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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nny Apr 28. 2020

한국 정전협정의 군사분계선에 관한 고찰 #2(법,논란)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의 MDL Project를 중심으로

III. 정전협정상 군사분계선의 법적 지위와 그 위치에 관한 논의


   1. 한국 정전협정의 법적 지위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직후에는 남·북한 쌍방이 전후 복구사업에 몰두하였고, 북한의 대남전략이 완전하게 수립되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정전협정의 불충분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하여 21건의 후속합의서를 채택하는 등 정전협정 이행을 위하여 상호 협조적이었다. 그러나 1954년 6월 15일 정전협정 제4조 제60항에 따라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소집된 제네바 정치협상이 결렬되면서, 동년 후반기부터는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양측간 전력 증강 문제를 가지고 마찰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상호 간 비방을 하게 되었다. 한국 정전협정은 1953년 체결된 이후 66년의 세월이 흐른 현재까지 단 한 차례의 개정도 없이 유지되어 오고 있으며, 이러한 시간의 경과에 따라 현실과 규범의 괴리가 커져 왔고, 현재 남․북한 상호 간에 인정하는 정전협정의 규범력의 부분은 극히 일부분으로 제한된다는 견해도 있다. 더 나아가 장기간 정전상태는 사실상 전쟁의 종료(de-facto termination of the war)와 같은 법적 질서를 창출하였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견해도 있다. 그렇다면 사실과 규범의 불일치로 인한 규범력의 상실에 대하여 국제법적으로는 어떤 설명이 가능한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조약은 ‘국가와 국제조직간 또는 국제조직 상호간의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비엔나 협약)이 직접 적용되는 협의의 조약, 교전단체나 분단국 구성체제와 같은 국가 유사단체를 포함하는 국제법 주체 간의 권리와 의무의 발생·변경·소멸을 내용으로 하는 광의의 조약으로 구분할 수 있다. 비엔나 협약이 국가 간의 조약만 적용되는 것이지만, 정전협정은 군사령관이 교전 당사국을 대표하여 서명한 것이고 비엔나 협약의 범위에 속하지 않는 국제적 합의에 대해서도 비엔나 협약의 적용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정전협정은 조약법의 일반이론을 적용할 수 있는 국제법상 광의의 조약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 헌법상 조약이란 국가 간에 법률상의 권리와 의무를 창설·변경·소멸시키는 2개 국가 또는 그 이상의 국가 간의 약속을 말한다. 따라서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대한민국 헌법상 북한과의 합의에 대한 국회의 체결·비준 동의권은 헌법상의 체결·비준 동의권이 아닌 남북관계발전에 관한 법률 제4장 남·북 합의서의 체결에 따라 규율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국내법적 사정이 국제법적으로 정전협정을 광의의 조약으로 인정하는 데에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정전협정은 교전 당사국의 정부 또는 지휘관 사이에 체결된 전투행위의 일시적 중지에 관한 조약이며, 조약법의 일반이론을 적용할 수 있는 국제법상 광의의 조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양측 대표@유엔사 군정위


   2. 군사분계선의 역사와 그 법적 지위

  1953년 7월 27일 3년이 넘는 전투 끝에 한국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6·25 전쟁이 휴전되었다. 그리고 정전협정이 체결됨에 따라서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군사분계선에 의해 휴전 이후 66년간 한반도가 분단 상태를 유지해 오고 있다. 정전협정 체결 당시의 군사분계선은 표식물 1,292개로 표시되었으나, 현재 대부분의 군사분계선 표식물이 자연 소실된 상태이다. 군사분계선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들은 오늘날까지도 정전협정 유지 및 이행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일으키고 있다. 1953년 7월 정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크게 두 차례의 회담이 개최되었다.

  1951년에 시작된 1차 회담의 내용은 논쟁과 의견 충돌로 점철되었다. 당시 이 회담에서 쌍방 간 합의를 달성할 경우 1951년 11월에 정전협정을 체결하려고 하였으나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1차 회담에서는 경계선을 설정하여 병력을 분리하는 것에 합의하였다. 1951년도 1차 회담 당시 군사분계선의 경우, 사전에 정한 132개의 표식물을 설치한 이후 그 표식물을 연결하는 선을 지도에 그리기로 하였었다.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설정하려던 비무장지대는 최초 그 폭이 32km로 제안되었으나 1951년 9월에 4km로 축소되었다. 또한, 최초에 제안되었던 38선과 달리 이 군사분계선은 양측 군대의 접촉선을 따라 설정하기로 하였고, 의도한 대로 설치된 표식물들의 위치를 군사분계선의 가장 확실한 위치로 하기로 하였다. 당시에는 표식물을 먼저 설치할 계획이었으므로 지도에 그어진 선은 단순히 표식물들을 연결한 선에 불과했을 것이다. 표식물 설치를 위해 정해 놓은 좌표들은 1951년 협상 당시에 사용했던 축척 2만5천분의 1 지도상에 표시하였다.

