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line(개요): 삼류대 출신인 '미운 아기 오리' 조백이 세계적 기업인 리오제철에 입사하여 많은 오리들에게 갖은 고난을 당하여도 이에 굴하지 않고 견디다가 우리나라의 운명을 책임지는 외교사절(백조)로 변신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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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 사무실 출입문 왼쪽 벽에 회색 바탕 면에 검은색으로 ‘외자부’라는 한글 밑에 ‘Foreign Procurement Dept.’ 라 적힌 부서명 표시판이 붙어있다. 사무실에 들어서니 널찍한 사무실에 40여 명의 직원들이 각자의 일들에 열중하고 있다. 남자 직원들은 옅은 베이지색 상의 사무복을 입고 있으며 띄엄띄엄 보이는 여자 직원들은 회색의 치마와 소매에 회색 줄이 길게 쳐있는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있다. 사무실 맨 안에는 가슴높이의 칸막이로 칸을 막고 사람 2~3명이 지나갈 수 있는 통로는 칸막이의 왼쪽에 있다. 칸막이 안쪽에는 등받이가 사람의 머리 위로 올라온 가죽 의자와 그 앞에는 그에 걸맞게 널찍하고 고급스러운 책상과 그 책상에 맞대어 놓은 직사각형의 기다란 회의용 탁자가 있으며 탁자의 좌우에 접이식 철제 의자가 3개씩 배치되어있다. 그 앞에는 1인용 소파가 바깥쪽을 향하여 놓여있고 그 양편에 3인용 소파가 마주 보고 있으며 가운데에는 탁자가 놓여있다. 외자부장실이다. 사무실 전체의 1/5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부장실 입구의 오른편으로 2m 떨어진 곳에 부장의 비서이자 타이피스트의 자리가 있다. 그 비서를 기준으로 사무실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외자과장, 외자부 차장, 선강기재과장, 압연기재과장의 간부들이 사무실 왼편을 바라보며 자리하고 있다. 외자부 차장외 각 과장 앞자리에는 소속 직원들의 자리가 8~9개가 역ㄷ자 방향으로 좌석이 배치되어있으며 가운데에는 둥그런 탁자와 의자 2~4개 배치되어 회의가 필요하면 직원들이 모여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어있다. 입구 오른편에는 1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회의실이 마련되어있다. 얼핏 보아서는 원칙 없이 자리가 배치된 것으로 보이지만, 신경을 쓰고 보면 상당히 효율적인 자리 배치임을 알 수 있다.
오늘은 월요일이다. 백은 오늘따라 유난히 바쁘다. 오후에 독일의 설비공급사와 설비구매계약 협상이 있는 날이다. 호리호리한 백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모습은 사냥감을 향해 달려가는 날렵한 사냥개와 같은 모습이다.
“미스 조, 제가 부탁한 것 타이핑 다 하셨어요?”
백은 복사실에서 내려오자마자 오른손에 하얀 서류를 가득 들고서 미스 조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물어본다. 나이가 거의 같은 미스 조는 무척 조심스럽다.
“예, 끝내서 책상 위에 놓았어요.”
미스 조는 얌전하게 대답한다.
“아, 감사합니다.”
고마움을 표하며 자리에 돌아오니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부탁한 ‘계약서(안) 검토의견’ 15장이 깨끗하게 타이핑되어 책상에 얌전하게 놓여있다. 원본과 타이핑된 서류를 비교하여 검토 후 수정할 사항을 연필로 표시 후, “미스 조! 연필로 표시된 사항들 수정해주세요.” 정중하게 부탁한다. 백은 복사해온 서류와 책상 위에 놓여있던 서류와 대조하면서 순서에 맞게 정리한다. 수정하여온 서류를 가져온 미스 조에 고맙다는 인사를 윙크로 대신하니, 미스 조는 수줍게 얼굴을 붉힌다. 수정된 서류에 표시한 연필 자국을 지운 후 기존의 타이핑된 서류와 합친 후 그 서류를 들고 다시 복사실로 뛰어간다. 오늘 준비해야 할 자료는 공급사의 협상대상자, 회사의 현장부서 직원, 자기를 위하여 세 부씩을 준비해야 한다.
복사실에서 돌아온 백은 복사해온 서류를 세 부씩 정리하여 스테이플러(stapler)로 철한 후, 급히 전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누른다.
“안국화재이죠? 양길봉 대리 있습니까? 아 고맙습니다. 길봉아 나야. 지난주에 부탁하였던 설비 조립보험과 해상보험의 ITE(Inland Transportation Extension: 내륙운송연장조건) 관련된 자료 준비됐니? 엉 고마워. 지금 바로 팩스로 보내줘. 팩스 번호 알지? 땡큐. 내가 나중에 거기서 소주 한잔 살게.”
다시 전화 다이얼을 누른다.
“최달상 차장님 자리에 안 계세요? 그럼 박근배 대리님 부탁합니다. 아 박 대리님 독일에서 정기선이 가는 항구는 함부르크 외에 어느 항이 있나요? 다른 곳은 환선료가 발생합니까? 아니 이 친구들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을 이용하는 게 자기들은 편하다고 하는데 그러면 어떠한 비용이 발생합니까? 제 생각에는 FOB 조건으로 하면 똑같을 것 같은데 선사 및 수입자 입장에서는 별 지장 없습니까? 아, 예 조사하셔서 바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오후 2시부터 공급사와 미팅이 있으니 그전에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열정적으로 일을 하는 백의 모습을 보는 선강기재과의 신기출 대리는 아니꼽다는 인상을 쓰면서 옆에 있는 직원에게 말을 한다.
“백 저 친구 와 저리 설치고 다니노. 이 사무실에서 지 혼자 일 다 하는 것 같네. 김기리씨, 저 친구 자네 동기라며? 절마 어디 대학 나왔노?”
