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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ke green Jul 02. 2021

안아주세요 나 먼저

우리들의 특별한 저녁 인사


 모가 가지런히 심어진 계절이다. 간격이 일정한 초록 모들 사이로 빼꼼 개구리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고향을 떠나 산지 오래된 지금, 어린날 흔히 보던 풍경이 마음의 불안을 달래주기도 한다. 내 지금이 자신 없을 때 옛 집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여름날 공기가 가져오는 마법일까?? 허리가 굽어 유모차에 기대 걷는 신촌 할매가 정정했던 그때로 돌아가는 모습을 본 것만 같다. 담벼락이 내 키보다 한참은 높던 그때에는 쪽진 머리를 한 키가 크고 이마에 흉터가 있는 우리 할매도, 물신을 신고 입을 앙 다문 채 바삐 움직이는 부모님도 있다.


 어릴 때 집엔 이앙기(모 심는 기계)가 있었다. 농번기에 접어들면 부모님은 이 동네 저 동네 이앙기를 옮겨 다른 집 모까지 심느라 바빴고 해가 지기 전에는 어지간해선 부모님을 보기 힘들었다. 부모님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할매와 시간을 주로 보냈다. 덕분에 어릴 때부터 나는 할매의 입맛을 꼭 닮았다.


 우리 집은 서로 마주 본 아랫채와 윗채로 이루어져 있었다.(두 채의 집이라고 부잣집이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쪽진 머리를 한 할매가 계신 윗채는 아궁이 불을 지펴야 데워지는 3개의 방과 나무마루를 가진 옛스런 한옥이었고 아랫채는 몇 번의 과도기(연탄-> 보일러, 곤로-> 가스레인지)를 거친 당시 최신식 가옥이다.


저녁의 풍경

 해거름이 되어 어스름 하늘이 뒷산을 감싸면 지는 해에 긴 그림자들은 윗채의 춧담을 지나 마루를 타고 올라온다. 그날의 마지막 붉은빛이 할매의 손등을 비추고는 슬며시 사라진다. 새벽에 나갔다 그제야 집에 도착한 엄마는 몸에 묻은 흙먼지를 털기 무섭게 아랫채에서 가족들을 위한 저녁을 짓고, 아빠는 윗채의 부엌에서 소여물을 삶는다. 차곡차곡 쌓인 짚을 꺼내 총총 작두로 썰고 풀이며 이것저것을 가마솥에 집어넣는다. 소들을 위한 채식 스프~ 구수하게 익어가는 여물은 심지어 냄새도 좋았다. 부엌문 앞에 서서 흥얼흥얼 부르는 아빠의 노래가 그 냄새와 합쳐진다. 하루 일을 끝낸 여유를 품어버린 그 냄새가 어찌 좋지 않을 수 있을까.


특별하고 행복한 저녁 인사

 가마솥의 여물을 팥죽색 바가지로 휘휘 저어 두고 부엌을 나온 아빠가 춧담 밖에 서면 언니와 나는 마루 끝에 선착순으로 줄을 선다. 발을 꼼지락 꼼지락대며 시동을 건 후 폴짝~ 한 발치나 떨어진 거리의 아빠를 향해 뛰어내리면 아빠는 낙하하는 우리를 받아 올렸다.

“이번엔 나!!”

“다음은 나! 나!!!”

폴짝, 폴짝~

그렇게 우리는 돌아가며 뛰어 안기기를 계속했다. 이건 하루 내 기다려온 아빠와 우리 사이의 특별한 저녁 인사다.

종일 논일을 하고 돌아온 아빠의 옷에서는 진흙 냄새와 땀냄새가 섞여났다. 말라버린 진흙이 가루가 되어 목구멍이 탁해지는 먼지 냄새도 함께다. 뜀뛰기의 유희와 함께 퍼져 나오는 아빠 냄새. 흙먼지 뒤섞인 아빠의 체취가 나는 너무 좋았다.


 그 특별한 포옹은 적게는 두세 번, 운이 좋으면 대여섯 번 정도 계속되었다. 아빠가 그만하자고 할 때까지 우리는 한 번이라도 더 안기고 싶어 내려주기 무섭게 다시 줄을 섰다.

“그만해라!!!”

너무 보채면 엄마의 불호령이 떨어지기도 했다.


 삶아지던 소여물이 다 익고 우리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여물통을 채우는 아빠 뒤를 졸졸 쫓았다. 그즈음이면 우리의 저녁도 차려진다.

“어무이 밥 잡수이소~당신도, 느그도 빨리 오이라!!”

엄마의 호출이 있으면 우리는 마루에 차려진 밥상 주변으로 자리를 잡고 앉는다.

‘딸깍’

처마 안쪽에 달린 백열등에 불이 켜지면 나방이며 날파리, 청록색과 보라색으로 반짝거리는 풍뎅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켜진 등을 향해 달려든다. 타닥타닥 부딪히는 딱딱한 날개 소리. 그러다 밥상으로 뛰어들기도 하는 풍뎅이는 꼭 소란스러운 난봉꾼 같다. 밥을 빨리 먹고 혹시 한번 더 뛰어 안기기를 해도 되냐고, 언니보다 한번 덜 안긴 것 같다고 채근하면 아빠는 내일 먼저 안아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내일은 내가 먼저야. 낼은 꼭 나 먼저, 더 많이 안아주세요~’



 여름밤, 논에선 개구리들이 한창 노래를 부르고 있다. 창을 통해 들리는 소리도 꽤나 커서 가끔은 티비소리를 덮기도 한다. 차가 지나가면 잠시 소리를 죽였다 다시 페이드인 되는 개구리의 노래와 논물에 투영되어 반짝이는 가로등 불빛은 이 계절, 이 동네의 흔한 풍경이다. 작년부터 홀로 맞는 이 밤 풍경과 개구리 소리가 엄마는 서글프다고 했지만 오늘 어린 날의 기억을 소환해온 개구리 소리를 나는 밤새 들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주 작아진 내가 내일 저녁에 아빠에게 안기는 상상을 하며...


빼꼼 청개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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