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서툰 애정 표현법.
몇 년이나 병원을 오가도 부모님은 길게 우리 집에 머무는 경우가 없었다. 검사를 받으러 와서 결과를 듣고 돌아가는 1박 2일이 몇 년간의 루틴이었다.
2019년 6월.
5월 입원 후 일주일을 병원에서 지낸 아빠는 남은 방사선 치료를 위해 우리 집에서 한 달여를 머물러야 했다. 급히 병원에 올라오느라 밀린 일들로 다시 집에 내려가야 했던 엄마는 [찮은이]인 나라도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 말했다. 물론 매일매일 우리의 안부를(어쩌면 부족한 나에 대한 감시를) 잊지 않으셨다.
아빠와 나의 시간은 때로는 어색하고, 때로는 평화롭고, 또 때로는 불안했다. 보호자를 자청한 나는 모든 것이 어설펐고, 여전히 아빠는 딸에게 강하고 든든한 모습만을 보이고 싶었다. 불안함과 분노 혹은 절망감… 그 한 달 동안 아빠에게 편안했던 시간은 얼마나 되었을까? 불편한 현실과 불편한 장소에서 아빠는 편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꽤나 살가운 딸이었다. 가끔은 마주 손뼉을 세 번치는 우리만의 인사법을 엄마가 웃으며 질투(?) 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선 무슨 말을 건네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아빠의 기분을 환기시킬 수 있는 그 어떤 것들이라도 필요했다.
산책
운전을 못해 기동성이 없던 나는 아빠에게 그럴싸한 외출을 제안하지 못했다. 답답함을 못 견디는 아빠는 그래서 가까운 공원과 놀이터로 매일 산책을 나갔고 나는 그 산책에 자주 동행했다. 하루는 늦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이미 아빠는 침실과 거실까지 청소기를 돌려놓고 산책에 나섰다. 나는 부랴부랴 아빠를 찾아 뛰어나갔다. 다행히 그가 갈만한 근처 공원은 몇 되지 않았다. 걷는 모습을 보고 단박에 그를 찾았다.
걸음은 체력보다 습관에 가까운 모양이다. 체력이 많이 약해졌어도 등이 곧고 팔을 앞뒤로 흔들며 걷는 아빠의 걸음걸이에서 힘이 느껴진다. 걷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약속이 없는 평일의 산책이란 피곤한 노동에 가까웠다. 하지만 아빠와 함께한 그 한 달간의 산책 덕분에 가장 아름다운 초록의 변화를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책
산책만으로는 긴 하루를 다 보낼 수 없다. 스마트폰을 쓰지 않아 인터넷도 하지 않는 아빠는 그렇다고 티비에 빠져 들지도 않았다. 평소에도 책 읽기를 좋아하는 그가 책장을 둘러보았다. 생텍쥐베리의 야간비행, 시드니 셀던… 아빠의 취향은 서양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아사다 지로를 포함한 일본 작가와 신경숙, 은희경을 필두로 한 한국 여류작가의 책들로 가득한 나의 책장은 지극히 동양적이다. 꿈을 꾸는듯한 바나나도, 시니컬한 하루키도 저돌적인 가즈키도… 어쩐지 아빠에게 권하기가 어렵다.
내 추천을 기다리지 않고 아빠가 처음 고른 책은 요시다 슈이치의 악인이었다. 어쩌면 제목이 맘에 들었던 것 같다. 나는 초반부에 살인범이 누구인지 스포를 날려버렸다. 흥미가 떨어진 아빠는 책을 덮고 다나베 세이코의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을 꺼내 읽으셨다. 아빠의 취향이 일본 소설 쪽과는 전혀 다를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그 소설을 완독 하셨다. 그 이후 그 두 책은 볼 때마다 아빠를 떠올리게 할 책이 되어버렸다.
음식
매일 엄마처럼 맛있는 요리를 할 수 없다. 자신 없는 요리를 하는 대신 주변 음식점의 국을 사다 날랐고 쿠팡으로 두부봉을 비롯해 단백질을 보충할만한 간편식을 주문했다. 내 성의를 생각해 밥을 남기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방사선 치료 후유증은 꽤나 심해서 매 식사가 아빠에겐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힘겹게 한술 한술 뜨는 모습에 건강한 식도락가였던 아빠가 겹쳐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다.
남기지 않으려 국에 만 밥을 입으로 밀어 넣던 아빠가 그 자리에서 음식을 다 게워낸 적이 있다. 당황한 아빠는 토사물을 급히 손으로 쓸어 담았다. 절대 나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모습일 텐데…
“아이고… 다 먹어볼랬는데 이리 바닥이 더러워짔다. 이걸 우짜노 … 미안하다이~”
“아빠, 내가 치우면 되지~ 더러운 거 아이고 그냥 아픈 거잖아~ 방사선 치료하면 다 그렇대. 괜찮아 괜찮으니까 들어가 있으이소”
나는 아빠가 나를 좀 더 의지했으면 했다. 우리 집에서 눈치 보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하지만 그나마의 그 눈치가 아빠의 남은 자존심이라는 사실을 안다.
이후 병원을 통해 처방받은 항구토제와 식욕촉진제가 이 문제는 조금 해결해주었다. 아빠가 음식을 그나마라도 먹게 되자 나는 점점 쿠팡 단골이 되었고, 추어탕과 곰탕 등 동네 맛집을 자연스럽게 섭렵하게 되었다.
며칠이 지나면서 우리들은 어색함에서 벗어났다. 아빠가 평소와 같이 농담을 받아주지 않았거나 노래를 부르지 않았거나 또는 평정을 연기해주지 않았더라면 함께한 시간들을 “다행”이라 여길 수 없었을 것이다.
가까이 공원이 많아서, 또 스포를 날릴 수 있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이 접점은 생각하지 못했었지만) 책들이 책장에 가득 있어서, 국을 사 올 수 있는 음식점이 많아서.. 다행이었다.
접근금지구역
그렇게 한 달여를 우리 집에 머무르면서도 아빠는 컴퓨터가 있는 내 작업실에 한 번도 들어온 적이 없었다. 방사선 치료가 끝나 다시 집으로 내려가기로 한 날. 한 번도 들어가지 않던 작업실 문 앞을 서성이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빠는 어색하게 내 눈을 피했다. 왜??
며칠 뒤 아빠가 그 앞을 서성인 이유를 뒤늦게 발견했다. 키보드 아래에 숨겨져 있던 5만 원권 두장... 그동안 고생했다며 이미 엄마가 내게 돈을 30만 원이나 쥐어주고 간 뒤였다.
나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이게 뭐야~~ 나 지금 발견했네??”
“어어. 나중에 얘기하자 뚝~”
내 감사를 다 듣기도 전에 함께 있던 엄마에게 들킬까, 어쩌면 쑥스러워 전화를 황급히 끊는 아빠 모습이 그대로 상상됐다. 며칠 전 어색하게 내 눈을 피하던 모습도...
뭐라도 조금 더 표현하고 싶지만... 아빠는 다정한 말이 서툴다. (보물 찾기처럼 숨겨진 용돈을 나는 그 후에도 몇 번이나 찾았다. 때로는 베개 아래에 있기도 했고 화장대 위에 올려져 있기도 했다.)
조금은 간지럽고 사랑스러운 아빠만의 표현법에 나는 웃음과 눈물이 함께 났다.
아빠 고마워요... 근데 버릇되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거봐. 나 지금도 그 보물 찾기가 그립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