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
회사일이건 딴짓이건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전 난 으레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을 때의 광경을 머리속에 그린다. 그게 일하는 재미요, 원동력이 되곤 했다. 남의 집 도서관도 기획 단계에서 머리 속에 그린 그림이 있었다.
카카오 직원들끼리 모여서 간단히 통성명을 한다. 주섬주섬 각자 보고 싶은 책을 찾아서 자리를 잡고 책에 빠져든다. 내게 커피를 주문한다. 가끔씩 창밖을 보며 멍때린다.
한데 시작부터 달랐다. 예약자 명단을 확인해 보니 카카오 직원이 아닌 분이 적잖았다. 사내 게시판 외에는 어디에도 오픈한 적이 없었기에 사내 직원 중 몇분이 지인들께 공유했구나 싶었다. 뭐 울회사 동료의 지인이니 괜찮겠지 싶어 예약을 승인했다.
사외에서 오신 손님들 덕에 공간의 스펙트럼이 넓어졌다. IT 종사자가 아닌 분들의 취향이 더해지니 책에 대한 선호가 다양해지고 그에 대한 이야기가 곁들여져서 공간이 풍성해졌다. 예상과 사뭇 달랐던 남의 집 도서관 오픈 첫날의 이야기다.
보고도 믿지기 않았다. 처음보는 남남이 생전 와본적 없는 연희동 구석에 위치한 남의 집에 모여 다같이 책을 읽고 있다니. 내가 초대했지만 되려 묻고 싶을 정도다.
왜 여기서 책을 읽고 있어요?
서가에 책이 워낙 많아서 손님들이 선택 장애를 일으키면 어쩌지 고민했는데, 기우였다. 다들 책장을 스윽 둘러보고는 쏙쏙 뽑아서 촥촥 읽어 내려간다. 어떤 분은 한놈만 판다며 책 한권에 푹 빠져 있고, 여러 책을 쌓아두고 발췌독하시는 분도 보인다. 근데 희안하게 아무도 만화책은 집지 않는다. 울 집이 만화책을 볼 상이 아닌가벼.
독서 이외의 행태도 등장했다. 배낭여행 때 촬영한 사진으로 엽서를 만들어 손님들께 선물했는데, 그걸 우리 회사 마케터 베로니카가 연필로 스케치를 한다. 보고 있던 개발자 로키가 본인도 스케치를 배워 보겠다며 펜을 들었다. 뿌듯했다. 주어진 콘텐츠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활용하는 유저를 바라보는 플랫폼 사업자의 마음이랄까? '마음대로 놀아요!'
손님 중 한분이 내 여행책을 보시더니 사뭇 놀라는 눈치다. "혹시 이 책 저자세요?" 내 책의 독자가 우연찮게 손님으로 오신거다. 출간된 지 10년이 다되어 가는 책을 기억해 주는 독자가 있다는 것에 놀랐고, 그 분은 저자를 만났다는 것에 반가워 하시고. 도서관 덕에 오래전 작가와 독자간 즉석 만남이 열렸다.
수의사로 일하시는 이 손님은 내 책에 영감을 받아 세계 여행을 다녀오시고 여행책도 두어권 내셨다고 했다. 세계여행 스터디 그룹도 운영하시면서 여행 관련 강연도 다니시고 거기서 지금의 아내분도 만났다고 했다. 그리고 그 아내분이 지금 남의 집 도서관에 함께 오셨다. 당시 여행책을 썼던 목적이 여행의 즐거움을 알리고 독려하는 거였는데 정말 내 책을 읽고 여행을 떠나고 그걸로 이후 인생에 적잖은 영향을 받으셨다는 분을 보니 신기했다. 리처드 도킨스이 쓴 '이기적 유전자'에 나오는 밈(MEME)이 정말 있구나 싶었다.
*밈(MEME): 유전자처럼 개체의 기억에 저장되거나 다른 개체의 기억으로 복제될 수 있는 비유전적 문화요소 또는 문화의 전달단위. 문화의 전달에도 유전자처럼 복제역할을 하는 중간 매개물이 필요한데 이 역할을 하는 정보의 단위·양식·유형·요소가 밈이다.
남의 집 프로젝트 밈(MEME)도 널리 퍼져 동네방네 서재며 주방, 거실 등등의 공간이 재밌는 기획으로 재탄생하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연희동 브라더스가 몸소 남의 집 프로젝트로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줘야겠다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져본다.
