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라서 좋다. 179쪽
결코 길들여지지 않는 고양이를 모시고 살다
도리어 고양이에게 잘 길들여지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가 있다.
바로 개를 만날 때이다.
부모님 댁에 들렀다 개 똘이의 격한 환영을 받고 나면
집사에서 왕으로 고속 신분 상승을 경험한다.
휘파람만 불어도 내 앞에 엎드려 충성 서약을 하거나
아낌없이 뽀뽀를 퍼붓고, "안 돼"라고 말하기 무섭게 얼음이 되는 개 똘이를 보며
'나는 왜 도대체 고양이에게 뺨을 맞고 살아가는지'
그 이유가 궁금해진다.
고양이, 너란 녀석은 도대체 무엇이냐?
묘하게 사람 바보 만든다.
거참, 묘하게 자꾸 바보가 되고 싶어진다.
(너라서 좋다. 179쪽)
개와 고양이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한 단편입니다.
개는 사람을 주인으로 모시지만
고양이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사람이 길들여지고 말죠.
그러면서도, 묘하게 마지막 글귀에 웃음이 갑니다.
알면서도 바보가 되고 싶어지는 그 마음.
알다가도 모를 그 마음.
고양이 마음을 연구하려고
수도 없이 많은 고양이 책을 들여다보지만
어디 책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게 고양이던가.
나도, 냥이에게 한 대 맞아봐야
<1984>에서 보스를 결국 사랑하며 죽어가는 주인공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으려나요.
욥이 자신에게 닥친 불행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창조주의 등장으로 질문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는 그런 사태를 깨달을까요?
한 마디로 모순 덩어리 그 자체지만,
우리 삶 속에도
고양이 같은
모순 같은
사랑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어떤 마력 같은,
자석 같은 끌림.
밉지만 사랑스러운
녀석.
세상은 이율배반적인 것 투성이입니다.
함께 읽고 있는 제인에어의 사랑이 생각나는군요.
"그를 너무나 사랑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만큼,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제인에어2, 47쪽)
스무 살이나 차이나는 남자를 저렇게 사랑하는 것에 대해
미망인 페어팩스 부인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모순 투성이랍니다.
함께 읽은 논어에서 공자가 말하길,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고양이에게 뺨을 맞고도 바보가 되어지고 싶어하는
저 사람들의 심리란
모르면서 안다고 하는 것이니,
바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틀리게 아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세상은 틀리게 아는 것들이 많습니다.
내가 나를 잘 아는 것 같지만
그 역시도 틀리게 아는 것이지요.
저도 저를 잘 모르겠습니다.
이게 진짜 나였는지.
그렇다면 진짜 나는 어떤 나여야 하는지.
오늘은 고양이에서 시작하여 너무 멀리 왔네요.
오늘의 문장에서 끌어올린 교훈을(굳이 교훈이라는 이름으로) 한 줄로 요약하자면,
때론 바보처럼 살 때 더 큰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로 정리해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 하루, 바보처럼,
뺨을 맞고도, 그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