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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nny Oct 05. 2020

한국전쟁과 유엔군의 해양통제

해양통제는 전쟁 승리를 위한 전략적 전환점을 제공한다

1. 프롤로그

전략사상가 그레이(Colin S. Gray)는 “해양력이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전략적 전환점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역사에도 서기 40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서해 중부 북방 해상교통로를 확보해서 후연의 침입을 격퇴하고 요동 지역을 되찾았던 사례가 있다. “우리는 마음대로 해양을 사용하고 적은 사용할 수 없게 하는 것”을 뜻하는 해양 통제권 확보로 아군의 전쟁지속능력은 보장하면서 적의 병참선과 전쟁지속능력을 파괴할 수 있다. 해양 통제권을 장악하려면 해양 통제권을 확보하고 이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해양 통제권 확보와 해양 통제권 행사가 무엇일까? 한국전쟁  중 유엔군의 해양 통제권 장악은 전쟁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2. 해양 통제권 확보와 해양 통제권 행사

가. 해양 통제권 확보

해양 통제권 확보란 우리는 원하는 대로 해양을 사용하지만, 적은 그것을 사용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해양 통제권 확보 방법은 결전, 현존 함대, 해상봉쇄가 있다.


결전은 해양 강대국이 추구하는 전략이다. 적 함대는 그 규모에 관계없이 항상 위협이 되므로 집중적으로 그것을 격파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현존 함대는 해양 약소국의 전략이다. 상대적으로 열세한 함대로는 적과의 결전을 회피하면서 세력을 보존하여 적을 위협하고 적의 전투 의지를 견제해야 한다. 이것은 적의 취약점이 드러나면 방어태세에서 즉시 공격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의미의 공세적 방어 전략이다.


해상봉쇄도 해양 약소국이 추구하는 전략이다. 적대국의 항구와 연안으로부터 외해까지, 또는 외해로부터 연안으로 적의 선박과 항공기가 출입하지 못하도록 무력으로 막는 것이다.


나. 해양 통제권의 행사

해양 통제권 행사란 우리는 해양을 직접 사용하면서 적은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해양 통제권 행사는 해양 통제권 확보를 전제로 한다. 해양 통제권 행사방법은 군사력 투사, 침공에 대한 방어, 적의 해상교통로에 대한 공격, 아측의 해상교통로 방어가 있다.


군사력 투사는 지상의 상황에 영향을 주려고 해양으로부터 다른 국가의 영토에 병력이나 화력을 투사하는 것이다. 한국전쟁시 인천 상륙작전이 그 사례다.


침공에 대한 방어는 바다로부터 오는 적은 바다에서 막아야 한다는 개념이다.


적의 해상교통로에 대한 공격은 적의 통상을 파괴하여 경제적으로 적을 약화시키는 간접적인 목적, 적의 병참선을 차단해서 아군의 지상 작전을 지원하는 직접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아측의 해상교통로 방어는 아군의 전쟁지속 능력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3. 유엔군의 해양 통제권 장악이 한국전쟁에 미친 영향

유엔군 참전 이전인 한국전쟁 초에 게릴라 부대원 6백여 명을 태우고 부산으로 남하 중이던 북한 해군의 1천 톤급 무장 수송 함정과 한국 해군이 대한해협에서 해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는 한국 해군의 백두산호가 북한 해군의 함정을 격침시켜서 우리 해군에 최초 승리를 안겨주었고, 한국군 전체의 사기도 진작시켰다. 특히 전략적 교두보인 부산에 대한 적 위협을 사전 제거하여 유엔군 병참선을 안전하게 확보했다는 전략적 의미도 있다.


유엔군의 한반도 전개 이후,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38도선 이북지역으로 유엔군 해군과 공군의 작전범위를 확대할 것을 지시했다. 이로써 유엔 해군의 작전반경은 한반도 전 해역을 망라하게 되었다. 하지만 전쟁 초에는 한국 해군의 연합작전 경험 부재, 정보 교환 부족, 책임구역 미확정으로 미 해군의 Juneau호가 아군의 JMS-305정을 적으로 오인하여 격침시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군 함정에 한국군 연락장교가 동승하여 상호 정보교환 체계를 갖추었다. 그 이후 37도선을 기준으로 북쪽 해역은 유엔 해군, 남쪽 해역은 한국 해군이 해상봉쇄작전을 담당하도록 작전 책임구역을 나누었다.