2
1981년. 남산에 위치한 국립중앙도서관이다. 육영수 여사가 설립한 어린이회관 자리를 1974년 개조하여 만든 도서관으로서 넓고 쾌적한 학습 공간 및 휴게실이 마련되어있다. 특히 냉난방 장치가 잘되어 있어 요즈음과 같이 한창 더욱 여름철에는 자기 학교의 도서관 대신 이 도서관을 이용하는 학생들이 많다. 도서관 입장 시간인 6시보다 1시간여 전부터 자기의 입장 순번을 보장받기 위하여 도착 순서대로 도서관 입구에서부터 놓아둔 가방의 줄이 길게 늘어져 있다. 남산의 팔각정으로 가는 남산 둘레길 중간지점에 도서관의 전경이 보이는 지점이 있는데 이곳에서 가방이 줄지어져 있는 모습을 보면 구부러진 지렁이의 모습이며, 6시가 되어 자기의 가방을 들고 도서관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같은 장소에서 보면 커다란 지렁이가 도서관의 입구인 굴을 향하여 매우 천천히 움직이는 듯이 보인다.
해가 하늘 중간에 걸쳐서 대지를 향해 빛을 내리쬐고 있는 8월 초 오후 2시경이다. 도서관 입구에서 왼편으로 2~3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커다란 느티나무의 그늘 밑 벤치에 3명의 젊은이가 담배를 피우고 있다. 백은 서서 담배를 연신 빨아대면서 앞 벤치에 앉아있는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있다.
“야, 좋은 대학 다니는 친구들은 대부분 취직되어 9월부터 회사에 출근한다는데, 우린 이게 무슨 꼴이냐?”
“야 그 친구들은 고등학교 시절에 공부 열심히 한 덕을 보는 거야. 너도 고등학교 때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갔으면 지금처럼 고생 안 하고 좋은 직장 잡았을 것 아냐?”
양길봉은 백의 배알을 거슬리려는 듯이 이죽거린다.
“아니, 내 친구 중 하나는 SKY도 아닌데 H사, L사, S사 세 군데에서 서로 오라고 러브콜 한다고 나에게 자랑하는데 참 우리는 뭐야?”
얌전한 인상의 김원국이가 담배 연기를 코로 뱉어내면서 말한다.
“아마 그 친구는 2류대는 되니까 그런 호강을 누리지 우리 같은 3류대 출신은 시험으로 뽑는 공채 회사에 승부수를 둘 수밖에 없어. 일찌감치 입사 시험을 준비한 백 너에게는 공채가 유리하니 그러한 회사를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것이 좋을 거야. 참 다음 달 첫 주 화요일에 올해 처음으로 SS 그룹사에서 입사 시험을 국민대에서 본다는데 응시원서를 가지러 가자. 오는 길에 같이 시경 뒤 두루치기 집에서 소주 한잔하자.”
리더 격인 길봉이의 제안에 2명의 젊은이는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은 담배를 비벼 끄고서 나무의 밑둥치 한쪽 담배꽁초가 쌓인 곳에 던진 후 도서관으로 향한다.
SS 사의 필기시험에는 백만 합격하였다. SS 사의 면접 날은 우리나라의 굴지 그룹인 S, H, D, L 등이 입사 시험을 한꺼번에 보는 날이다. 응시자 중 여러 회사에 합격하여 입사하지 않는 합격자들이 많이 발생하여 생기는 인원 충원계획의 어려움을 피하려는 대기업의 전략이다.
“백아, 면접 잘 봐라. 일단 면접관이 너에게 무엇을 물어보더라도 그 사람의 눈을 쳐다보고서 대답해라. 아는 것에 대하여 질문하면 자신에 찬 큰소리로 대답하고 설령 모르는 것도 주눅 들지 말고 모른다고 큰 소리로 말해야 한다.”
무슨 일이든 자신감 있게 대하는 길봉은 백에게 어린 동생에게 훈계하듯 한다.
“그래, 고마워. 최선을 다할게, 나 혼자서 면접 가려니 미안하다. 참 내가 공부하던 무역실무 참고서인데 이것 한 번 보고가. 대기업에서 출제율이 가장 높은 참고서야.”
백은 길봉에게 자기가 공부하던 실무참고서를 주고 헤어졌다.
“길봉아 축하해. 아~ 나도 면접 가지 말고 너희들과 같이 시험 보러 갔어야 했는데…. 원국은 호주에 있는 누나에게 가버리고 나 혼자 도서관 지키고 있으려니 참 거시기하다.”
홀로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 백을 길봉이가 위로하러 왔다. 둘이서 시경 뒤 두루치기 집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다.
“힘내, 이 친구야. 넌 입사 준비를 충분히 해 왔으니 남아있는 공채 예정인 회사의 기출문제를 풀면서 준비하고 있어. 내가 다음 주에 시간을 내서 올 테니 그때 다시 상의하자. 참 시험 보기 전에 네가 나에게 빌려주었던 이 실무참고서에서 문제가 70% 이상 나와서 그 덕을 내가 보았어. 다시 가져가서 공부해.”
“백아, 리오제철 어떠니? 국영회사이니 학벌 많이 따지지 않을 것 같아. 보름 후에 시험 보니까 그동안 기출문제 풀어보면서 준비해. 단점은 본사가 지방에 이어서 수도권과 멀리 떨어져서 있는 것인데,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많이 몰려들 것 같지는 않은데….”
도서관의 7층에 있는 자료실에 가서 신문의 하단에 게재되어있는 신입사원을 모집하는 광고를 점검하면서 길봉이가 백에게 말한다.
“야 내 처지에 더운밥 찬밥 가리게 되었니. 응시원서를 가지러 가자. 같이 가줘. 내가 한잔 살게.”
리오제철의 면접장이다. 숱이 많으며 군데군데 흰머리가 나 있으며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중후한 인상의 사람이 면접 위원장이다. 푹신한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있으며 양옆의 두 명의 면접관은 각자 앞에 직사각형의 탁자를 두고 목제 의자에 앉아있다.
그 두 명의 면접관은 사적인 질문 및 업무 지식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왼편의 머리숱이 적고 깡마른 면접관은 “가족이 많은데 몇 남매입니까?” 하는 가벼운 질문을 던진다.
“6남 2녀로써 저는 다섯째입니다. 부모님께서 딸을 보시려다 자식들을 많이 보셨다고 합니다.”라 일단은 큰소리로 대답하였다. 당연히 알고 있었고 흔히 물어오는 질문이었기에.
