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모든 죽음에는 애도와 위로를 받을,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있다.
어느 브런치 작가의 소개 글을 읽고 권헌익의 [학살, 그 이후]란 책을 알게 되었다. 내용이 무척 궁금했다. 구매하려고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이미 절판된 책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서울도서관의 보존서고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인류학의 노벨상이라는 '기어츠 상' 1회 수상작으로 원제는 [After the Massacre: Commemoration and Consolation in Ha My and My Lai]다. 번역한 인류학 서적인지라 책장이 쉽게 넘겨지진 않았지만 첫 페이지를 펼친 이후로 마지막 장을 읽을 때까지 책을 덮을 수 없었다. 늘 자랑스럽게 여겨 온 해병대 청룡부대가 베트남전에서 민간인을 대량 학살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에선 불가피했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군대의 민간인 대량 학살은 반복해선 안 되는 부끄러운 일이요, 피해자와 피해자 유족들에게 마땅히 사과해야 할 일이다. 1968년 정월 하미와 미라이의 희생자와 그 유족들께 해병대 군복을 입었던 퇴역군인으로서 개인적인 사죄의 마음을 전해 드린다. 책의 말미에서 저자가 책을 쓴 의도를 밝힌 문구를 먼저 소개하고, 이어서 필사했던 몇 단락을 옮겨보려고 한다.
'좋은 죽음'이든 '나쁜 죽음'이든, '이편'의 죽음이든 '저편'의 죽음이든, 인간의 모든 죽음에는 애도와 위로를 받을,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사망자의 80퍼센트가 징집 군인이었다. 반면 제2차 세계대전의 경우에는 그 비율이 50퍼센트였고, 1945년 이후로는 전사자의 90퍼센트가 비전투원 민간인이었다.1) 대규모 전사자 중에서 군인의 비율이 점차 줄어든 현상은 기술의 발달에 따른 대량살상 무기의 출현과 총력전 이론의 세계화가 낳은 결과다. 총력전 이론은 해방전쟁을 위해 인적 물적 자원을 총동원한다는 패러다임 속에서 전통적 분업 및 무장 전투원과 비무장 민간인의 구분을 깨뜨렸다. 베트남 전쟁은 기술적으로는 진보한 전쟁, 철학적으로는 총력전의 정점이었고, 베트남의 이와 같은 현대전의 두 가지 전형적 측면이 쌍방의 힘을 시험한 전역(戰域)이었다. 베트남 전쟁은 "모든 주민이 병사이고 모든 마을이 요새"가 되는 상상 불가능한 이상을 상상한 전쟁이었다.2) 또한 거대한 살상 병기가 완전하게 발달하지 못해서, 합법적 살상 대상과 살상이 금지된 다양한 대상을 기계적으로 구분하지 못하는 전쟁이었다.3)(45쪽)
인민전쟁은 "억압자들과 정복자들에 맞서 인민의 자유와 독립을 보호하기 위한 전쟁"이라는 점에서 정당화된다. 인민전쟁의 정당성은 전쟁의 총체적 성격에서 유래한다. 인민전쟁은 군대만이 아니라 인민 전체가 수행하는 전쟁으로 인민에 의해 인민을 위해 수행된다. 인도차이나 공산당 창립멤버이자 당의 급진적 이론가 쯔엉 찐(Truong Chinh)에 의하면, 대중적이고 기동적인 게릴라 전쟁에서 인민은 군대의 눈과 귀이며, 병사들을 먹여 살리고, 파괴 공작과 전투에서는 군대를 도와야 한다. 이처럼 민간인과 군대가 통합되면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병사이고, 마을 하나하나가 요새"가 되는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도덕적으로 정의롭고 방법적으로 총력적인, 일반화된 인민의 정치 군사적 투쟁이라는 이상적 모델은 베트남 전쟁이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는 전선 없는 전쟁'이란 이미지를 만드는데 기여했다.(60쪽)
인민전쟁이라는 패러다임은 그것에 맞서 싸운 일부 사람들에게도 비극적 결과를 안겨주는 현실이 되었다. 미국과 사이공 당국의 마을 평정 전략은 민간인들에게 마을에서 쫓겨나느냐, 아니면 남아서 박해를 당하느냐는 말도 안 되는 선택을 강요했다. 이 전략은 물(인민)을 빼내서 물고기(적 전투원)를 찾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이 전략 때문에 사람들은 생계 기반 및 종교적 도덕적으로 귀속된 장소와 분리되었다. 그렇지만 진짜 적을 찾는 일을 거의 드물었다. 사이공 군 관료집단은 병사들에게 확신한 통계 결과를 만들어 내라고 요구했다. 