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루덴스협동조합 활동을 할 때 조합원 몇과 '문학으로 한 달 살아보기'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기회가 있었다. 당시 오백만 원의 지원을 받아 책을 구입해 같이 읽고 토론하거나 문학관(우리는 전주의 최명희 문학관을 다녀왔다)을 둘러보는 등의 책과 관련된 활동을 팀으로 하는 거였는데 그때 1박 2일 북스테이 장소가 파주 헤이리 '모티프원'이었다.
'모티프원'은 계단 사이 공간이 있는 구조도 독특했고 공간마다 강렬했던 색(노랑과 파랑)의 문도 탄성을 자아냈다. 하긴 그뿐인가. 창 아래 길게 달려있는 원목 책상과 보태고 뺄 것 없이 한 두 가지 장식뿐이던 단아한 공간. 책으로 가득 찼던 서재. 모닝커피를 위한 다양한 크기, 다양한 색의 머그잔(취향대로 고를 수 있는) 등등
그중에 가장 인상적인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모티프원 쥔장 이안수 헤이리 촌장님 부부다. 특히 촌장님은 위에 언급한 모든 것을 제칠만큼 범상치 않은 외모에 내공을 짐작하기 어려운, 눈빛이 온전히 살아있는 분이었는데 헤이리를 다녀온 후 페친을 맺고 소식을 접하다 촌장님 안 주인이 마련한 도봉산 자락의 '모티프원서울'에서 1박을 하며 안주인과 독대한 행운도 있었다.
최근 이안수 촌장님이 모티프원 은퇴라는 글을 연거푸 언급하며 배우인 큰딸 나리씨가 운영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럴 수 있지. 그 보다 놀라웠던(부러웠던?) 글은
- 아내는 제주에 아들은 영국에 둘째 딸은 이화동 나는 아내 집에 모티프원은 나래가.. 등등으로 각자 자신의 공간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필요에 따라 헤쳐 모이는 '느슨한 연대'에 대한 것이었다.
인간으로 태어나 한 생을 살며 연결되었으나 구속되진 않은, 서로 훌훌 자유롭다가 확실한 연대가 필요할 땐 달려와 하나로 뭉치는 삶. 내가 꿈꾸던 이상적인 삶의 모델이 실제 있었구나 하는 놀라움. 사실 이런 삶을 현실로 이루려면 가족의 이해와 동의가 꼭 필요한 일인데 촌장님 가족은 너무나 환한 웃음(사진에서)으로 '느슨한 연대'에 기꺼이 동참 중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은퇴 후 촌장님은 그동안 못 가본 곳으로 여행을 하고 때때로 돌아와 사람들을 만나고 등등 알찬 시간들이 예정되어 있다고 글에 썼다. 한 문장 한 문장 따라 읽으면서 닮고 싶은 삶이라고 생각했는데 특히 누군가의 댓글에 남긴 이 글은 오래 생각을 멈추게 했다.
-서로의 관계에 바람길을 허용하면 선도가 유지되면서도 그리움의 관계로 지속될 수 있다- 이안수(모티프원 대표, 파주 헤이리 촌장님)
서로의 관계에 바람길이라니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바람처럼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들을 하도록 허용(도와주는)하는 관계.. 무조건적인 신뢰가 바탕에 깔려야 가능한 일이고 사실 신뢰가 있어도 쉽지 않은 일이다. 가족의 '느슨한 연대' 라니.. 보통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사진은 모티프원과 최명희 문학관. 프로그램을 함께한 샘들. 마스크를 안 써도 되었던 그때의 나를 보니 참 세월이 무섭다는 걸 실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