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아빠의 의지들에게
브로콜리 꽃다발
비 오는 토요일 아침. 습기 머금은 무거운 공기가 눈두덩이와 어깨에 들러붙은 모양이다. 한 시간째 나는 잠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위례에서 부동산 투어를 하겠다는 친구들과의 만남에 호기롭게 합류하기로 했던 어제의 나는 어디로 간 거지?? 알람이 울릴 때마다 10분, 또 10분 기상 시간을 미뤘다. 비 때문이 아니라도 이틀째 4시간도 못 잔 상태다. 적어도 30분 뒤에는 일어나야 씻고 약속시간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아… 도저히 못 일어나…’
10시가 넘어서야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피로를 인정했다.
‘그래, 애초부터 집에는 관심 없었잖아. 애들 얼굴이나 보자는 건데 이건 무리야… 저녁에 가자..’
친구들의 양해를 얻어 내내 나를 불안하게 만들던 알람을 끄고 본격적인 낮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잠에서 제대로 깬 적이 없으니 낮잠이라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다만...)
그 꿈에서 오랜만에 아빠를 만났다.
집 앞으로 흐르는 작은 농수로 주변으로는 풀과 들꽃들이 예쁘게 피어 있고 아빠는 집 앞 논에서 트랙터를 몰고 있었다. *실제로 어릴 때 우리 집 앞의 풍경과 똑같다. 낮에 꾸는 내 꿈은 평소에도 밤보다 더 현실 같고 디테일한 편이다. 점심 때가 되어 집으로 들어가던 아빠는 그 꽃밭에서 작은 꽃 몇 개를 꺾어 꽃다발을 만들었다. 노랑과 연두로 이루어진 손바닥에 숨길 수 있을 만큼 작은 그 꽃다발을 부엌에 있던 엄마에게 전했고 그걸 본 나는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고는 무슨 대화가 오갔지? 부끄러워진 엄마가 ‘밥 묵자’라고 했나?
셋이 밥을 먹다 말고 내가 물었다.
“엄마 꽃은? 사진 찍을랬는데 제대로 못 찍어서~”
“부엌에 나뚯다”
아빠와 엄마의 낭만을 찍고 싶었던 나는 꽃다발을 가지러 부엌으로 갔는데 노랑 연두 작은 꽃다발은 어느새 두 주먹보다 큰 브로콜리로 변해있었다. 브로콜리라니…
2018년 여름의 꽃
횡단보도 건너편 터미널 광장에 있는 키다리 조형물 아래. 나를 기다리는 엄마, 아빠가 보인다. 커져버린 암세포 때문에 약을 바꾸고 결과를 보러 오는 날이었다. 약의 부작용이었었나?? 아빠의 머리카락과 눈썹은 겨울을 지나온 잔디 같았다. (머리는 곧 다시 자라났지만 이후 아빠는 내내 고수하던 머리스타일을 스포츠 헤어로 바꿨다.)
벨라시타의 한 샤브샤브 뷔페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오던 중 꽃가게들을 지나왔다. 꽃이 이쁘다며 시선을 빼앗긴 엄마를 보며 아빠가 내게 물었다.
“저런 꽃은 한 다발에 얼마나 하노??”
“왜 엄마 사주게??? 한 다발에 한 3~4만 원 할걸~”
“아이고 내 사줄라꼬?? 고맙구로~”
“장미로 사주까~~ 아이모 국화나 뭘로 사주꼬?? 가자!!! 내 한 다발 사주께!!”
“아 댔다 마~ 집에 가모 천지로 널린 게 꽃이요! 아프지나 마라~”
엄마는 꽃을 많이 좋아한다. 하지만 그건 보고 가꾸는 것에 한해서지 사는 것은 별개다.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지 않게 된 지 오래여도 시골에서 평생을 살아온 엄마에게 꽃을 사느라 쓰는 돈은 사치다. 생활에 가깝지 않은 낭만은 그저 구경만으로 족하다고 한다.
“가자~ 우리 마누라 위해서 그거 못 사주겠나~”
“아이고 됐소~”
“왜~한 다발 사보자!!”
반복되는 제안과 거절~
“됐고 저 앞에 꽃마차에나 앉았다 갑시다”
그 여름에 아빠는 엄마에게 낭만적인 꽃 선물을 꼭 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다발이 아니라 한송이라도 엄마가 기뻐할 거라고 담에 서프라이즈 선물을 하고 싶으면 도와주겠다고 귓속말을 했다. 그때 꽃을 샀었다면 어땠을까?? 엄마는 화를 내면서도 마지못해 그걸 받았을거야. 아마도 집에 돌아와 화병에 예쁘게 꽂아두고 바라보며 미소 지었겠지. 행복한 쑥스러움에 얼굴을 붉혔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질은, 사라지는 게 아니야
중학교 때 과학선생님이 이런 얘기를 해준 적이 있다. “느그들 귀신소리 들어봤나?? 그날은 당직날 밤이었는데 비가 부슬부슬 오고 있었어. 밤에 복도를 돌고 있는데 갑자기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애들 깔깔 웃는 소리가 들리는 거라. 순간 깜짝 놀랐지… 느그는 이게 무슨 소리같노??”
“귀신이요~~”
“사실 이기 재밌는기라. 이 현상이 과학적으로 설명가능한 얘기거든. 낮에 애들 웃음소리라는 [물질이 발생] 했어. 그기 어떤 다른 형태로 변할 수도 있지만 사라지는 게 아이라. 소리가 소리의 형태로 어딘가를 떠돌다 부딪히고 부딪혀 다시 교실 안에서 터져 나올 수 있는 거라는 얘기지. 특히 비 오는 날에 그런 소리를 더 마이 듣게 되는 이유는?? 그것도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이. 높은 습도는 물질의 이동을 방해한다~특히 비오면 창문도 꽉 닫아둔다 아이가?? 평소 같으면 멀리 퍼져나갔을 소리가 교실과 복도를 떠돌다가 마침 그때 터져 나올 수도 있다라는 얘기다. 알겠나?”
내 기억속에서 각색이 됐지만 확실한 건 형태가 없는 소리라는 게 사라지지 않고 다시금 그 자리에 나타났다는 거였다. 그게 가능한 거라면 엄마에게 꽃을 주고 싶었던 아빠의 의지 역시 사라지지 않은 게 아닐까? 발생해버린 그의 마음이 세계의 끝을 돌고 돌아서 다시 이 자리, 내 꿈속으로 들어온 건지도 모른다.
빌려줄게요 내 꿈
어쩌면 전날에 읽었던 조정신 님의 글이 내 기억들을 깨워 꾸게 된 꿈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과학선생님의 말을 근거로 해서라도 믿고 싶다. 어딘가에 아직도 아빠의 의지라는 것이 사라지지 않고 떠다니고 있다고. 그런 거라면 내 꿈을 몇 번이고 빌려줄 테니까 언제든 또 이렇게 돌아오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