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용인주 Nov 16. 2018

오늘의예술, 수십년을 함께 보냈지만 여전히 서툴다.

아직 어린 큰딸과 고마운 우리 엄마아빠.

누구나, 라는 단어는 쓰지말자, 

누군가는 사람들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 안에 내가 있다.


내가 그마음이였다. 그래서 투썸플레이스의 티라미수 케잌을 들고 집에 왔다. 그 무거운 짐을 들고 삼성에서 판교까지 말이다. 우리집이 종점이라, 버스기사님은 짐이 많으니 천천히 내려요. 버스카드 먼저 찍고, 앞문으로 내려. 라고 말씀하셨다. 그냥 그 자체가 나에게는 사랑이였다. 그냥 한입이라도 행복하게 먹을 수 있는 그 순간을 떠올리며. 나는 사랑을 주고싶었던 걸까, 받고 싶었던 걸까.


"다녀왔습니다."

"우리 인주니? 일찍왔네. 밥은 먹었니?"


방에 모든 짐을 내려두고, 거실에 케익을 들고 등장한 순간 탄성이 들렸다 "아이고 그런걸 가져왔어" 순간 이러한 탄성이 나오고 괜히 서운해져버렸다. 그 찰나의 엄마의 등장은 기가막혔다. 


"인주 요즘 얼굴이 왜그래, 다 축처졌어 우울해. 너무 힘들고 피곤해. 지금도 너무 피곤하지? 금방이라도 쓰러져 잘 것 같은데"

그 이야기를 듣는 내내 케익 상자만 만지작 거렸다. 그말을 듣는데, 누구보다 엄마가 나를 제일 잘 알텐데.  '어쩌면 내가 지금 그런 상태인 걸까? 내가 나를 또 몰라주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그래도 지금 나는괜찮아. 라는 속성에 익숙해져 있는 나는 "아니야, 안그래"를 대답해버렸다. 한편으로는 진짜였다. 어제보다 스트레스를 덜 받는 날이였고, 몸은 조금 피곤했지만, 9시가 되어 집에 왔다는 그 생각이 나를 포근하게 만들어 주었다. "아니야. 케익때문에 속상해서 그래" 라고 이어 말했다. 난 괜찮다고 라는 말의 답변이였다. 하지만 이말은 하나의 불똥이 되어버렸다. 

엄마는 그렇게 작은말에 속상해야하는지, 저런 작은말도 못하냐는 말을 하신다. 그냥 난 서운해진다. 속상하다는 말도 못하니. 라는 말에 그냥 생각해서 가져왔는데 말이야. 한마디의 말 앞에 수만가지 단어가 들어가 있는 괄호가 생겨버린다. "나이가 몇인데" 라는 말에 속상해서 방문을 닫아버렸고 침대에 엎어졌다. 속상해서 울음이 터졌다. 



나의 안식처. 

그랬다. 나는 이 곳이 나의 안식처이기를 바랬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위로해만 줄 수 있는 그런 곳. 하지만 사람사는 곳이 항상 그럴 수 있겠는가. 내가 바라는 모습대로만 유지된다면 , 기계의 세상과 다를바 없으니까. 


이런 우리의 모습에 무엇의 부재일까, 부조합일까 라는 생각이 떠올라 생각한다.

내가 지금 비어있고 다시 채우고 싶은 그 부분이 무엇일까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아이이고 싶었고, 부모님은 좋은 엄마 아빠이고 싶었다.

하지만 어른처럼 속마음을 숨기지 못했고, 좋은이란 단어안에 서운함이 생겨버렸다.


너무 커버렸다. 그런데 아직 아이다.

집에와서는 엄마아빠의 사랑을 받으려고 애교를 부리기보단, 속상해서 집을 나가버리는 내가 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않아서 집을 찾기보단 양평의 어느좋은 펜션을 찾는다.


그렇지만, 여전히 속상하면 찡얼대고 사랑받고 싶어 퉁명스러워지기도 한다.

나라는 사람의 완성, 그러니까 마음이 단단하지 못헀을 수도,

요즘 그 누구에게도 털어내지 못함이 이런 나를 만든것일 수도 있겠다.

엄마아빠에게 독립되면서도 독립되지 않은 그 애매한 상태.

그래서 이 관계에서의 나의 자리를 찾아가봐야겠다. 내가 감수하고 먼저 이해해야하는 것. 그리고 아닌 것. 


대화의 언어가 부족했는지도 모른다. 

이미 하루중 다른 언어의 삶으로 다른 이들과 더 많이 살아가는 나에게는 우리만의 언어가 부족했는지도 모른다. 천진난만하게 그렇게 나를 드러낸 적이 최근에 있었을까.  아무생각없이 만나고, 대화나누고 울고 웃고 하는 친구가 필요한걸까.


이 글을 쓰면서 아빠에게 카톡이 왔다. 맞다. 우리 아빤 이렇게나 사랑이 많은 사람이란걸. 

다정한 사람이란걸, 항상 먼저 안아주며 밝은 웃음을 지어주던 사람이란걸..

나의 따뜻함은 우리 부모님으로 부터 시작되었다는걸. 알면서도 이런다.


바보같이도 반복한다. 

이렇게 상대로부터, 괜찮구나 혹은 괜찮게 살아가고 있구나 라는 인정과 확인을 바란다.

한걸음 떨어져 바라보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순간. 서툰 우리의 모습과 말 앞에 나의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글을 썼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아빠에게 답변을 보냈다. 


조금은 가벼워져도 되고, 그냥 사랑하고 표현해도 괜찮다.

함께이니 부딪힌것이고, 

함께이니 사랑을 나누고 싶은것이다.


가족, 나에게 가족은 이렇게나 깊다. 

단순하게 그냥,이란 단어로 넘어가는게 안되는걸 보니 말이다.





오늘의예술, 

수십년을 함께 보냈지만 여전히 서툴다. 아마 앞으로도 여전히 서툴겠지.

오늘의 일상성 덕분에 알게된 감사한 하루. 

그런 하루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의예술, 나를 느끼는 방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