즉 쉽게 잡히지 않는 게릴라 전투원의 살상자를 내놓으라고 계속 독촉했고, 그에 따라 한 곳에 머물러있어 상대적으로 접근이 용이한 민간인 집단에서 적을 가동해 낼 가능성을 조성했다.4) 전투원과 민간인 비전투원을 구분하는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위험지역과 혼란 지역에서 작전을 펼칠 때는 이런 구별을 포기할 수 있는 위험하고 비극적인 사태가 예견되었다. 그리하여 마을 평정 작전을 명령받은 병사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관용어가 생겨났다. "모조리 죽이고 깨끗이 불태우고 깡그리 파괴하라." "눈에 띄는 것은 모두 베트콩이다." "어린아이들도 첩자다." "놓치는 것보다는 오인해서 죽이는 게 낫다" 등.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병사이고 마을 하나하나가 요새인 전쟁"이라는 인민전쟁의 이상은 1966년부터 1969년까지 각기 다른 두 종류의 전쟁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이론적 간극을 넘어서버렸다. 잔학한 전쟁 범죄는 물과 물고기 비유가 문화적으로 익숙한 추상에서 상상된 낯선 실재(實在)로 치명적으로 전환되면서 나타난 결과였다.(61~62쪽)
전문적인 직업군인들은 사람들이 군복도 없이 군인이 아닌 마을 사람으로서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군인들은 그들이 싸우는 이유가 승리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군인들은 이런 복잡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베트콩 남편이 잠을 잔 침상을 정돈하는 여자를 베트콩으로 봤고, 집 뒤편에서 코코넛 껍질을 깨는 아이들도 베트콩으로 보았다. 또 그들은 그들의 집과 닭과 물소를 베트콩이라고 판단했고, 그들의 조상 무덤과 그들이 절하는 사당을 베트콩으로 여겼으며, 그들이 생활하고 의지하는 세계 전체를 모조리 베트콩이라고 낙인찍었다. 아마 군인들은 달리 판단할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군인들이 보기에는 그들이 먹는 고기와 그들이 사는 집과 그들이 절하는 사당과 그들이 속한 세계 전체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단일한 복합체(군대)에 속했기 때문이다.(107~108쪽)
(베트남 사람들의)"신령 숭배는 일정한 민주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열린 체계"다. "신령 숭배는 여성 신과 남성 신, 젊은 신과 나이 든 신, 귀족(왕, 여와, 고관) 출신이나 평민(농민) 출신, 거지, 도둑, 우리나라에서 싸우다 쓰러진 적군 병사의 영혼까지도 인정한다." 실제로 산 사람들에게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이 있는 것처럼, 죽은 이들에게도 권리(기억될 권리)가 있으며, 망령 신당은 이런 보편적 윤리를 나타내는 열전 기념물처럼 보였다. 망령 신당은 조상과 망령들이 그들을 갈라놓는 죽음의 위계와 무관하게 슬픔과 기쁨을 나누는 공간이었던 것이다.(172~173쪽)
국가(베트남)는 집안의 조상 묘지와 마을회관 대신 전쟁기념물과 역사 묘지를 마을의 성스러운 장소로 바꿨다. (베트남의) 남부지역에서는 이런 의례적인 정치를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이 전후 사회동원의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했다. 마을 사람들은 가장 내밀한 생활영역에서 매일같이 민족국가를 읽고 경험했다. 대량 생산된 국가지도자 초상화와 혁명 병사 사망증명서가 위패를 비롯한 조상 기념물을 밀어냈다. 또한 마을을 세우는 소상들에게 바치는 비명(碑銘)이 보관되어 있는 전통적 마을회관 대신 비슷하게 장식된 인민위원회의 공식 마을회관이 자리를 잡았다. 이것은 특별한 종류의 만들어진 전통이었다. 전통적이 종교제도가 민족 통합의 기술이 된 것이다. 민족국가를 상상하는 것은 조상숭배라는 익숙한 체계 안에서 전사자 영웅에 관해 생각하는 문제가 되었다.(177쪽)
베트남 사람들에게 전쟁은 이론적으로 인민전쟁이었다. 즉 이 전쟁에서는 군대와 인민의 완전한 융합을 주장했다. 인민전쟁의 이론에서는 이론 통일을 숭고한 사회형태로 이상화했는데, "인민은 물이고, 우리 군대는 물고기다"라든가, "모든 주민이 병사이고 모든 마을이 요새다"라는 유명한 구호들은 이런 일상화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통일은 지속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뒤, 죽은 '주민-병사'는 정체성의 한 면을 잃어버린 채 단순한 주민으로 전락했다.(220쪽)
두 병사 이야기(A Tale of Two Soldiers)_팜 주이(Pham Duy)
같은 마을에 사는 두 병사가 있었지.
둘 다 조국 베트남을 사랑했어.
같은 마을에 사는 두 병사가 있었지.
