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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원 Aug 20. 2023

배부른 행복

보릿고개 


 재래시장에서 떠돌이 엿장수를 보니 옛날 생각이 났다. 어린 시절, 우리 동네에서는  삼시 세끼를 밥으로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농사지을 땅이 적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마저도 천둥지기나 비탈 밭이어서 식량은 늘 부족했다. 


 추수한 것으로 장리쌀 먹은 것 갚고 나면, 그해 겨울이 지나기 전에 식량은 거의 바닥이 났다. 거듭되는 보릿고개로 나에게 봄은 아름답기만 한 계절이 아니었다. 산에서 송기나 칡뿌리, 참꽃으로 주린 배를 채워야 했던 춘궁기였을 뿐이다.


엿장수 마음대로 


 그때 내가 먹어 본 것 중에서 엿보다 더 달고 맛있는 것은 없었다. 동네에 엿단쇠가 들리면 엿으로 바꿀 만한 고물이 없는 줄 알면서도 집 안팎을 괜히 뒤적거렸다. 그러다가 빈손으로 뛰어나가 다른 아이들이 엿 사 먹는 구경이라도 하려고 엿장수 지게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녔다.


  엿 맛을 보려면 헌 고무신이나 빈 병, 헌 종이, 부러진 쇠붙이 중 어느 한 가지라도 있어야만 했다. 어른들의 고무신이 빨리 닳아 구멍 나기를 기다렸지만, 댓돌 위에 고이 모셔 놓고 짚신만 신으시니 고물이 될 날은 멀어지기만 했다. 


 아버지는 내가 일부러 찢어 놓은 까만 고무신까지도 다시 촘촘하게 꿰매 주셨다. 빈 병은 술을 드시지 않아 아예 없었고, 종이도 어쩌다가 생기면 흙벽에 벽지로 바르거나 잘라서 뒷간에 매달았기 때문에 나오지 않았다. 


 엿목판에서 떼어 주는 엿의 크기야 ‘엿장수 마음대로’이지만 그래도 큰 조각을 주는 것은 쇠붙이였다. 그렇지만 드물게 나오는 깨진 솥뚜껑이나 보습은 어머니가 따로 챙겨 놓았다가 비누나 양잿물로 바꾸기 때문에 내 차지가 될 수 없었다. 


 이래저래 엿 먹을 기회가 줄어들어 술 안 드시고 솜씨 좋은 아버지와 알뜰하신 어머니가 오히려 야속스러웠다. 김구 선생님도 어릴 때 ‘엿이 먹고 싶어 아버지의 성한 숟가락을 분질러서 반은 남겨두고 반만 엿으로 사 먹었다가 꾸중 들었다.’는 이야기가 ≪백범일지≫에 나온다. 어쨌든 엿을 먹으려면 어디선가 쇠붙이를 찾아내어야만 했다.


불발탄


 우리 동네는 6·25 때 전투가 치열했던 곳이다. 내가 자랄 때까지도 산에는 참호가 곳곳에 남아 있었고, 총알 껍질이나 불발탄도 그곳에서 더러 나왔다. 그런 것을 주우면 학교 소풍 때 보물 찾기를 한 것처럼 기뻤다.


 불발탄에서 화약을 빼내려고 돌로 두드리는 등 위험한 짓도 엿을 먹기 위해서는 서슴지 않았다. 담임선생님도 조회 때마다 그런 물건은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여러 차례 당부했지만, 귀담아듣는 아이들은 없었다.

 

쇳덩이 


 국민학교 4학년 때, 여름 방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이었다. 같은 반 아이들 네댓 명이 하굣길에 가뭄으로 바닥이 드러난 큰 저수지를 가로질러가다가 한 아이가 갑작스레 신을 벗어던지고 다짜고짜 진흙 구덩이로 뛰어 들어갔다. 


 그곳에서  주전자처럼 생긴 쇳덩이를 들고 나왔다. 아이들은 일제히 “와! 엿 많이 주겠다!”라고 감탄했다. 그것을 주운 아이는 자랑스럽게 도로 가운데에 갖다 놓고 아기 머리만 한 돌을 가져와 그 쇳덩이를 내리치려고 했다. 아이들과 함께 부러워하면서 둘러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처참한 모습


 나는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서 몸을 돌려 도로 아래 논바닥으로 내려서는 순간이었다. “쾅!” 하는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회오리바람이 일면서 흙먼지가 버섯 모양으로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먼지에 휩싸여 아이들은 보이지는 않고 비명만 들렀다. 나도 겁이 덜컹 나서 어디론가를 향하여 냅다 뛰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다쳤겠다는 생각이 들어 곧 그 자리로 돌아왔다. 


 누구인지를 알 수 없는 한 아이는 피와 먼지가 뒤범벅되어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또 한 아이는 몸 한쪽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 쇳덩이가 놓았던 도로에는 큰 웅덩이가 패어 있었다. 


 근처 논밭에 있던 어른들이 달려왔다. 돌로 내리쳤던 아이는 그 자리에서 생명을 잃었다. 옆에 있었던 한 아이는 한쪽 눈을 잃고 온몸에 파편이 박혔다. 또 다른 아이도 몇 군데 파편상을 입었다. 


배고픔


 하늘나라로 먼저 간 그 아이는 집이 워낙 가난하여 학교에 도시락을 싸 오지 못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혼자 우물가를 서성이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그때도 배고프지 않고, 맛있는 다른 먹을거리가 있었다면, 고작 엿 때문에 진흙 구덩이에 들어가서 그런 것을 주워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아이의 그때 소원은 아마도 배부르게 먹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많이 다친 아이는 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 소식을 몰랐는데 근 오십 년 만에 동기회에 나타났다. 그 친구는 실내에서도 짙은 선글라스를 끝내 벗지 않았다. 그동안 장애로 인해 힘든 삶을 살아온 것 같아 "잘 지내었느냐?"라고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미국 구호물자 강냉이 죽 배급(사진 출처 : 불명확하나 2학년 때 교실(1950년대 말)과 동일한 것을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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