후덕한 인상의 오른편의 면접관은, “반덤핑 관세가 무엇이며 이에 대한 우리나라 즉 수출국이 취할 방안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물어보니 백은 “반덤핑 관세는 영어로는 Anti-dumping tax라 하며 이의 목적은 수입국의 입장에서 자기 나라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보호하기 위하여 수입되는 저가의 제품에 부과하는 보복성 세금이며, 이에 대한 수출국이 취할 방안은…” 더듬더듬하면서 끝까지 말을 끝내지 못한다.
“앞에 있는 카드를 하나 뽑아서 읽어보고 번역해보세요.”
면접 위원장의 지시에 백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기가 앉은자리의 오른편에 위치한 조그만 탁자 위의 직사각형 상자에 담겨있는 20장가량의 카드 중 하나를 뽑는다. 내용을 보니 한강에 대한 내용을 소개하는 간단한 영어 지문이다.
“One of Seoul’s major landmarks is the Han River that flows through the city. Much larger than the Potomac in Washington D.C. and the Seine in Paris, the Han has long been an integral part of Korean’s lives as the main source of water and outdoor living environment including leisure. (서울을 관통하는 한강은 서울의 중요한 이정표 중 하나이다. 워싱턴의 포토맥강과 파리의 세느강보다 훨씬 큰 한강은 주요한 수자원 및 오락을 포함한 야외생활환경의 주요 공급원으로서 한국인의 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하여오고 있다.)”
자신 있게 영어 지문을 읽은 후 번역을 하려다 보니 말이 딱 막힌다. “서울 중심지를 흐르는 한강은... 서울의 중요한 이정표 중 하나이다. 워싱턴의 포.. 토맥강 및 파리의 세느강 보다 훨씬 큰 한강은......” 어휴 이것도 끝까지 해석이 안 된다. 머릿속에는 빙빙 도는데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어휴 미치겠다.’ 마른침을 삼키는 백에게 면접 위원장은 “됐네. 이제 가 봐요” 하면서 “사람은 진솔하게 생겼네.”하며 혼자 말하듯 한다. 면접장을 나오는데 “툭”하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 나는 곳을 쳐다보니 왼편에서 사적인 질문을 던졌던 면접관은 면접 위원장의 면접 종료 신호와 함께 백의 서류를 발밑으로 던지는 소리였다. 밑을 보니 많은 서류가 질서 없이 쌓여있다. ‘아, 이번에도 종 쳤구나.’ 고개를 숙이면서 면접장을 빠져나온 백은 버스정류장 옆에 위치한 공중전화기로 가서 다이얼을 돌린다. “야, 길봉아, 이번에도 종 쳤다. 나와라. 소주 한잔하자.”
한 달 후 백의 집으로 리오제철로부터 합격통지서와 입사 안내서가 도착하였다.
3
1982년. 리오제철의 독신자 숙소이다. 휴게실에 백과 백의 동기생인 관리실의 최치호가 마주 앉아있다. 탁자 위에는 캔 맥주 6 통과 쥐포와 땅콩이 있다. 시계는 자정이 가까워져 있다.
“치호야, 축하해. 그래도 실력 있고 힘 있는 친구들은 다 올라가네. 정탁이, 기리 그리고 네가 세 번째네. 하여튼 축하해.”
둘은 캔으로 건배를 한다.
“백, 너는 안 올라갈 거야?”
하얀 얼굴에 안경을 쓴 눈이 날카롭지만, 전체적인 인상이 온유해 보이는 치호가 안타깝다는 눈으로 백을 쳐다보면서 물어본다.
“야, 올라가고 싶은 맘이야 굴뚝같지만 내가 너희들처럼 선배가 있냐, 빽이 있냐. 어휴 답답해 죽겠다. 1달 전 일요일에 과장님 집에 선물 잔뜩 사 들고 갔는데, 간 시간에 축구 중계를 하는 거야. 우리 회사하고 수원의 삼성하고 붙었는데 우리 과장님이 축구 광팬이잖아. 전반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들어가서, 자연히 둘이서 축구 중계를 보기 시작했는데 중계 시간에 과장님은 말 한마디도 안 하시는 거야. 나도 화면은 보고 있는데 누가 이기고 있는지 모르겠더라고. 내 마음은 서울에 올려보내 달라고 부탁을 해야겠는데 경기 내용은 안 들어오고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그 생각만 했었어. 게임이 끝났는데 우리가 이겼는지 졌는지는 모르겠고 이야기할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 너무 기쁘더라. 게임이 끝나자 과장님은 그때야 나를 보면서, ‘백 너 와 왔노?’ 하더라. 그래서 ‘과장님, 저 서울에 있는 부서에 보내 주십시오.’ 했더니 가만히 나를 보더니, ‘넌 안돼.’ 하시는 거야. 나는 울상이 되어, ‘어휴, 저 혼자 이곳에서 생활하는데 너무 힘듭니다.’ 하였더니, ‘그럼 너 우리 과에 있는 미스 박과 결혼해서 이곳에서 생활해.’ 하시는 거야. 나는 ‘과장님, 미스 박과 저는 나이가 8살이나 차이가 나고 저는 서울에서 어머님이 보아둔 아가씨가 있습니다.’ 하고 공갈쳤어.”
“그러니까 뭐래?”
치호는 재미있다는 듯이 호기심에 어린 눈으로 쳐다본다.
“지금 당장은 안 되고 내년에 신입사원 오면 내가 교육을 잘하는지 그때 봐 가면서 생각하자는데, 어휴 그것이 제대로 될지 모르겠다. 과장님이 그때까지 계시리란 보장도 없고, 인사 부서에서 신입사원을 보내줄지도 모르겠고. 참 답답하다. 너처럼 일류대 나왔으면 다른 곳 시험이라도 보겠는데…”
“백아, 희망을 가져. 너의 과장님이 다른 곳으로 가실 경우에는 너의 문제를 차기 오시는 과장님에게 인계하도록 부탁을 해. 아니면 미리 인사부서에 면담해서 너를 향후 서울 부서 대상 인원으로 분류를 하도록 해봐. 인사과에 있는 선배에게 너의 부탁을 하고 갈게.”
