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enny May 20. 2020

몽블랑 만년필 단상

비우고 내려놓아야 채울 수 있다는데, 난 그냥 받았다.

어느 선배가 몽블랑 만년필을 줬다. 고위직에 오르면 쓰라며 친구가 선물로 준 거라고 했다. 선배는 그 만년필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정년퇴직했다. 자신에겐 더 이상 쓸모없는 펜이라고 한다. 하지만 글 쓰는 작가에겐 필요할 것 같다며 내게 주었다. 옆에 있던 다른 선배가 그에게 말했다. 이젠 비우고 내려놓을 때라고. 잘했다고.


난 그 만년필을 잘 써보려고 한다. 사실 다른 만년필이 몇 자루 더 있다. 딸이 생일 선물로 사 준 한정판, 나 자신에게 선물한 필기감 좋고 굵직한 펜, 잉크 리필 없이 오래 쓸 수 있어서 고시생들이 즐겨 사용한다는 것, 중국에서 친구가 사다 준 엄청 굵고 묵직한 펜, 퇴직 선물로 받은 만년필이 있다.


여러 종류의 만년필은 각각의 특성이 있다. 달필로도 잘 써지는 것으로부터 정자체로 써야 하는 것까지. 어떤 펜으로 쓰는가에 따라 다른 감성이 묻어 나온다. 필기감이 좋고 굵직한 펜으로 쓰면 글이 쉽게 써진다. 시나 수필을 쓸 때 좋다. 학술적인 에세이를 쓸 땐 조금 뻑뻑한 펜을 쓴다. 한 템포 쉬면서 논리적 구성을 재고할 수 있다.


내 손을 거쳐간 만년필은 열댓 자루 정도다. 고등학교 입학 선물로 아버지께 만년필을 받으면서부터였다. 잉크를 리필하고, 펜에 묻은 잉크를 닦으면서 생각을 정리한다. 그리고 펜을 들고 쓴다. 학창 시절엔 선생님 말씀을 받아 적거나 일기를 썼고, 지금은 내 생각과 말을 글로 쓴다. 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른 만년필로 글을 쓴다.


오늘은 선배가 준 몽블랑 만년필을 들었다. 몽블랑 뚜껑의 로고가 맘에 든다. 검은색과 흰색의 대비, 눈 덮인 산을 연상시키는 로고. 비우고 내려놓을 때를 아는 선배가 준 펜이라서 더 좋다. 나도 이젠 비우고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 하지만 선배가 주는 만년필을 그냥 받았다. 그 몽블랑으로 지금 글을 쓰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2020년인데 [술 권하는 사회]에 살아야 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