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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원 Jul 13. 2023

비움과 채움

책 버리기

 

이사


 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하려니 무엇을 버릴지가 고민이었다. 먼저 해 본 사람들이 한입으로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은 이때 과감하게 버리라고 조언했다. 


책 정리


 책 정리부터 시작했다. 책장이 모자라서 그동안 방 한쪽 구석에 쌓아놓았던 책이 많았다. 새로 장만한 책장을 이사할 집에 미리 갖다 두었다. 그중 반은  처음부터 비위 놓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 읽을 책을 위해서다. 가진 책 열 권 중 여덟 권 정도는 버려야 한다. 


 문 밖으로 버릴 책을 꺼냈다가 도로 넣기를 거듭했다. 영 진척이 없었다. 근래 읽어 본 적도 없으면서 머지않아 읽을 일이 있을 것만 같아서였다. 


 방법을 바꾸어 올해 말까지 꼭 읽을 책만 남겨두고 몽땅 문 밖에 꺼내 놓았다. 요즈음 호기심으로 하고 있는 글쓰기, 캘리그래피, 사진 촬영, 해외 오지 여행 등에 관한 책만 골라냈다. 책장 여섯 짝 중 한 짝만 겨우 채울 정도였다. 

  

오래된 책


 다시 문 밖에서 책을 골랐다. 우선 반세기 전, 두메산골에서 호롱불 심지 돋우면서 밤새워 읽었던 오래된 책들이다. 독학하면서 이해가 될 때까지 수십 번이나 보아 겉장이 대부분 너덜너덜했다. 종이 질도 형편없어 부스러기도 많이 떨어졌다. 몇 번이나 버리려고 했다가 이사 때까지 미루어 왔다. 


 또다시 읽을 일은 없겠지만, 나를 지게 밑에서 벗어나게 해 준 은인이고, 배고팠던 시기를 견디어 낸 증표 같아서 분신처럼 버리기 아까웠다. 그 시기에 감명 깊게 읽은 몇 권의 처세서도 마찬가지였다. 


족보와 고서


 다음은 족보와 목판본 고서, 증조할아버지께서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필사하신 경전과 시문에 관한 서책들이다. 한문을 공부해서 읽어 보려고 두어 번 시도는 했지만, 내 게으름과 둔함 때문에 그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자손으로서 부끄럽지만, 또 공부하겠다고 하면 빈말을 보탤 것 같아 계획조차 없다. 유품으로 고이 간직하다가 활용할 분을 찾아서 드리는 것이 그나마 조상에게 덜 송구스러울 것으로 생각했다. 



내 책과 받은 책


  그리고 나 혼자 또는 다른 사람과 함께 쓴 책들이다. 저자로서 또는 공동 집필자로서 모자람이 많아 부끄럽지만, 지울 수 없는 나의 흔적이고 개인사의 한 조각으로 여겼다. 


 또 다른 저자가 정성스럽게 서명해 보내 준 책도 마찬가지였다. 그분 성의를 생각할 때 바로 버리면 예의가 아닐 것이다. 지인에게 서명해서 드린 내 책이 비록 졸저이지만, 바로 버려졌을 때를 역지사지해 봤다. 그 밖에 내 나름대로 보존 가치가 있다고 여겨온 희귀본 몇 권도 버리기가 아까웠다. 


버릴 책


  책 고르기를 대충 마무리하였다. 선택받지 못하여 문 밖에 쌓인 책들이 자꾸 눈에 밟혔다. 그 후에도 문지방 넘나들기를 몇 차례 더 했다. 한때는 그토록 다정하게 눈길을 주다가 이제 와서 헌신짝 다루듯 하려니 이 또한 배신이 아니겠는가. 


 그동안 손때 묻은 정을 생각할 때 마음 편히 버릴 책은 거의 없었다. 책들도 저마다 인연을 내세우면서 버리지 말라고 하소연하는 듯했다. 


내 처지


 세상 만물이 때가 되면 새것에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이 자연의 섭리인데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으랴. 정을 떼려고 애써 눈길을 돌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반을 비울 수가 없었다. 버려질 책에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나 또한 그렇다. 한때 배역으로 차지했던 자리를 이미 다른 사람에게 비워 주지 않았던가. 언젠가는 지금 이 공간마저 또 비워야 하는 내 처지가 문 밖에 쌓인 책과 무엇이 그리 다를까 싶었다.


여백


  보관할 책만 이사할 집으로 먼저 옮겼다. 책장마다 반씩 비우니 시원스러운 여백이 생겼다. 꽉 찬 답답함에서 벗어나 속이 다 후련했다. 반백 년 전, 풋내기 농사꾼 시절, 가을걷이를 막 끝낸 텅 빈 들녘을 바라보면서 느꼈던 여유와 쉼표같이 편안한 풍경이 떠올랐다. 남겨놓은 공간에 어떤 책으로 채울지 상상만 해도 좋은 벗이라도 만날 것처럼 마음이 설렌다. 


비움과 채움


  책 정리를 끝내고 주변 공원에 산책했다. 오랜만에 보는 상현달이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반갑게 인사했다. 달은 늘 비움과 채움을 거듭하지만, 결코 게으르거나 서두르지 않는다. 비워 둔 책장이 언제 채워질지는 기약이 없다. 채우려고 비워 놓기는 했지만, 서둘러 채울 생각은 더구나 없다. 


 여태껏 채우지 못해 안달했던 삶에서 탈피하여 이제부터라도 여백을 두고 쉼표를 찍어 가면서 비움과 채움을 즐기면서 살고 싶다. 책장 빈 곳에는 함께 할 좋은 친구를 사귀듯이 한 권씩 한 권씩 채워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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