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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nny Apr 18. 2020

미국의 관여정책은 역사적으로 어떤 것이 있었나?

미국의 대북한 최대 압박과 관여 정책을 이해하려면!

미국의 대북한 외교정책인 최대 압박과 관여 정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미국이 어떤 관여정책을 수행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패권을 장악한 미국은 유럽, 동북아 지역에서 관여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자국의 국익을 추구해 왔다. 마샬플랜과 북대서양 조약, 미일동맹과 한미동맹이 바로 그것이다.


1. 마샬 플랜과 북대서양 조약

제2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한 서유럽의 경제 회복을 위한 마샬 플랜은 미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대외 원조 프로그램이었다. 1949년 프랑스와의 구동맹이 해체된 이후로 미국 최초의 평화시 동맹 공약인 북대서양 조약은 서유럽으로의 소련 공산주의의 팽창을 방지하고 서유럽의 경제 부흥을 위한 초석이 되었다. 따라서 마샬 플랜과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창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다자주의에 의한 관여정책의 첫 번째 성공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한 서유럽 경제는 1947년 봄 거의 마비상태가 되었고 인구의 과반수 이상이 만성적 고통을 겪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모든 서유럽 국가 들은 식량, 석탄, 비료, 가축, 곡물사료와 공장을 다시 가동하기 위해서 필요한 기계나 필수 부품의 심각한 부족 상태를 겪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동원 해제된 군 병력의 민간 경제로의 전환과 동유럽으로부터의 수백만의 피난민 유입으로 실업자와 굶주린 자들의 수는 더욱 늘어만 갔다. 유럽은 대규모의 수입품을 필요로 하였으나 이를 지불할 방도가 없었다. 외국환 보유는 전쟁 동안에 변제되었고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국제무역의 부흥 없이는 대체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1950년 원조기금의 효율성과 회원국의 유동성을 증가시킨 유럽 내의 결제를 위한 유럽 결제 동맹이 창설되었다. 달러의 갭은 좁아졌고 무역은 자유화되었다. 유럽 경제협력기구의 첫 번째 10년 동안 서유럽은 완전한 통화의 태환성을 이루었고, 외환 보유액을 두배로 늘렸으며 거의 매년 연평균 5%의 GNP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서유럽인 들은 정치 지도력, 행정 기술, 그리고 이를 운영할 수 있는 기술적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마샬 플랜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대외원조 프로그램이 되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으로 인해서 추후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 간의 경제적 상호의존도가 높아질 것이라는 것을 서유럽 국가 내 지배 엘리트들이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북대서양 동맹 내에서 그들의 정치적·군사적 안보의 후속적 연계를 위한 토대가 되었다.


마샬 플랜이 서유럽 경제부흥을 위해서 중요하지만 그 계획으로는 소련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서유럽의 안보를 제공할 수 없었다. 서유럽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적 차원에서는 성장하고 있었으나 군사적 차원에서는 더욱 약화되고 있었다. 1948년 6월 11일 미 상원은 헌법적 과정에 따라서 계속적이고 효과적인 자조와 상호 원조에 기반을 둔 그리고 미국의 국가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같은 지역적이며 다른 집단적 제도와 미국과의 연합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반 덴 버그(Vandenberg) 상원의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이 결의안은 미국의 외교정책에서 하나의 혁명을 이루었다. 이것을 계기로 미국의 안보가 유럽의 안보와 얽히게 되었고, 1949년 봄에 북대서양 동맹 창설을 마련하였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2. 미·일 동맹