연희동 명소 중에 책을 보며 술을 마시는 '책바'가 있다. 위스키나 칵테일을 혼술하며 책을 보는 컨셉의 공간인데, 나는 매번 갈 때마다 책은 안보고 주인장님과 수다를 떨다 오곤 한다. 책바에서 영감을 받아 낮술도 책과 매칭이 될런지 테스트해 보고 싶었다. 인근 KEG STATION이란 테이크아웃 브루어리에서 떼온 IPA를 꺼내들고 손님들께 권했다. "맥주 한잔 하시죠."
원래 의도는 호스트가 손님의 자리에 맥주 한잔씩 놓아드리면 손님들은 그 자리에서 맥주를 홀짝홀짝 혼술하며 책을 음미하는 거였다. 근데 내가 맥주를 꺼내들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다들 거실 한가운데로 모여 바닥에 주저 앉았고 자연스레 술판이 벌어졌다. 예상 밖의 광경이였지만, 다들 이미 어느 정도 책들은 보셨을테니 쉬는 시간 느낌으로 다함께 지화자했다.
술이 들어가니 입이 심심했다. 시간도 벌써 오후 2시. 기왕 판이 벌어진거 점심까지 해결하자 싶어 다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다. 귀성을 준비하던 은재형도 배가 고프다며 합류했다. 은재형이 김치볶음밥을 하고 내가 짜파게티를 했다. 물론 만두도 빠지지 않았다.
시간상 곧 2회차가 시작될 예정였기에 새로 입장하신 손님들은 남의 집 도서관에 입장하자마자 책 대신 술판을 마주해야 했다. 도착 전에 미리 양해는 구했지만 적잖이 신경이 쓰였다. 조용히 책을 보는 분위기를 원하셨을텐데 낮술이라니. 근데 이분들, 즐기는 눈치다.
술과 밥이 들어가니 이야기가 술술술~ 오간다. 그렇게 1시간여가 흐르니 이제 다시 도서관 모드로 돌려야겠다 싶었다. 술과 이야기도 좋지만 오늘 이 공간의 목적이 독서라는 걸 간과하면 주최자인 나와 방문한 손님 모두에게 누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후다닥 밥상을 치우고 서재로 돌렸다. 분위기 재정비 차원에서 커피도 한잔씩 내려드렸다.
등따시고 배부르니 다시 책을 읽읍시다!
연희동 브라더스는 특히나 오후 채광이 예쁘다. 거실 깊숙히 들어온 빛이 이곳저곳에 부딪쳐 부서지면서 내뿜는 반짝임이 묘한 나른함을 더한다. 이곳에선 책을 읽지 않을 수 없다. 난 가끔 이 시간에 책을 읽다가 꾸벅꾸벅 졸기도 하는데 잠이 참 달다.
석양이 질 때면 또다른 느낌의 공간이 된다. 지평선에 걸린 태양이 보낸 햇살은 이미 그 생기를 잃고 겨우겨우 우리집 거실에 다다른다. 거실의 책들이 이내 그 석양빛을 머금어 버린다. 대신 전구색 조명이 그 빛을 발한다. 그렇게 거실에 퍼졌던 빛이 조명 근처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남의 집 도서관을 찾은 손님들께 이런 공간의 매력을 전하고 싶었다. 정신없이 책에 빠져 있다가 가끔 고개를 들었을 때 발견되는 주변 빛의 변화들. 차창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얼굴에 닿았을 때의 그 따뜻함.
주방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손님들의 표정을 보니 한결같이 평안해 보인다. 뿌듯하다. 그러다 문득 '내가 무얼 하고 있는거지?' 생각이 든다. 분명 시작은 설연휴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나의 안위였다. 그런데 내가 기획한 공간에 찾아와 책에 빠져서 독서하는 분들을 보니 모종의 책임감이 일었다. '색다른 독서 경험을 드리고 싶다.' 같이 시간을 보내줄 이들을 찾았는데, 이젠 그들이 책에 집중할 수 있게 돌보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 면에서 내일은 손님들이 좀더 책에 집중할 수 있게 공간을 운영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늘은 예상과 다르게 술판이 벌어지고, 함께 밥을 먹고,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 곁들여졌지만, 내일은 정말 오롯이 책에 몰입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만들어 보고 싶다. 이렇게 남의 집 도서관 첫날 영업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