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복과 표절
오랜만에 좋은 생각이 났다.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당장 수첩에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이건 된다'라고 느꼈다. 메모한 것을 지인에게 보여주며 신이 나서 말했다. 이런 류의 이야기를 쓸 거야, 어때? 재밌을 것 같지? 그러나 곧이어 날카로운 대답이 돌아왔다. 이거 '기묘한 이야기'에 나온 건데? 나는 시무룩해졌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뒤섞여 출처를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일이 잦아졌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책을 너무 읽었고 영화를 시도 때도 없이 봤으며 지인들의 수많은 경험담을 흡수했기 때문일까? 내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내 이야기가 아님이 밝혀지는 순간은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다. 이제는 도무지 창작이란 게 의미가 없는 행위 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정녕 진실된 내 역사를 써야 한단 말인가? 그건 또 부담스러운데.
나는 아직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만의 글을 쓰는지 모르겠다. 내가 쓴 문장들이 자칫 어딘가에 이미 나와있으면 어쩌지,라는 걱정에 그냥 노트를 덮어버리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사실 이미 나올 것들은 다 나왔고 어떻게 변형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이야기가 전개된다고들 한다. 글쓰기뿐만 아니라 모든 창작 분야에서 그럴 것이다. 지구상에 수십억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는데 내 이야기가 나만의 이야기일 리가 없는 건 당연지사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우면 좋겠다고 여기니 참으로 끝이 없는 문제로다. 그래서 결론은 오늘도 허탕 쳤다는 것이고 언제 또 영감이 찾아올지 모르겠다는 고민이다. 맘속으로는 꼭 써야겠다고 정해놓은 주제가 있긴 한데······.
여러모로 경험을 적게 쌓았다는 게 후회되는 날이었다. 너무 집만 좋아했다. 좀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고, 여러 사람을 만나고, 여러 일을 겪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날이 갈수록 나는 우물 안 개구리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문화적으로 접한 간접경험은 많지만, 그야말로 간접경험일 뿐이니 작품으로 구체화하기엔 어딘가 부족하고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특별한 상상을 하지 못하나 보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아직 내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만(아마도), 이마저도 현실의 제약에 얽매이다 보니 마음껏 활용할 수가 없을 듯하다. 현실을 살며 상상을 형태로 일구어 내는 게 인생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