보면 가끔은 책 속 주인공 '나'와 '작가'를 동일한 성정을 가진 사람으로 착각할 때가 있다. 주인공인 '나'가 생각하는 것들을, 좋아하는 것들을, 작가가 좋아하는 것으로 오해한다.
나는 한강 작가가 침묵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직접 겪여보지 않으면 표현할 수 없는 문장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받은 평 중 가장 많이 들려온 말이 '소설이 시처럼 쓰여져 있다'는 것이다. 이 문장만 봐도 그걸 알 수 있다. 그녀는 '침묵을 소설에서 '연하고 막막한 파장'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주인공인 나는 그 파장을 마치 따뜻한 불빛처럼 여기며, 따뜻한 밥 한 공기의 온기로 여기며 그 침묵 속에 몸을 맡긴다.
느리게 흐느끼듯 흐르는 첼로의 현 소리를 들으며, 따뜻한 침묵 속에 몸을 맡기는 한강 작가를 생각해본다. 한강 작가가 아니라, 주인공을 생각해야 하는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 마치 이 소설의 주인공은 한강 작가인 것만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표현을 쓸 수가 없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밤. 오디오를 끄고 따뜻한 침묵 속에 몸을 맡기는 주인공처럼 나도 '연하고 막막한' 파장 속에 나를 맡겨본다. 왜 '먹먹한'이 아니고 '막막한' 파장이었을까. 혹시 '먹먹한'을 잘못 쓴 것은 아닐까. '먹먹한 파장'과 '막막한 파장'은 느낌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온도 차이가 크다. 연한 파장은 이해가 되지만, 막막한 파장은 무엇일까. 거대한 침묵, 거대한 암흑, 그 막막함은 어쩌면 이 책에서 계속해서 나오는 거대한 우주에 대한 암시가 아닐까. 거대한 우주가 바로 우리의 삶. 인생의 전부일 수 있다는 복선. 그렇게 생각하면 '막막한'이 맞는 것 같다. 우리 인생은 늘 막막하다.
오늘 당신의 밤과 침묵은 얼마나 연하고, 얼마나 막막한가. 그 막막함이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밤이다. 오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