“그래, 고맙다. 회사에서도 동기가 힘이 되는구나.”
백의 사무실이다. 60여 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는 매우 넓은 사무실이다. 황색 작업복을 입고 황색 워커를 신은 직원들은 매우 바삐 움직이고 있다. 전화를 받는 사람, 회의실에서 업체와 면담을 하는 직원, 열심히 타이프를 치고 있는 여직원 등. 백이 근무하는 운송출하부 총괄과는 사무실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맨 뒤에 과장의 자리가 위치하고 그 앞에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는 여유 공간을 두고 계장 3명이 자리하고 있으며 또 그 앞에는 바로 세 명의 자리를 배치하였다. 그 앞에는 부서의 종합적인 행정업무를 보는 서무 2명이 앉아있으며 맨 앞에는 타이피스트 아가씨가 오른쪽으로 돌아서서 타이프를 치게 되어있어 자리에 앉은 직원들은 타이피스트가 타이프를 치는 동안은 오른쪽 옆얼굴을 볼 수 있으며, 타이프를 치지 않는 동안은 뒷모습을 볼 수 있다.
계장들 자리 앞에 있는 세 개의 책상 좌석에 앉아있는 세 명의 신입사원들이 지난달 한 달 동안 제철소에서 행해진 철강 제품과 원료의 운송과 관련된 작업에 대한 정산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백은 가운데 자리에서 계산기를 두들기면서 철강 제품 수출 하역비에 대한 정산작업을 하고 있다. 부두에서 철강제품을 수출하기 위하여 선박에 안착시키는 하역작업을 현장부서인 해운과가 확인한 작업내용과 하역업체가 작성한 하역비 청구서를 대조하고 계약단가가 정확히 적용되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다. 업체의 한 달 동안 작업한 물량에 대한 대가를 지급하기 위한 작업이기에 서류를 접수하면 지체 없이 확인하여 관리실 회계과로 넘겨야 한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과장, 부장으로부터 엄청난 질책을 받기 때문에 온 신경을 계산기를 두드리는 손끝과 서류에 집중해야 한다.
과장의 자리에서는 말쑥한 신사복을 입은 두 사람이 옆 테이블에 앉아서 과장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마 정산을 빨리해달라는 부탁이나 다른 부탁 거리가 있어서 온 업체 사람들이라 생각하고 백은 열심히 정산작업을 하고 있다.
“어이, 백! 잠깐만 이리 온나!”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로 과장은 백을 부른다.
“이 친구가 해상운송 담당자입니다. 백아, 이분들은 서울 외자부에서 오신 심 차장님과 변 과장님 이시다.”
백은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를 한 후 앞좌석의 빈자리에서 의자를 끌어다가 손님들 옆에 앉으면서 리오제철의 회사 이름과 마크가 찍힌 수첩을 펼친다.
외자부 손님들의 말에 의하면 광양만에 건설 예정인 종합제철소 1기 코크스 공장의 설비공급사인 독일의 Otto 사와 설비의 공급조건을 협의 중인데 운송조건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제껏 공급사의 설비가격에 해상운임과 보험료를 포함한 가격인 CIF 조건으로 구매하였는데, 이제는 우리나라도 국제적인 선박회사도 육성되었고, 국내 보험회사 중 몇 개의 회사는 국제적으로 신용도가 인정되었기에 국내업체 육성 차원에서 운송조건을 변경해야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내 선박업체와 보험사를 육성시킬 수 있는 운송조건을 조사하여 달라고 한다.
“어이, 백아. 너 지금 하는 정산작업 바쁘니까 그것 퍼뜩 끝내고 바로 조사하여 드리도록 해. 언제쯤 되겠노?”
“예, 제가 밤새워 정산작업 끝내고 내일 아침에 시작하면 오후에 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빨리 되겠노?”
과장은 백의 편을 들어주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의 힘을 과시하려는 것인지 미소를 띠면서 이야기한다.
“저희가 이번 주는 이곳에서 공급사들과 협상할 터이니 내일 오후 늦게 주셔도 됩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금테 안경을 쓴 심 차장은 웃으면서 말한다.
백은 자리에 돌아가자마자 정산작업을 최대한 속도를 낸다.
새벽 3시다. 머리가 몽롱하다. 같이 야간작업을 하던 직원들은 다 퇴근하여 넓은 사무실에 백 홀로 남아있다. 백은 서랍을 열어 취업 준비 시절에 공부하였던 무역실무 책을 꺼낸다. 목차에서 ‘운송조건’을 찾은 후 책장을 넘긴다.
독신자 숙소에서 샤워를 마친 후 일찍 사무실에 나타난 백은 새벽에 작성하였던 “운송조건 비교”란 제목으로 연필로 작성한 자료 3장을 미스 박이 사무실에 나타나자마자 바나나 우유와 함께 건넨다.
“미스 박, 이것 엄청 바쁜 서류인데, 미스 박이 해 줄 수 있는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쳐주세요.”
귀여운 단발머리와 오동통한 빨강 볼을 가진 미스 박은, “에잉, 항상 바쁘다고 하세요. 그런데 오늘은 진짜 바쁜 모양이네요. 뇌물까지 가져오신 것 보면.” 싱긋 웃으면서 타이프에 종이를 낀다.
백은 작성된 서류를 결재서류에 끼고서 1층의 외자부 주재사무실로 가서 주재 직원에게 외자부 변 과장과 심 차장의 소재를 물으니 ‘주택단지에 있는 Otto사 숙소의 회의실에서 회의한다.’고 한다. 백은 택시를 타고 주택단지의 Otto사 숙소로 가니 회의는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 안내 여직원에게 물어보니 회의는 10시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시계를 보니 9시가 채 안 되었다. 근방에서 서성거리다 다시 그 자리로 가니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니 멀리서 두 신사가 걸어온다. 백은 성큼성큼 뛰어가 허리를 90도로 꺾으면서 인사를 한다. 그들은 깜짝 놀라면서, “아니 웬일이세요?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변 과장이 말한다.