1951.10. DMZ를 논의하는 북측과 유엔사측 대표단@www.nationalmuseum.af.mil


  그러나 협상 간 악화한 논쟁으로 인하여 당시 제안되었던 군사분계선의 내용에 대한 논의가 전면 중단되었고, 그 이후 1953년 재개된 회담은 1차 회담과는 극명한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1953년에 실시된 군사분계선 관련 협상의 내용은 1951년 제안된 내용과 일부 일치하는 점도 있었다. 비무장지대는 동일하게 폭 4km의 지역으로 접촉선을 중심으로 하여 설정하기로 하였다. 여기서 접촉선은 1953년 6월 16일 당시의 접촉선을 의미하였다. 1951년 회담과는 달리 군사분계선 설정을 위한 협상이 1953년 7월 20일부터 22일까지 단 3일 만에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좌표를 미리 설정했던 1951년과는 달리, 1953년 협상 시에는 군사분계선을 지도에 먼저 그린 후에 현지 측량을 통해 좌표를 파악하여 표식물을 설치하기로 하였다.


  북한군, 중국 인민지원군, 유엔사 인원으로 구성된 도식팀이 군사분계선을 축척 5만분의 1 지도상에 수기로 도식하였다. 당시 유엔사 측에서는 로버트 베일리(Robert Bailey)와 헨리 츄라지(Henry Chiurazzi)가 대표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북한군, 중국 인민지원군 측 인원들과 함께 협상용 지도상에 연필로 최초 선을 그었다. 지도의 축척을 고려할 때, 이 선의 폭은 실제 50m이다. 도식팀은 이 선이 최종적으로 확정된다면 이를 기준으로 표식물을 설치할 것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지도에 대해 최종적으로 합의하고 모든 당사자가 그어진 선에 동의한 우, 베일리와 츄라지는 연필선 위에 볼펜으로 선을 덧그렸다. 북한군과 중국 인민지원군 측의 대표들은 당시에 볼펜 기술이 없어서 구식 만년필을 사용하였다. 군사분계선이 도식된 후 베일리와 츄라지는 비무장지대의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을 도식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들은 컴퍼스를 이용하여 지도상에서 2km에 해당하는 간격을 측정한 후에 숫자 미상의 지름 4km 원들을 그리고, 이어서 원의 접점들을 연결하여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을 표시하였다.


정전협정 지도에 그려진 군사분계선@http://s2.reutersmedia.net


  정전협정 지도는 동경측지계를 이용하여 제작되었다. 원래의 동경측지계는 동경을 중심으로 하는 1892년식 2차원 좌표체계와 1841 베셀 타원체를 사용한 것이었다. 이 좌표계는 1898년에 한반도까지 포함하도록 확장되었다. 일본은 40년간 한반도를 점령하면서 1911년에 한 차례, 그리고 그 이후 국지적 측량 등 총 두 차례의 측량하였다. 측지계가 한국에서 끝나서 동경과 한국 사이에는 기준점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은 한반도 측량을 위한 시작점을 부산으로 정하였다. 한반도 공식 측량 이후 이 측지계는 1912년에 한 차례 더 최신화되었다. 정전협정 지도를 분석한 결과,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인해 발생한 지각 변동까지 반영하여 지도를 제작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모든 협상이 종료된 이후 지도 원본은 동경으로 공수되어 미 제64측지공병대대가 9부의 정전협정에 첨부되는 34장의 지도를 제작하였다. 이 지도들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이전에 사실 여부를 모두 확인하였다. 사본을 검증하기 위해 라이트 테이블에서 지도 원본과 새로 인쇄된 지도들을 비교하였다. 검증이 완료된 각 사본에는 유엔사 및 북한군 대표가 서명하여 진본임을 인증하였다. 이 지도들은 하나의 철로 제작되어 정전협정과 함께 양측에 배부되었다. 당시 제작된 사본, 특히 북한군과 중국 인민지원군에 제공된 사본의 현황을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으나, 현재까지 남아있는 사본들은 유엔사 군정위, 중립국감독위원회,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이 각각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유엔사 군정위에서 보유중인 정전협정 제2권 지도철


