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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원 Sep 14. 2023

정릉댁

정이 넘쳤던 시절

(가난했지만 인정이 넘쳤던 시절, 필자가 출연했던 연극의  한 장면)


정릉


  북한산 백운대에 갔다. 옛날 생각이 나서 형제봉을 거쳐 정릉 쪽으로 내려왔다. 지금은 그곳이 개발되어 어디쯤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지만, 산 중턱 어디엔가 먼 일가뻘 되는 분이 살고 있었다. 고향 사람들은 그 집이 정릉 근처에 있다 하여 ‘정릉댁’이라고 불렀다.  


사람 사는 정 


  서울에 볼일이 생겼다. 하루 전날 올라가서 사무실 부근에서 자고 다음 날 일을 보고 올 생각이었다.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서울에 정릉댁이 있는데 여관에서 자는 게 말이 되나? 정릉댁에 가서 자고 와야 한다. 그게 다 사람 사는 정 아이가.”라고 하셨다. 


 정릉댁 형님이 지난 설날 우리 집에 오셨다가 아버지께 "서울에 오시면 꼭 저희 집에서 묵고 가십시오."라고 했던 말을 떠올린 것 같았다. 그 형님은 나와 촌수를 굳이 따지면 십촌 간이고 나이도 스무 살이나 위였다.


집 찾기


  아버지가 이웃 동네에 있는 정릉댁의 본가에서 주소가 적힌 편지 봉투를 가지고 오셨다. 그 집 주변에 우석대학교가 있으니 거기서부터 찾으면 된다고 일러주셨다. 


 그때 시골이나 형님 집에는 전화가 없었다. 찾아간다고 미리 연락하지 못하고 저녁때 서울에 도착하여 택시를 타고 그 대학교 부근으로 갔다. 그곳에는 가로등도 없었고 불빛조차 잘 보이지 않는 산비탈이었다. 


 적어 온 주소를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자꾸 산비탈 쪽으로 올라가라고만 했다. 가파른 비탈길 양옆에는 널빤지나 나무 막대기로 얼기설기해 놓고 낡은 천이나 가마니로 덮은 집들만 빼곡했다. 


 설날에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고향에 오셨던 그 형님이 살고 있을 곳이 아닐 것만 같았다. 한 시간 정도를 헤맨 끝에 산 중턱에서 그 번지를 확인했다. 한 번지에 서른 가구가 살고 있었다. 집집이 물어가면서 간신히 찾아냈다. 


저녁밥


  밤 여덟 시쯤이었지만 형님은 퇴근하지 않아 집에 없었다. 처음 본 형수님에게 내 소개를 했다. 조카뻘 되는 아이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형님 내외와 딸 다섯 그리고 막내아들 여덟 식구가 단칸방에 살고 있었다. 형수님은 밤에 불쑥 찾아간 먼 친척 시동생에게 싫은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하지 못해서 많이 시장하시겠다면서 식사부터 하라고 했다. 늦게 퇴근하는 형님을 위해 차려 두었던 밥상을 내밀었다. 나는 그때까지 저녁식사는커녕 점심조차 먹지 못해서 배고팠던 터라 체면 불고하고 그 밥을 남김없이 먹어 버렸다.


 조금 후에 집에 오신 형님은 당신의 밥을 내가 먹은 것을 눈치를 채고 밖에서 식사하고 왔다고 둘러댔다. 형님은 고된 일을 하시고도 나 때문에 그날 저녁밥을 굶게 되었다.


칼잠


  형님에게 서울에 올라온 용건을 말했더니 자기 일처럼 기뻐하셨다. 그날 밤 첫째와 둘째 딸을 이웃집에 잠자러 보내고 그 자리에 내가 끼어 일곱 명이 엇누워서 칼잠을 잤다. 


 아침에 눈을 떠 보니 형님은 벌써 일하러 나가셨고 형수님이 물 한 동이를 이고 비탈길을 힘들게 올라오고 있었다. 그 물로 아침밥도 짓고 세숫물까지 떠 주었다. 가마니로 둘러쳐진 공동변소에 갔더니 이미 열 명이나 줄을 서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한 후 떠나올 때 형수님이 “처음 왔는데 대접도 못 해서 미안해요. 형님이 나가시면서 하루 더 있다가 가라고 했어요.”라고 했다. 


 그날 일을 보고 집으로 내려왔다. 고향 사람들에게는 그 형님이 서울에서 어렵게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가끔 그날 내가 먹은 형님의 저녁밥과 단칸방에 일곱 명이 같이 잔 칼잠 속에서 느껴졌던 따뜻했던 정이 생각났다.  


쌀독


 “쌀독에서 인심 난다.”는 속담이 있다. 그때 형님 집의 쌀독은 비어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빈 쌀독에는 아마도 사람 사는 정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을 것이다. 그땐 비록 가난했지만 사람 사는 정만큼은 지금보다 훨씬 깊었다.  지지리도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그때의 사람 사는 정이 이따금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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