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현희 장편소설 『달을 쫓는 스파이』 88쪽
날카로운 것은 언제든지 저를 만진 자를 다치게 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릉 도굴 사건을 둘러싼 박물관 학예관들이 사랑과 야망, 그 처절한 음모와 배신”이라는 책 광고 문구에 덥석 집어 든 책이다. 지금은 그 광고 문구처럼, 처절한 배신에 힘들게 읽어가고 있다.
가슴을 훔치며 달아나는 문장도 거의 없었다. 그러다 오늘, 흙탕물 속으로 사라지려는 미꾸라지 한 마리, 겨우 꼬리를 붙잡아 들고 왔다. 미꾸라지 같은 이 문장은, 미끼 없는 낚싯바늘에 어처구니없이 걸려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오히려 다른 물고기들의 미끼가 될 처지라는 몇 분 뒤의 미래도 모른 체 말이다.
날카로운 것은 언제든지 저를 만진 자를 다치게 할 수 있다. 그것은 새의 꼬리 깃털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배신을 표현하는 데 이보다 더 정확한 글이 있을까. 그러나 배신을 표현한 문장이라고 했지만 어딘지 어설프다. 왜냐하면 배신하는 사람들은 날카로움을 표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 잘 대해주고 사랑해주고 배려해주다 뒤통수를 때린다. 그것이 배신이다. 처음부터 관계가 좋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기대가 없었고 감정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배신당했다’고 느끼지 않는다.
날카로우면서 나를 배신한 녀석으로는 “새 책” “A4 복사용지”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손으로 쓰다듬고 코로 킁킁 냄새를 맡아보지만, 새 책이 주는 그 황홀함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또 막 도착한 A4 복사용지는 어떤가. 겉포장을 뜯고 가지런히 놓인 하얀 속살을 한 손으로 드르륵 훑으며 순간 충만해지는 종이먼지들의 향연. 곧 무수한 활자가 박혀 전혀 새로운 생명을 가지게 될 무채색이 주는 복사용지의 정직함과 단아함.
그러나 방심하면, 이들에게 특별히 더 정을 주면, 그땐 반드시 왼손 검지를 스치듯 지나가면서 살을 베어낸다. 아얏 소리와 함께 선홍빛 피를 슬픔처럼 조금씩 흘린다. 내가 사랑했던 녀석이기에 고함을 지르지도, 화를 내지도 못한다. 나를 아프게 한 그 녀석을 묵묵히 바라보다 대일밴드로 선홍빛을 감추고 만다.
새의 꼬리 깃털보다 더 가벼운 종이들의 배신은 가끔 자녀들의 말 한 마디, 배우자의 말 한 마디, 친구의 말 한 마디로 치환되어 나타난다. 어떨 땐 가슴 께에 종이가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어떨 땐 말도 하지 못하게 입술을 스쳐 지나갈 때도 있다. 그럴 땐 울지도 못하고 가슴 먹먹하게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내가 사랑했던 녀석들이기에.
그렇다. 배신은 언제나 사랑과 함께 온다.
그것은 처음부터 사랑이었으며, 스쳐 지나갈 때도 사랑이지만,
내가 그어놓은 영역 안으로 들어오면서 배신이라는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러니, 내 사랑도 어떨 땐 녀석에게 스쳐 지나가는 종이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자.
사랑을 준다고 생각할 바로 그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