“주재사무소에 가니 여기에서 회의하신다고 하여 왔습니다. 제가 새벽에 자료를 작성해서 가져왔습니다. 급하게 필요하실 것 같아서요.” 하니, “아 그래요. 하긴 오늘부터 운송조건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까 했지만, 그쪽이 바쁠 것 같아 내일로 미뤘는데…,하여튼 고마워요. 같이 회의에 참석해서 공급사에 설명합시다.” 심 차장은 기분 좋다는 듯이 말한다.
“앗, 저는 이제껏 외국 사람들하고 얘기해본 적이 없어서요. 그냥 이 서류만 전해드리려고 왔는데요.”
“하하하, 괜찮아요. 같이 하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요. 앞으로 큰일 할 사람이 이런 것 두려워하면 안 되지. 하하하.” 변 과장의 호의 어린 말에 힘을 얻은 백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두 사람을 따라 회의실에 들어선다.
4
1984년. 서울 외자부 사무실이다.
“나 변인데, 내가 전에 말한 그 백이란 친구 빨리 올려 보내 줄 수 없나? 엉 우리 지금 설비계약 건들이 엄청나게 밀려오는 바람에 직원들 퇴근을 제대로 못 해요. 토욜 일요일도 없어요. 아니 뻥이 아니라니까. 그 친구 되도록 빨리 부탁해. 아 알았어. 서울 오면 한잔 살 테니 부탁해.”
변 과장은 인사과에 있는 동기인 인사계장과의 전화 통화를 마친 후 오른편에 위치한 심 차장 자리에 가서 말한다. “아마, 백 그 친구 다음 달에는 명령 날 것 같은데요.”
“그래, 잘 데려와. 다른 데에서 채가기 전에.”
장소는 낮에는 주차장으로 사용하다가 밤에는 차를 다 뺀 후에 파란 플라스틱으로 만든 탁자에 같은 재질과 색의 팔걸이와 등받이가 있는 의자를 네 개씩 배치한 야외 술집이다. 5~60개의 탁자를 가로로 10개 세로로 5~6개씩 배치되어있다. 백과 치호는 넓은 야외 주점의 중간쯤에 맥주 3병과 골뱅이 안주를 시켜놓고 앉아있다.
“아~ 시발, 이번에도 진급 못 하고 정말 미치겠구나. 기리, 정탁, 너는 다 진급하고 나만 이 모양이니 참 못 해 먹겠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새로 온 과장은 이쁜 자기 후배만 챙기고 미운 오리 새끼인 나는 눈에 안 차니…,”
“야, 그래도 너는 회사에서 정예 멤버들이 모인 외자부 외자과 멤버잖아. 회장님도 사무실 순시하실 때 외자과는 꼭 찾아서 격려해 주신다던데…,”
“어휴 그래도 외자과 평직원보다는 일반부서 계장이 낫지. 어휴 부모님은 계속 선보라고 하시는데, 평직원보다 계장이라고 하면 좀 있어 보이잖아. 흐흐흐.”
백은 앞에 놓인 맥주를 벌컥벌컥 다 마시자 치호는 맥주병을 들어 백의 빈 잔에 채워주면서 측은한 눈으로 백을 쳐다본다.
외근 후 사무실에 들어오니 미스 조가 , “미스터 조, 청와대경비실이라고 하는 곳에서 전화가 왔어요. 전화 부탁한다고 하던데요.”라 하자, 외자과 직원들이 다들 백을 쳐다본다. “아니 청와대 빽이 있었네, 우리 백에게.” 영국 Oxford 출신으로서 권력에 많은 반감이 있는 심계장이 아니꼽다는 듯이 내뱉는다.
백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군대 후배가 청와대 경비실 졸병으로 들어간 지 2~3개월 되는데 이 새끼 되게 생색내요.” 하면서 전화기를 든다.
“어휴 선배님 한 번만 봐주세요. 에드워드 상원의원 이 사람 우리나라에 엄청난 영향력을 지니고 있데요. 이번에 방한하면서 자기 아들을 데려왔는데 자기는 귀국하면서 이 친구를 할아버지가 참전한 한국에 일주일간 체류시키면서 인생 공부를 시키려 한대요. 니기럴 인생 공부 시키려면 지네 나라에서 시키지 왜 한국이냐고요. 경호실장님은 이 친구의 경호 겸 동반자로서 제일 어리고 대학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싱싱한 내가 제일 어울린다고 딱 찍었어요. 하지만 형님 제가 다른 것은 다 잘해도 영어만은 안 되거든요. 형님이 회사에서 휴가를 내어서 저랑 같이 이 에드워드 2세 이 친구랑 일주일만 같이 지내줘요.”
각자 1,000cc의 생맥주를 앞에 두고 가운데는 골뱅이, 대구포, 길게 썬 파를 식초와 고추장에 버무린 안주를 두고서 김호경은 열변을 토한다.
“야, 난 업무적인 영어는 서로가 공감대가 형성되기에 통하여도 일반적인 영어 특히 젊은 놈들이 지껄이는 영어는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아. 내가 어떻게 그런 젊은 애들하고 놀 수가 있겠어. 그리고 난 연차 월차 다 써버려서 휴가를 더는 받을 수가 없어. 회사에서 일주일의 휴가 내기가 쉬운 줄 아니?”
내뱉고서 백은 답답하다는 듯이 앞에 놓인 반쯤 남아있던 생맥주를 벌컥벌컥 마신 후 빈 잔을 탁자에 탁 내려놓는다.
“선배님의 휴가 문제는 경호실 선배에게 부탁해서 풀어 볼 테니 선배님 이번 한 번만 부탁해요.”
에드워드 2세의 첫인상은 곱게 자란 미국의 상류 집 아들답다. 밝은 금발에 가느다란 몸매를 가진 그의 피부는 밀가루처럼 희고, 키는 백보다 한 뼘 이상 크다. 날렵한 코에 걸친 도수 높은 안경 속에는 장난기와 호기심이 가득 찬 엷은 파란색의 눈이 반짝이고 있다. 현재는 버클리대에서 경영을 전공하고 있는데 내년에는 세계 제일인 예일 로스쿨(Yale Law School)과 미국 관리들의 양성소인 하버드의 케네디 스쿨(Kennedy School)을 동시에 다니면서 공부할 인재라고 한다.