  군사분계선 표식물들은 1953년 8월에 설치되었다. 표식물 설치를 위한 지침은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이전에 수립되었으며, 강, 호수, 하천, 도로 또는 소로가 없는 특정한 상황에서는 분계선이 지도 및 지상 측량 결과에 따라 설정된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표식물 설치 인원들에게는, 지형지물과 거주 지역을 고려하여, 표식물의 위치를 조정할 수 있는 재량권이 부여되었다. 표식물은 8피트 높이의 금속제 말뚝을 땅에 박든지 3피트 크기 돌무더기에 고정하여 설치하며, 인접 표식물로부터 식별할 수 있도록 하였고, 각 표식물간 간격은 최대 500m를 넘지 않도록 하였다. 표식물 설치가 완료된 이후에는 유엔군, 북한군 및 중국 인민지원군 측 인원들로 구성된 공동감시소조가 각 표식물이 정전협정 지도상에 표시된 바에 따라 설치되었는지를 확인하였다. 공동감시소조는 상황에 따라서, 예를 들면 묘지나 마을이 군사분계선에 의해 둘로 나뉘게 되는 경우, 지도상 의도된 위치에서 북쪽 또는 남쪽으로 표식물을 옮겨 설치하는 것이 허가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완료된 이후에는 군사분계선이 표식 되었음을 명시한 후속합의서가 체결되었으며, 이는 지상 표식물들과 1953년 7월에 승인된 인쇄 지도상에 그어진 선 간에 차이가 있는 경우에 지상의 표식물들이 가장 확실한 군사분계선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최초 설치했던 군사분계선 표식물들은 이후 6피트 높이의 석면이나 시멘트 말뚝으로 교체되었으며, 말뚝에는 북쪽과 남쪽을 향하는 표지판 2개를 부착하였다. 북쪽을 향하는 표지판에는 중문과 국문으로, 남쪽을 향하는 표지판에는 영문과 국문으로 표기하였다. 1954년 9월 유지보수작업을 위해 표식물들을 “갑”구와 “을”구로 나누는 추가 합의서가 서명되었다. “갑”구에 있는 표식물들은 유엔사가, “을”구의 표식물들은 북한군이 책임지도록 하였다. 표식물 총 1,292개 중 유엔사는 696개에 대한 유지보수 책임을 맡게 되었다. 1969년까지 유엔사는 할당된 표식물에 대한 유지보수를 커다란 어려움이 없이 진행하였다.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 "갑"구역과 "을"구역@유엔사규정551-4


  그러나 1969년 3월부터 유엔사의 표식물 유지보수팀이 북한군에 의해 기습 공격을 당하는 사건이 연이어서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의 수위가 점차 높아지자 유엔군 사령관은 유엔사 병력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유지보수 활동을 전면 중단하도록 지시하였다. 이후 몇 년간 표식물 유지보수 작업을 재개하는 방안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으나, 안전에 대한 전반적인 우려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1972년부터 유엔사 측 표식물들에 대한 유지보수 작업은 전혀 실시되지 않았다. 그 이후로부터 최근까지의 북한군 활동을 관측한 결과, 북한군도 그쪽에 할당된 표식물들에 대한 유지보수작업을 시행하지 않고 있지만, 군사분계선까지 접근하여 표식물의 위치를 숙지하는 듯한 모습은 보인다. 이러한 활동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유엔사보다 북한군이 군사분계선 표식물들의 실제 위치를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군사분계선에 관한 사항은 한국 정전협정 제1조에 명시되어 있다. 제1조 제1항에는 “한 개의 군사분계선을 확정하고 쌍방이 이 선으로부터 각기 2킬로미터씩 후퇴함으로써 적대 군대 간에 한 개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한다. 한 개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하여 이를 완충지대로 함으로써 적대행위의 재발을 초래할 수 있는 사건의 발생을 방지한다”라고 기술함으로써, 군사분계선의 설치 목적을 명시하고 있다. 제2항에는“군사분계선의 위치는 첨부한 지도에 표시한 바와 같다”라고 명시함으로써 정전협정 원본 지도상에 표시된 군사분계선이 양측간 합의된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제4항에는“군사분계선은 하기와 같이 설립한 군사정전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이를 명백히 표식한다. 적대 쌍방사령관들은 비무장지대와 각자의 지역 간의 경계선에 따라 적당한 표식물을 세운다. 군사정전위원회는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의 양 경계선에 따라 설치한 일체 표식물의 건립을 감독한다”고 명시하여 군사분계선 표식물을 실제 지형에 설치하기로 쌍방 간에 합의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1953년 11월 3일 제86차 비서장 회의에서 쌍방 간에 군사분계선이 표시된 데 관한 합의를 함으로써, 1,292개의 군사분계선 표식물이 실제 지형에 설치되었고, 이것이 상호 인정하는 군사분계선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한국 정전협정 후속합의서 "S" 군사분계선이 표식된 데 관한 합의(1953.11.3. 제86차 군사정전위원회 비서장 회의)에서 조·중 측은 “우리 측은 정전협정 제4항에 준거하여 군사분계선이 이미 표식되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조치가 취해졌음을 비서처의 공식 기록에 기록해 두는 데 동의합니다”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국련 측도 “우리 측 역시 정전협정에 의거하여 군사분계선이 이미 표식되었다는데 동의합니다”라고 후속합의서에 기록하였다. Subsequent Agreement to the Korean Armistice Agreement: Agreement that MDL has been Marked, 3 November 1953.


