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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원 Aug 30. 2023

지각

꼴찌 장학생

입학시험   


 이월 초 어느 날이었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보려고 시외버스정류소로 갔다. 같이 버스를 타고 갈 아이들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한 시간쯤 지나서 오는 차를 타고 읍내 중학교에 도착했다. 그곳 운동장에도 아이들은 없었다. 그제야 늦은 줄 알고 허겁지겁 교실로 뛰어갔다. 그때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나는 중학교에 꼭 가고 싶었지만, 우리 집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시험을 보러 간 것은 출신학교의 입시 합격률을 높이기 위해서다. 그러니 시험에 대한 긴장이나 부모님의 관심 따위는 아예 없었다. 당시에도 입시제도는 매년 바뀌었다. 그 해만 수험생 부담을 덜어 준다고 국어·산수 두 과목만 시험을 보았다.


 첫 시간 국어 시험을 치르지 못했기 때문에 나머지 산수 시험은 보나 마나였다. 비록 다닐 수 없는 학교였지만 입시에는 어떤 문제가 나오는지 궁금해서 산수 시험은 보고 집으로 왔다.


 “오늘 지각해서 시험을 반밖에 못 보았습니다."라고 부모님에게 말씀드렸는데도 미리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무덤덤하셨다.                               


보결생   


  삼월 초 입학식이 있기 사흘 전 해거름이었다. 6학년 담임 선생님이 집으로 오셔서 중학교에 보결생으로 입학할 수 있다고 알려 주셨다. 지각만 안 했으면 전교 일 이등으로 합격했을 거라면서 몹시 안타까워했다. 아버지는 좋아하시기는커녕 당황해하시면서 어머니와 함께 나를 피하듯 부엌으로 들어가서 문을 걸어 닫았다. 

 

  어머니는 "시험에 떨어지라고 일부러 지각하게 했는데..." 하면서 울먹였다. 두 분이 난감해하는 말씀과 긴 한숨 소리가 밖에서도 들렸다.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마음이 울적할 때마다 찾았던 선바위로 달려갔다. 어머니가 자식 잘 되게 해 달라고 해마다 영등 날 치성드리는 곳이다. 바위에 걸터앉아 돌틈을 비집고 여기저기 부딪히면서도 끊임없이 흘러가는 계곡물을 한 동안 내려다보았다.


 본디 중학교에 갈 수 없는 처지였는데 그깟 보결생이 되고 말고 가 무슨 대수인가 싶었다. 새삼스레 마음 아파할 일도 아닌데 뛰쳐나온 것이 겸연쩍었다. 날이 어둑어둑한 무렵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슬그머니 집으로 들어갔다.  

                  

입학 

         

  어머니가 문 밖에서 기다리고 계시다가 껴안아 주셨다. “그래 학교 보내 줄게!”라고 말씀하셨다. 으레 나를 잠시나마 달래려고 그런 줄 알고 반응도 안 했다. 


 부모님은 어차피 보내지 못할 학교이니 시험에 떨어져서 못 가는 편이 차라리 아들 마음이 덜 상할 걸로 여겼던 모양이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입학할 수 있다고 하니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 


 뻔한 집안 형편이지만, 너무나 애달퍼서 생각을 바꾸었을 것이다. 학교에 보내려면 온 가족이 더 굶주릴 수밖에 없었다. 많은 고초를 감내하시면서 학교에 보내기로 했다는 것을 그때는 잘 몰랐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멀건 나물죽으로 저녁을  때우고, 두 분은 집을 나섰다. 입학금 마련을 위해 이웃집에 돈을 꾸러 가시거나 농사철에 일해 주기로 하고 품삯을 미리 좀 달라고 사정하러 갔을 것이다. 


 다음 날 어머니는 읍내 가게에서 외상으로 교복과 모자, 책가방을 사 왔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간절했던 꿈이 이루어졌는데도 마냥 기뻐할 수만 없었다. 나도 우리 집 형편에 내 학비를 마련하기가 어려운 줄은 알고 있었다. 입학은 하겠지만, 졸업까지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꼴찌 장학생   

       

 그해 전교 꼴찌로 입학했지만, 산수 시험 성적이 우수했고, 지각한 사연까지 학교에 알려져 공납금 전액을 면제받는 장학생이 되었다. 아마도 개교 이래 꼴찌로 입학해서 바로 장학생이 된 경우는 내가 처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무엇보다도 부모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 드린 것이 기뻤다.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가 10km 정도여서 매일 왕복 네 시간을 걸어 다녔다. 2km 정도만 걸어가면 시외버스가 있었지만, 날마다 교통비 오 원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새벽닭 우는 소리에 일어나서 한 줌 남은 보리쌀로 내 아침밥과 도시락을 싸고 나면, 다른 식구 밥그릇에서 낟알 기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으로 삼 년간 지각 한 번 안 하고 졸업을 했다.   


부모님에게 감사


 그날 지각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중학교나마 다닐 수 있었을까. 남들에게는 하찮은 중졸이지만, 나에게는 대졸 보다도 더 자랑스럽고 소중한 최종 학력이다. 살아오면서 고비마다 학력미달 콤플렉스(complex)가 적지는 않았지만, 특별히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내가 맡았던 업무는 대졸자보다도 더 잘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부모님 살아 계실 때, 그 은혜에 보답은 못했지만, 중학교에 보내주신 부모님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은 변함없다.  

       (서울신문 2005.3.8 29면)

* 1968년도 이전까지는  중학교도 입학시험을 치렀고, 1969년부터  무시험 추첨제로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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