백은 자신의 소개를 한다.
“My name is Baeg Jo. Jo is my family name, so you may call me Baeg. (내 이름은 조백입니다. 조는 나의 성이니, 나를 백이라 부르세요.)”
목소리에 무게를 주면서 위엄 있게 말한다.
“Nice to meet you, Bae. My name is King Edward Second. My father is King Edward. So he named me King Edward Second. But I don’t like it. (반갑습니다, 배. 나의 이름은 킹 에드워드 2세입니다. 아버지가 킹 에드워드여서 나의 이름을 킹 에드워드 2세라 했답니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이름이 싫어요.)”
약간 하이톤 음색인 에드워드의 목소리에 백은 ‘생긴 대로 목소리가 나오네. 하지만 이 친구 생긴 것같이 순한 놈은 아니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은 “Hey, my name is not Bae, but Baeg. (이봐, 내 이름은 백이지 배가 아니에요)” 하였다 하지만 에드워드 2세는 백과 배를 구분하여 발음하기를 귀찮아하였다.
“Bae is easier to call than Baeg, so I’ll call you Bae. No problem? (배가 백보다 부르기 편하니까 배라고 부를게요. 괜찮죠?)”라는 말에 백은 화가 나서 호경에게, “야 이 친구 완전 이기주의자네. 자기 편할 대로 나를 ‘배’로 부르겠다는데….” 하자 호경은, “선배님, 제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세요. 며칠만 보면 되잖아요.” 한다. 백은 속으로 ‘이놈아 우리나라가 강대국이었으면 너도 우리나라 말 배우려고 내가 영어 배우려 고생하는 것 이상으로 고생하였을 텐데, 좋은 나라 좋은 부모 만난 덕에 호강하고 있는 줄 알아라, 이 친구야.’ 라 생각하였다.
처음 3~4일은 미군이 참전하여 참전 성과를 내었던 전쟁터와 전쟁기념관 등을 돌아다니면서 백은 전날 밤에 숙소에서 열심히 공부한 것을 활용하여 설명하면서 같이 지냈다. 경치 좋은 금강산도 이삼일 보면 지겹다고, 일행은 전쟁기념관 등 고적 답사로 3일 동안 다니다 보니 처음의 흥미가 떨어졌다.
인천 송도의 라마다호텔의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 중이다.
“What’s today’s schedule, Bae?” (배, 오늘 일정이 뭐예요?)
식사 후 커피를 마시면서 에드워드는 말을 꺼낸다.
“We’re going to visit Memorial Hall for Incheon Landing Operation very near from here. (여기서 가까운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을 방문할 거야.)”
“Bae, I’m sick and tired of your ways of guides. (배, 나는 당신이 하는 여행가이드가 지겨워요.)”
에드워드가 푸념한다.
“What do you mean by that?” (무슨 말이야?)
백은 당황하여 눈을 크게 뜨고서 에드워드를 바라다보면서 물어본다.
“I want to experience the real life of Korean youngsters. Please let me do that. (한국 젊은이들의 실생활을 경험하고 싶어요. 그렇게 해주세요.)”
‘야 이 친구도 본색이 드디어 나오는구나.’ 당시 외국 공급사, 특히 일본이나 서양 공급사, 사람들이 한국에 오면 화류계 문화 체험을 요구하는 것을 경험하였던 백은 순수하여야 할 학생이 이러한 부탁을 하니 배알이 꼴려 인상을 쓰면서 백은 일갈한다.
“As I know, your father wants you to look back upon your grandpa’s footprints. (내가 알기로는, 너의 아버지는 네가 할아버지의 족적을 되돌아보기를 원한다는데.)”
“I did them enough. So, why don’t you let me do another culture. (충분히 되돌아봤어요. 다른 문화를 체험토록 해 주세요.)” 라는 에드워드의 말에 백은 호경을 쳐다보면서, “이 친구 본색을 슬슬 드러내네. 한국 젊은이의 문화를 경험하고 싶다고 하는데 이것도 이번 인생 공부 중 포함되어 있는 것이니?”
“선배님, 이 친구 원하는 대로 해 주세요. 2~3일만 적당히 때우다 보내면 되니까요. 잘 부탁해요.”
백은 찜찜한 표정으로 안주머니를 뒤져 수첩을 꺼내면서 공중전화기로 간다.
“아, 효정이니? 아 그래 잘 지내니? 효정아 진짜 미안한데, 국가를 위한 일을 하고 있는데 네가 좀 도와주라.”
향긋한 커피 향이 풍기는 이태원의 고급 커피숍이다. 백의 간곡한 요청에 자기 과에서 킹카로 통하는 여학생 두 명을 대동한 효정이는 백을 보자 싱글벙글 웃는다.
“오빠가 왜 항상 바쁜가 했더니, 이런 국제적인 비즈니스를 하느라 그랬구나.”
효정의 애교스러운 멘트가 어색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든다.
백은 서로를 소개해 준다.
“저 여기 있는 외국 분은 현재 한국에 잠깐 들러 자기의 할아버지가 참전한 발자취를 공부하고 있는 착한 미국 학생입니다. 에드워드라 불러주세요. 그 옆 분은 에드워드를 경호하고 있는 경호실 아니 그냥 안내를 맡은 제 후배 김호경입니다. 저 또한 에드워드의 안내자인 조백입니다.”
“Edward, this pretty girl is a sister of a friend of mine, not my girlfriend and the other two beautiful ladies are her friends. They are all majoring in English Literature in the same university.” (에드워드, 이 귀여운 아가씨는 내 친구의 여동생이야. 내 여친은 아니야. 그리고 이 아름다운 두 아가씨는 그녀의 친구이고, 그들은 같은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있어.)
“어머 난 pretty girl이고 애들은 beautiful lady야. 정말….” 하면서 백을 살짝 째려보는 효정이가 무척 귀엽다.