둘 다 들판과 베트남 땅을 사랑했어.
한 가족에 속한 두 병사가 있었지.
둘 다 한 민족, 베트남 민족이었어.
한 가족에 속한 두 병사가 있었지.
둘 다 한 핏줄, 베트남 핏줄이었지.
한 마음을 가진 두 병사가 있었지.
둘 다 베트남이 패배하는 걸 원치 않았어.
길을 오르는 두 병사가 있었지.
베트남을 지키려고 굳게 결의한.
영웅이 된 두 병사가 있었지.
둘 다 적 부대를 찾아내서 사로잡았어.
영웅이 된 두 병사가 있었지.
둘 다 "공동의 적 무리를 쓸어버리러" 떠났어.
들판에 엎드린 두 병사가 있었지.
둘 다 소총을 움켜쥐고 기다리고 있었어.
어느 붉게 물든 황혼 녘에 두 병사가 있었지.
베트남을 위해 서로를 죽인.
베트남을 위해 서로를 죽인.5)
목숨을 걸고 싸운 냉전의 적들이 같은 뿌리에서 나왔고, 양쪽 다 상대방의 위협에 맞서 자기 고향을 지킨다고 믿기 때문에 서로 싸웠다는 메시지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노래다. 한쪽은 상대방의 민족 독립 추구를 공산주의의 음모로 보는 시차적 관점으로 고통받았다. 반면 다른 쪽은 상대편의 동등한 행동을 제국주의적 야욕과 내통한 것으로 오인했다. 전 지구적 충돌에서 싸운 이 병사들에게 냉전은 이중적인 시차적 관점의 전장이었고, 이 전장에서 시각적 왜곡은 상호 주관적인 현실(intersubjective reality)이었다.(258~259쪽)
대규모 전사자들은 군대의 국가적 기억을 구성한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죽음의 대량 생산에 직면한 각국이 전몰장병의 이름으로 거대한 각종 기념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일반화된 사별의 경험을 민족 화합을 강화하는 적극적인 사회적 힘으로 변형시킨 현대 유럽의 사회사에서 우리는 이런 사실을 배운다.6) 이 프로젝트들은 후에 식민지에서 독립한 제3세계의 신생 민족국가들에서 고스란히 복제되었다. 짐바브웨의 경험에 관해 서술한 웨브너(Richard Werbner)에 따르면, "개인이 국가에 종속됨을 증명하고, 시민들의 개인적 정체성을 에워싸는 국가의 권리를 주장하며, 시민과 민족의 동일성을 입증하기 위한" 결정적인 연극무대를 제공했다.7)(284쪽)
'좋은 죽음'이든 '나쁜 죽음'이든, '이편'의 죽음이든 '저편'의 죽음이든, 인간의 모든 죽음에는 애도와 위로를 받을,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있다.(294쪽)
집단 사망의 희생자들에게 원통으로부터의 해방은 양극적 정치와 상징적 정복의 정치를 초월하는 방법이다. 다만 양극적 정치에서 부정된 인류의 화합과, 공동체 화합의 상징적 형태에 감춰진 보편적 규범을 회복한다는 점에서 말이다.(294쪽)
각주
1) André Glucksmann, Dostoievski à Manhattan (Paris: Robert Laffont, 2002), pp.18~19.
2) Vo Nguyen Giap, People's War, People's Army (New York: Praeger, 1962), p.43.
3) Jonathan Schell, The Real War (New York: Pantheon, 1988), pp.193~204.
4) Jonathan Neal은 주장한다. "흔히 그렇듯이 게릴라를 찾지 못하면 사람들을 죽였다.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말이다. 시체의 수는 속임수나 관료집단의 강박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략이었다. 이 모든 과정에 워싱턴의 압력이 작용했다. 미국의 압력을 그대로 전달해서 민간인 학살을 유도한 장성과 장교들은 출세 가도를 달렸다. Jonathan Neal, The American War in Vietnam, 1960-1975 (Chicago: Bookmarks, 2001); 조너선 닐, 정병선 역, 미국의 베트남 전쟁 (서울: 책갈피, 2004), p.77.
5) Neil L. Jamieson, Understanding Vietnam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 pp.321~322.
6) 전몰장병을 위한 각종 기념 프로젝트는 Thomas W. Laqueur, "Memory and Naming in the Great War," in John T. Gills, ed., Commemorations: The Politics of National Identity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4), p.155; 사별을 적극적 사회적 힘으로 전환한 과정은 Benedict Anderson, Imagined Communities: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the Spread of Nationalism (New York: Verso, 1983), pp.181~206.
7) Richard Werbner, "Smoke from the Barrel of a Gun: Postwars of the Dead, Memory, and Reinscription in Zimbabwe," in Memory and Postcoloniality, ed. Richard Webner (London: Zed, 1998), p.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