유엔 안보리에서 유엔군 참전을 결의한 이후, 경항공모함 1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3척, 호위함 4척으로 구성된 영국 함대가 미 극동 해군 사령관에게 배속되었다. 이어서 캐나다 해군도 합류하였다. 9월 중순부터 한국 해군도 유엔 해군의 봉쇄/호송부대에 편입하여 작전을 하였다.


한반도의 모든 해역을 초계하기 시작한 미 해군 경순양함 Juneau호 등 3척은, 7월 초 주문진 근해에서 북상 중이던 적 함대와 마주쳤다. 해상 전투 결과, 적의 어뢰정 3척, 경비정 2척을 격침시켰다. 이 해전으로 북한 해군은 주력 함정인 어뢰정 4척 중 3척을 상실했고, 실질적으로 해상 전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력화되었다. 결과적으로 유엔군 해군과 북한 해군의 첫 번째 해전이 마지막 해전이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 유엔 해군이 한반도 전 해역에 대한 해양 통제권을 확보하였다. 해양 통제권을 확보한 유엔군은 한국 연안에 대한 해상봉쇄 작전을 시작했다. 미 해군의 경순양함 1척과 구축함 4척이 동해를 담당하고, 영국 경순양함 2척, 구축함 2척, 호위함 3척이 서해를 담당하였다.


7월 초부터 유엔군 해군은 항공모함을 본격적으로 투입하여 그 기동성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동서해안에서 적 후방지역을 강타하였다. 이러한 항모 강습작전 결과로 적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으며, 후방 병참선과 전략기지에 대한 상시 위협을 인지한 적은 대규모 병력을 후방에 배비하였다. 그 결과 유엔군은 적이 전투력을 전방에 집중시킬 수 없도록 분산을 강요하는 전략적 효과를 거두게 되었다. 7월 29일 이후, 항공모함 Boxer호, Philippin Sea호 등이 증강되어 유엔군 지상군을 위한 근접 항공지원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적 해안지역에 대한 함포사격을 강화하였다. 당시 주요 사격구역은 동해안의 주문진, 울진, 양양, 삼척, 성진, 청진, 이원, 단천 등으로 연결되는 적 병참선 일대와 적의 주요 집결지, 유류탱크, 교량 등이었다. 이 작전의 결과로 적 병참선이 차단되었고 전투력이 급격히 저하됨으로써 아군의 낙동강 방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의 승리를 위한 전략적 전환점을 제공한 인천 상륙작전은 유엔군 해군이 한반도 지역의 해양 통제권을 확보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상륙 1주 전인 9월 8일부터 상륙작전을 감행한 D일까지 영국군의 항공모함 Triumph호, 미군의 전함 Missouri호와 구축함 Helena호 등이 양동작전으로 원산과 삼척 등지에 포격을 가하면서 적을 기만하고 유엔군의 인천 상륙작전 의도를 은폐했다. 9월 13일부터 14일까지 구축함과 순양함들이 월미도에 함포사격을 집중해서 적의 해안방어 병력을 제압했다. 성공적인 상륙돌격 이후, 상륙군에 후속하는 병력 2만 5천6백여 명, 차량 4천5백여 대, 병참 물자 1만 4천여 톤을 해상으로 수송해서 인천에 하역하였다. 이처럼 해양 통제권 행사의 하나인 세력 투사를 통한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은 유엔군의 사전 해양 통제권 확보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유엔군 해군은 한국 전쟁 초기에 북한군 주력 함정과의 결전에서 승리하고 한반도 해역에서 적에 대한 해상 봉쇄를 통해 해양 통제권을 확보하였다. 그 결과 유엔군 해군은 해양 통제권 행사의 하나인 함포와 함재 폭격기를 이용한 세력 투사로 적 병참선을 차단하고 아군의 낙동강 전선의 작전 성공에 기여했다. 유엔군 해군이 한반도 지역에 대한 해양 통제권을 사전에 확보함으로 인해서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의 승리를 위한 전략적 전환점이 되었던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즉, 유엔군 해군의 해양 통제권 장악은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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