“Ladies, if you don’t mind, I want to give Edward the right of choosing his partner first. (아가씨들, 여러분이 괜찮다면, 에드워드에게 첫 번째로 그의 파트너를 선택할 권한을 주려고 합니다.)” 괜찮죠?” 백은 세 아가씨에게 양쪽 눈을 찡긋하면서 콧잔등에 주름잡는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제안한다.
아가씨들은 웃으면서 아무런 대답이 없다.
“I will interpret your smiles as yes. Edward, you can choose your partner first. (아가씨들의 미소를 승낙하신 것으로 해석하겠습니다. 에드워드야, 너 먼저 파트너를 선택해)”
에드워드는 수줍어하면서도 좋은지 싱글벙글하면서, “Right lady is similar to Olivia Hussey. She is my favorite. (오른편의 아가씨는 내가 좋아하는 올리비아 허세를 닮았네요.)”한다. 백은 ‘자식 여자 보는 눈은 살아있네’ 생각하면서, “수정 씨는 에드워드 옆자리로 가시고, 효정은 호경과 나는 민숙 씨와 파트너로 결정되었습니다. 백은 속전속결로 파트너 맺기를 마쳤다.
파트너별로 각자 자리를 마련하여 앉자, 파트너끼리 어색한 표정으로 서먹하게 앉아있는 두 쌍의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백은 기분이 매우 좋은지 싱글벙글한다.
“모든 일을 이렇게 자신 있게 하시나 봐요?”
자신이 제일 먼저 선택되지 못함에 자존심 상한 듯 민숙은 새침한 표정으로 백에게 시비를 걸듯 말한다. 민숙은 수정 못지않은 미모를 갖추었다. 취향 차이로 에드워드에게 선택을 당하지 않았으리라.
“민숙 씨 정말 고맙습니다. 저와 같은 미천한 몸을 파트너로 선택하여 주신 것을 영광으로 여기겠습니다.” 하며 히죽 웃는 백이 민숙은 밉지 않다.
“선택은 제가 한 것이 아니고 그쪽이 했어요. 하여튼 저 기분이 별로인데, 저의 기분을 풀어주세요. 명동성당 앞에 있는 로열호텔의 지하에 있는 디스코텍에 가셔서 기분 좀 풀어요. 아마 오늘 디제이로 서세원이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백 일행이 들어서자 디스코텍에는 눈을 찌르듯 번쩍이는 형형색색의 사이키 조명, 혼탁한 담배 연기, 찐한 알코올 냄새, 많은 사람의 땀 냄새가 범벅이 되어 시각과 후각을 자극하며, 빠른 박자의 헤비메탈 연주와 날카로운 목소리를 품은 음악이 청각을 후려친다.
플로어(floor)에는 빠른 음악에 맞춰 사람들이 흥에 겨워 팔과 다리 머리 엉덩이를 흔들면서 춤을 추고 있다. 백 일행도 클럽에 들어서자마자 흥에 겨워 플로어로 뛰어나가 춤을 추기 시작한다. 춤을 추는 플로어는 술좌석과 음악을 틀어주는 뮤직박스보다 50cm쯤 높아서 춤을 추면서 음악을 틀어주는 DJ와 술좌석을 내려다볼 수가 있었다.
그날의 DJ는 민숙의 말처럼 입담 좋은 개그맨 서세원이었다.
서세원의 야한 멘트와 함께 신나는 음악이 연달아 나오고 있었다. “흔들어 주세요, 흔들어 주세요. 방울 소리 딸랑딸랑 나도록…. 비벼주세요, 비벼주세요. 가죽 타는 냄새가 진동하도록….”라는 멘트와 함께 유행하던, <one way ticket>, <Sugar Sugar>, <YMCA>, <Funky town> 등 디스코 메들리도 이어지다가 갑자기 음악을 딱 멈춘다.
한참 신나서 흔들어 대던 사람들은 갑자기 황당해하면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다. 백은 뮤직박스 앞으로 달려가서 서세원에게 손짓으로 장난치지 말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주먹을 흔들어 보이니, 서세원은 웃으면서 조금만 참으라는 식으로 손의 엄지와 중지로 검지 윗부분을 조금 보이는 손동작으로 재롱을 부린다. 그가 웃으면서 보이는 약간 앞으로 돋아난 이가 생쥐의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백은 웃음을 터트린다.
잠시 후 다시 음악이 나온다. 플로어에서 엉거주춤 서 있던 사람들이 다시 격렬하게 춤을 추기 시작한다.
백과 민숙의 춤은 다른 사람들의 춤과 차원이 다르다. 호리호리한 몸의 백과 날씬한 몸매로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민숙,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짝 맞춰 연습한 것처럼 춤을 춘다. 백이 민숙의 몸을 탐할 듯이 달려들며 팔다리를 흔들며 민숙에게 다가가 자기의 몸과 얼굴을 민숙의 몸과 얼굴에 갖다 대면 민숙은 몸과 얼굴을 뒤로 빼면서 귀엽게 손으로 저지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늘씬한 다리를 전후좌우로 흔들면서 도망가고, 백이 삐진 듯이 백스텝(backstep)으로 뒤로 물러나면서 손짓과 표정으로 불만의 표시를 보내면 민숙은 백에게 다가가 머리와 엉덩이를 살랑살랑 움직이며 손으로 백을 달래주는 듯한 춤은 어느 누가 봐도 예쁜 젊은 커플이 즐거운 썸을 타는 모습이었다.
한참 춤을 추다가 분위기가 이상해 춤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니 에드워드와 경호 커플을 포함하여 주위 사람들이 손바닥으로 박자를 맞추면서 백과 민숙의 춤추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백과 민숙은 쑥스러워 춤을 멈추려 하니 주변 사람들이 계속 추라고 손뼉을 치는 것이었다. 백은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있는 실력 다 발휘하여 춤추기 시작한다.
