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바람이 분다 가라>
한줄평 : 무한 우주를 관통하는 인간의 탐욕과 사랑에 관한 거대 서사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바람이 분다, 가라> <소년이 온다>를 읽고 그의 팬이 되기로 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기 이틀 전에 브런치에 글을 올리면서, 이제 때가 된 것 같다고, 한강 작가가 상을 받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거짓말처럼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때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마치 2002년 월드컵 때 한국이 승승장구 기적을 연출하며 4강까지 올라갔을 무렵의 희열과 감동이 벅차올랐다. 그때 감동이 동적이라면 이번 감동은 정적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파동이 전신을 휘감았다.
그렇게 한강의 <바람이 분다, 가라>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소년이 온다>는 마침 모 독서모임에서 몇 개월 전에 읽었던 터라, 집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처음에는 줄거리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는데 조금씩 읽어나가자 걸음을 앞으로 내밀수록 안개가 걷히는 것처럼 조금씩 줄거리의 시야가 밝아졌다.
많은 곳에 이미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가 노벨상을 탔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읽기 시작하자,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그녀만의 세밀하고 미세한 시적 표현들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려웠다. 서사를 좇아가기에도 내 부족한 머리로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했는데, 한줄 한줄 예술 같은 문장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으니 이 또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펼쳐 읽어도 될 만큼 이 책을 잘 안다.
다른 책들과 함께 태연히 책장에 꽂혀 있을 때,
이 책의 좁은 등은 비밀을 나눠 가진 사람의 옆얼굴처럼 묵묵하다.
(한강, 바람이 분다, 가라. 17쪽)
비교적 앞쪽에 해당하는 17쪽에, 나는 한참을 머물렀다. 좁은 등, 비밀, 옆얼굴, 묵묵하다, 같은 단어들로 조합된 한 문장에서 나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저자가 엮어 놓은 찬란한 보석 같은 문장 앞에서 서사는 저 멀리 달아나고 나는 보석에 정신이 팔린 여리여리한 소녀 같은 감성의 어린애로 전락했다.
나에게 중요한 건
그리는 순간이니까.
그게 전부니까.
(한강, 바람이 분다 가라, 28)
그저 읽고 지나가도 무방한 한 문장 앞에서도 나는 벌벌 떨며 그의 숨결을 들이 마셨다. 그렇게 독서는 힘겹게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방금 읽은 부분 옆에 실린 컬러 사진을 본다. 초신성의 폭발 장면이다. 초신성이 폭발하면, 그 은하를 구성하는 10억 개의 별들의 밝기를 합한 것만큼이나 빛이 수일 동안 방출된다. 지구가 속한 은하에서 초신성이 폭발했던 1세기의 기록들은 밤마다 그 빛을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흰 점 같은 별들 위로 거대하고 둥글게 퍼져나가는 불꽃을 나는 들여다본다. 붉으면서 푸르고, 희면서 검다. 죽음이면서 시작이다. 늙은 별이 폭발한 바로 그 에너지로, 희부연 성간구름들 속에서 새 별이 태어난다.
(한강, 바람이 분다 가라, 18쪽)
우주와 별과 인간과 삶의 퍼즐은 실로 거대하고 무한하여 어디에서부터 직조를 시작했는지 알기 어려웠다. 삼촌과 주인공 정희, 그리고 그녀 (인주)의 단촐한 별들로 시작한 이야기는 점점 블랙홀로 다가가 끝내는 폭발하고 왜곡되어 비틀리고 사라지고 대체되고 다른 별로 태어났다.
죽었는데 죽지 않았고, 살았는데 살지 못했다. 죽여야 했는데 죽이지 못했고, 살려야 했는데 살리지 못했다. 우주가 무한히 팽창하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 역시 계속 팽창하고 멀어져 계속 깜깜해졌다.
밤에 하늘을 올려다보면 그 광활한 어둠에, 빠르게 팽창하며 서로에게서 멀어져가는 수십억 개의 은하들에, 그 안에서 묵묵히 회전하고 있을 수천억 개의 별들에 가슴이 떨렸다. ... 지구는 아슬아슬한 우연으로 태어난 생명체들을 가진 단 하나뿐인 별일 수도 있다. 무섭고 외롭고 벅찼다. 12킬로미터 높이의 대류권과 그 너머의 성충권, 열권을 합한대 해도 대기권의 높이는 고작 450킬로미터, 서울에서 부산 가는 거리에 불과하다. (20, 1장. 450킬로미터)
한강 작가가 무려 4년을 붙잡고 있었다는 이 소설. 그래서 여름에도 몸 여기저기가 살얼음이 박힌 느낌으로 보냈다는 저자의 마지막 글을 읽으며, 나 역시 4년 동안 이 책을 읽은 것처럼 먹먹했다. 몸 전체에 살얼음이 박힌 것처럼 얼얼했다.
제목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는 무게가 있다. 1장 450킬로미터는 지구가 가지는 우주를 향해 나아가는 마지막 대류권까지의 높이다. 2장 플랑크의 시간은 우주팽창론 중의 하나인 수축이론에 나온다. 양자역학까지 알면 더 깊이 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니.
미술에 대한 깊은 조예 역시 그렇다. 애초에 삼촌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고, 육상부를 했던 인주가 뒤늦게 미술부에 들어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나오기 때문에 미술에 대한 이야기는 필수적인데, 그 깊이와 넓이가 상당하다. 나는 삼촌이 주인공 정희에게 보여주었다는 마크 로스코의 그림이 알고 싶어 결국 <마크 로스코> 책을 사고 말았다.
처음 내 생일을 삼촌에게 말했을 때, 삼촌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두툼한 화집 한 권을 꺼내 왔다. 날카로운 책장에 손을 베이지 않기 위해 삼촌은 면장갑을 끼고 책장을 넘겼다.
마크 로스코라는 화가야.
삼촌은 말했다.
... 그러니까, 이 사람이 죽던 날을 전후에서 너는 처음 생겨났겠구나.
나는 잠자코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화면의 가운데가 분할되었고, 서로 다른 색채의 커다란 사각형 두 개가 바탕색을 향해 번지며 스며 들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색채가 번지게 하기 위해서, 붓 대신 스펀지를 쓰기도 했다고 해.
색채들의 충돌이 인간의 내부에서 스며나오는 감정처럼 느껴진다는 것에 나는 놀랐다. 시작도 끝도 없던 혼돈이 방금 갈라져 피 흘리는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 그토록 단순한 구도의 비구상 화면에서 극적으로 뿜어져 나온다는 것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45)
이렇게 미술과 천체물리학에 대한 깊은 통찰이 거대 서사와 함께 시적으로 표현된 <바람이 분다, 가라> 작품에 대해 나는 한강 작가의 작가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소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가장 한강 작가다운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모든 문장을 필사하고 싶을 정도로 시적으로 아름다운 문장이 가득한 거대한 소설. 압도하며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중에도 한강 작가만의 그 여린 숨결은 거대한 블랙홀이 되어 시공간을 멈추게 한다. 모든 걸 집어 삼킨다.
내년 초에 다시 한번 더 읽어야겠다.
그러고도 남을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