미국과 일본 간의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일본으로 하여금 서방세계의 일원이 되는 계기를 제공하였으며, 미·일 안보조약은 미군의 일본 주둔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대륙세력인 중국과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전진기지를 확보하고, 일본은 미국과의 상호의존도를 강화시킴으로써 2016년 12월 현재에 이르기까지 굳건한 미·일 동맹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따라서 샌프란시스코 조약과 미·일 동맹은 미국의 관여정책 성공사례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1951년 9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전쟁 기념 공연 예술 센터에서 맺어진 일본과 연합국 사이의 평화조약이다. 1951년 9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48개국이 서명하였고, 1952년 4월 28일에 발효되었다. 이 조약에 의거해 수립된 국제 질서를 샌프란시스코 체제라고 한다. 6.25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1년 9월 미국과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양국이 동맹 관계로 들어서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미국은 강화조약을 통해 한국전쟁으로 인해 본격화된 냉전에서 소련 주도의 공산주의 국가를 견제하는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려고 하였다. 일본은 이를 통하여 피점령 상태에서 벗어나서 서방세계의 일원이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일본과 미국 간의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은 일본과 미국 간의 안전 보장을 목적으로 일본에 주일 미군이 주재하는 것 등을 정한 양국 간의 조약이다. 일본에서는 쇼와 35년 조약 제6호라고도 하며, 미·일 안전보장 조약이라고도 불린다. 1960년 1월 19일 워싱턴 D.C. 에서 체결되었으며, 같은 해 6월 23일에 발효되었다. 이 조약은 미·일 동맹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과 같은 날에 체결되어 1952년 4월 28일 발효한 일본과 미국 간의 안전보장 조약(이하 '구 안보조약')은 이 조약에 따라 형식적으로 효력을 잃었으나 구 안보 조약에서 명시된 내용은 이 조약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체결 당시 조약의 기한은 10년이었으며, 10년 이후에는 체결국이 1년 전에 예고한 다음 일방적으로 파기할 수 있도록 정해졌으나, 기한이 만료된 1970년 이후에도 파기되지 않고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미·일지 위 협정(일본과 미국 간의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 제6조를 바탕으로 한 시설 및 구역 등에서 일본에 대한 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에 의하여 상세한 항목들을 정하고 있다. 미·일 지위 협정은 일본이 미군에 시설 및 지역을 제공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정한 것 이외에 그 시설 내에서의 특권이나 세금의 면제, 병사 등의 재판권 등을 정하고 있다.     


3. 한·미 동맹

한국과 미국은 냉전 시대를 통해 미국의 대소련 봉쇄전략과 한반도에서 북한의 도발 억제라는 전략목표와 국익을 바탕으로 긴밀한 군사동맹관계를 발전시켜왔다. 한국은 굳건한 한·미 연합방위체제에 의해 조성된 안정적 안보 환경 하에서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체제의 정착을 실현할 수 있게 되었으며, 동북아시아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은 한국과 미국이 동맹 관계를 수립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초 미국은 한국 정부의 동맹 체결 및 주한미군의 주둔 요구에 소극적이었으나, 결국 한국 정부의 요구가 관철되어 1953년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한·미 군사동맹이 수립되었다. 한·미 동맹은 과거 냉전시대의 주적이었던 공산국가의 군사적 도전을 억제하고 동북아 지역의 안정을 유지한다는 공동 목표 아래, 한·미 연합사의 효율적인 운영, 한·미 안보협의회의와 군사위원회의 제도화를 통해 연합 방위태세를 강화하는 한편, 매년 한·미 연합훈련의 실시, 군사 정보의 교환, 방위산업 협력, 한·미 국방장관 간의 직통전화 설치 등 다각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은 한반도와 대만을 방위 대상에서 제외하는 등 제한적이고 소극적이었으나, 한국전쟁을 계기로 전방전개 전략을 채택하면서 적극성을 띄게 되었다.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은 어느 나라도 이 지역에서 지배적인 힘의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두고 있다. 동아시아지역에서 미국의 장기 목표는 첫째, 미국이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이 지역의 접근에 방해가 되는 장애요소를 사전에 방지하고, 둘째, 이 지역에서 미국을 위협하는 패권이 형성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은 미군의 전방 전개를 통해 안정자의 역할을 자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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