   3. 정전협정에 명시된 군사분계선의 위치에 관한 논란

  유엔사 군정위 자료에 의하면, 2014년 6월부터 정전협정 위반으로 추정되는 사건들을 조사하여 다음의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첫째, 관측 가능한 군사분계선 표식물의 수가 충분하지 않아서 비무장지대 내에서 적대 병력을 분리하는 선으로써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둘째, 군인들이 군사분계선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게 1953년 정전협정 원본 지도를 현대 측지계로 변환하려는 노력이 없었다.


  또한, 유엔사 군정위 측이 보유하고 있는 문서에는 2015년까지 여러 가지 군사분계선이 확인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014∼2015년에 걸친 유엔사 군정위의 비무장지대 점검 및 특별조사 과정에서 다음의 다섯 가지 군사분계선이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정전협정 원본 지도상 군사분계선, 유엔사 군정위의 구글어스 상 군사분계선, 한국 국방지형정보단의 디지털 군사분계선, 미국 국립지리정보국의 디지털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 내 한국군의 GP와 OP에서 인식하는 군사분계선이다.


  첫째, 정전협정 원본 지도상의 군사분계선이다. 정전협정 지도는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현장에서 서명자들과 중립국감독위원회 참관단에게 배부되었다. 당시 북한군, 중국 인민지원군, 유엔군사령부 인원으로 구성된 도식팀이 축척 5만분의 1 지도상에 군사분계선을 직접 그렸다. 유엔사 측 베일리와 츄라지가 대표로 참여해서 북한군, 조·중 측 인원들과 함께 협상용 지도상에 연필로 최초 선을 그었다. 최종적으로 합의한 다음, 연필로 그은 선 위에 베일리와 츄라지가 볼펜으로 선을 덧그렸고, 북한군과 중국 인민지원군 측 대표들은 구식 만년필로 선을 덧그렸다. 이렇게 정전협정 원본 지도상에 표시된 선이 상호 합의된 유일한 군사분계선이다.     

접합시킨 정전협정 지도에 군사분계선을 그리는 모습@유엔사군정위


  둘째, 유엔사 군정위의 구글어스 상 군사분계선이다. 이것은 유엔사 군정위가 특정 사건과 군사분계선 간의 위치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사용해 온 것으로서, 유엔사 군정위 측이 주한미군 지형정보과로부터 입수하여 제공한 것이다. 이 파일은 구글어스의 kml(keyhole markup language) 파일이다. 이 파일의 정확한 출처는 확인된 바가 없으나 2014년 12월 한국 국방지형정보단이 유엔사 군정위에 제공한 군사분계선 파일과 같은 것이다.

kml(keyhole makeup language) 파일은 구글어스, 구글 지도 및 기타 응용 프로그램에서 쓰이는 XML 기반의 마크업 언어 스키마이다. 지형정보를 모델화하고 표현하는 역할을 한다. 주요 기능은 아이콘과 라벨로 지구상의 위치를 표시하고, 시점·기능·지형·사물 등에 따른 각각의 카메라를 설정하며, 지표면이나 화면에 그림이나 영상을 띄움으로써 기능·특징별로 해당 위치의 표현 방법을 각각 설정할 수 있다.


  셋째, 미국 국립지리정보국의 2004년도 디지털 군사분계선이다. 미국 국립지리정보국의 주한미군 정보참모부 분견대는 미국 국립지리정보국 자료실의 2004년도 군사분계선 자료를 유엔사 군정위에 제공하였다. 이 자료는 2004년 미국 국립지리정보국의 라도(John Rado) 지형정보분석관이 추진한 대규모 사업의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2003년 미국 국립지리정보국은 한국 군사력 디지털 지도 작성을 추진하였고, 이 지도를 통해 북한의 국가적․정치적 경계선을 표시하려고 하였다. 라도 분석관은 지도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미국 국립지리정보국이 보유하고 있던 군사분계선이 중앙정보국의 축척 5백만 분의 1 도엽 상의 경계선을 디지털화한 복사본임을 인지하였다. 그리고 그가 추진했던 사업의 특성상 보다 축척이 큰 지도가 필요했으므로 대축척 지도를 활용하였고, 여러 종류의 지도 간 차이가 존재함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러한 차이를 바로잡기 위해 정전협정 원본 지도, 미국 국립지리정보국과 한국 육군 지형정보단(현재 한국 국방지형정보단의 전신)이 공동 제작한 최신화된 종이지도, 1953년 정전협정 관련 문헌 자료, 한국전쟁 참전 용사들의 증언 등을 참고하였다. 그 결과 정전협정 원본 지도상에 표시된 실제 지형과 일치하는 군사분계선이 제작되었다. 이는 단순하게 정전협정 원본 지도상의 군사분계선을 그대로 복사해서 옮긴 것이 아니라 물리적 지형과 일치하도록 군사분계선을 수정한 것이다. 현재 미국에서는 국립지리정보국을 비롯한 정보기관들이 이 선을 사용하고 있다. 2004년 이전 한국 육군 지형정보단에서 군사분계선 위치 파악 작업을 추진하면서 미국 국립지리정보국이 정의한 군사분계선을 부분적으로 적용하여 공동으로 제작한 군사분계선이 있으나 이 선과 일치하지 않으며, 비무장지대의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은 부분적으로 일치한다.


  넷째, 한국 국방지형정보단의 디지털 군사분계선이다. 한국 국방지형정보단의 군사분계선은 유엔사 군정위의 구글어스 상 군사분계선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것은 미국 국립지리정보국과 한국 국방지형정보단의 전신인 육군 지형정보단이 2004년 이전에 공동으로 작업한 결과물이다. 당시 미국 국립지리정보국은 군사분계선 위치 자료를 한국군에 제공하였으며, 한국 육군 지형정보단은 이를 부분적으로 적용하였다. 2014년 12월 유엔사 군정위가 한국 국방지형정보단을 방문하였을 때, 이 선의 사본을 받았다. 이것은 유엔사 군정위의 구글어스 상 군사분계선과는 일치하지만, 비무장지대의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은 일치하지 않으며, 이들이 제공한 북방 및 남방한계선은 주한미군과 미국 국립지리정보국 자료를 조합한 것으로 보였다.


  다섯째, 비무장지대의 GP와 OP에서 인식하고 있는 군사분계선이다. 비무장지대를 연하거나 그 안에 설치된 한국군의 GP와 OP에서 인식하고 있는 군사분계선이 별도로 있다. 이들이 인식하고 있는 군사분계선의 정확도는 각각 상이하다. 뚜렷한 물리적 지형지물이나 군사분계선 표식물이 관측되는 경우에는 군사분계선을 식별할 수 있다. 그러나 군사분계선 표식물이 관측되지 않는 경우 일부 GP와 OP에서는 지형지물을 기반으로 군사분계선을 파악하고 있다. 정확성 여부를 떠나서 현장의 한국군들은 북한군의 군사분계선 침범에 대응할 경우, 상기와 같은 인식 상의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한국군이 기준으로 사용하는 지형지물이 북한군이 사용하는 지형지물과 같지 않을 수 있어 상호 오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 선들은 정전협정 지도처럼 공인된 자료를 바탕으로 파악한 선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명확하고 정확하게 정의된 군사분계선이 부재함으로 인하여 2014년 후반기 비무장지대 내에서 침범·경고사격·교전 등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이 연속적으로 발생하였다. 일례로 2014년 10월, 한국군 제0보병사단 지역에서 북한군이 군사분계선을 넘어온 것으로 인식하여 한국군 GP에서 경고사격을 하고 북한군 민경초소에서 대응 사격을 함으로써 상호 교전한 사건이 발생하였었다. 사건 관련 유엔사 군정위 특별조사 과정에서 해당 GP에서 1개 이상의 군사분계선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고가초소에서 초병이 사용하는 군사분계선, 공용화기 요원이 사용하는 군사분계선, TOD(Thermal Observation Device: 열상감시장비) 운용실에서 사용하는 군사분계선이 모두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확한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북한군도 한국군과 유사한 상황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로 인해 군사분계선에 대한 통일된 인식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유엔사는 2015년 5월경에 이러한 인식 구축을 위해, 1953년 7월 한국 정전협정 체결 당시에 합의된 것처럼, 명확하게 정의된 군사분계선을 복구하는 임무를 명시한 개념계획을 발행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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