양쪽 발을 번갈아 앞으로 뒤로, 때로는 오른쪽 왼쪽으로 번갈아 가며 원스텝, 투스탭, 앞으로 원스텝 투스탭, 다이아몬드 스텝, 양팔은 발의 움직임에 맞춰 앞으로 뻗다가 위로 올리며, 때로는 만세를 부르다, 주먹으로 앞을 치는 자세를 취하며, 머리는 발과 팔이 움직이니 그에 맞춰 앞뒤로 때로는 양옆으로 흔들어진다. 민숙은 백의 자유분방한 움직임에 맞추어 절제된 자유분방한 귀여운 몸짓으로 흔들어대니 주변의 사람들이 환성을 지르며 박수로 박자를 맞추어주고 있다.
“신사분들 딸랑딸랑 요란한 방울 소리를 그만 죽이시고, 숙녀분들은 느끼한 가죽 냄새 그만 풍기시고, 조용히 엉겨 붙어 서로를 느끼는 시간을 가지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목소리를 착 까는 서세원의 걸쭉한 멘트와 함께 이장희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가 잔잔하게 흐른다.
“나 그대에게 드릴 말 있네. 오늘 밤 문득 드릴 말 있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터질 것 같은……“
블루스 타임(blues time)이다.
“전 블루스 스텝을 못 배웠는데요.”
땀에 흠뻑 젖은 백은 민숙에게 미안하듯이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는다.
“저도 처음 본 사람에게 안겨서 춤추고 싶진 않아요. 들어가서 목 좀 축여요.”
역시 땀에 젖은 민숙은 쿨하게 웃으면서 말한다.
자리에 돌아와서 백은 민숙의 잔을 왼손으로 들어 오른손으로 맥주를 따라서 민숙에게 건네준 후, 자기의 잔에 가득 따라 벌컥벌컥 마시자 민숙도 맥주를 시원하게 마신다.
에드워드는 상류 집 자제답게 수정을 안고 블루스를 멋지게 추면서 연신 벙글벙글 한다. 호경과 효정도 숙달되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스텝을 밟으면서 춤을 즐긴다. 그러한 모습을 보는 백은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웃고 있다.
새벽 3시다. 디스코텍이 끝나고 신나게 놀던 젊은이들은 각자 갈 길을 가야 한다. 서로 눈이 맞은 젊은이들은 근처의 모텔이나 호텔로 가든지, 허기를 느끼는 사람들은 근처의 해장국집에 가서 알코올에 찌든 위장을 따뜻하고 시원한 해장국으로 달래든지 아니면 디스코 클럽 종료 시각에 맞춰 기다리고 있던 택시를 타고 각자의 집으로 간다.
“선배님, 저 효정 씨 집까지 바래다주겠습니다.”
“아니, 너 그렇게 가도 되는 거니? 에드워드는 어떻게…,”
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술에 취한 호경은 자기의 본분을 잊고 매너 있게 효정과 함께 택시를 타고 출발하였다.
사건은 이후에 발생하였다. 에드워드, 이 녀석은 수정과 헤어지기 싫다는 것이다. 수정은 자기의 집으로 가야 한다며 택시를 타는데 이 친구는 택시에 탄 수정을 택시에서 억지로 끌어내 근처의 호텔로 데리고 가려한다.
“Hey, I have to go home. (전 집에 가야 해요.)” 하소연하는 수정에게 에드워드는 수정을 양어깨를 잡고 무어라 지껄이는데 이성을 잃고 뱉어내는 말을 백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Jesus Christ(빌어먹을)”, “God Damn(제기랄)”, “Let’s have good time.(우리 좋은 시간 갖자)” 하는 소리가 중간중간에 들리는 것으로 봐서 수정을 유혹하고 위협을 하는 듯하다. 백은 에드워드에게 다가가서, “Hey this guy, this girl is a student, not a hostess. So you’d better see her home safely. (이 친구야, 이 아가씨는 접대부가 아닌 학생이야. 그녀를 무사히 집에 보내주는 것이 좋아.)”라 점잖게 이야기하였다.
“What’s wrong? Students also have a right to enjoy their life. Furthermore, in my university, Asian girls, especially Japanese and Korean ones, have crush on handsome Caucasians like me. What’s the difference between the States and Korea. Why not? None of your business, Bae. (뭐가 잘못이야? 학생도 인생을 즐길 권리가 있는 거야. 더욱이 내가 다니는 대학에서는 아시아의 학생들 특히 일본 및 한국 여학생들은 나 같이 잘생긴 백인을 무척 좋아하더라. 한국과 미국이 다를 게 뭐야. 뭐가 안 된다는 거야? 배야 상관 말아.)”
백은 흥분하여 소리치는 에드워드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팔을 붙잡는다.
“Hey this guy, be gentle and calm down. Here in Korea, girl students are not that easy like in the States. Furthermore, Korean parents are very strict to their daughters. Let the girls go home safely and let’s find another good chance with me.” (야 이 친구야, 성질 죽이고, 진정해. 한국에서는 미국에서처럼 여학생들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 특히 한국 부모는 그들의 딸들에 대해 매우 엄격해. 아가씨들을 집에 보내고 나하고 같이 다른 좋은 기회를 찾자.)”
백은 속으로 먼저 떠난 호경을 원망하면서 에드워드를 달랜다.
“With you? Cut the crap! Nothing to do with you. I’ll have good time with that girl, not with you. You go home, Bae!” (너와 함께? 헛소리 하지 마! 너하고는 할 일이 없어. 난 너 말고 이 아가씨와 좋은 시간을 보낼 거야. 너나 집에 가, 배야!) 소리치면서 백을 힘껏 밀어제친다.
떠밀려진 백은 보도 턱에 걸려서 보도의 중간에 고여 있는 물구덩이로 내 동그라진다. 온몸이 물에 범벅이 되어 일어난 백은 머리 뒤를 만지니 무슨 액체 같은 것이 느껴져 보니 피가 흐르고 있다. 피를 보자 화가 치밀었다.
“Hey, you bastard, my name is not Bae, but Baeg. Repeat Baeg. Baeg means one hundred in English. So I’m one hundred times more powerful than you. From now on, I’ll punch you one hundred times. I’m quite sure these punches will make you a real man, this son of bitch.” (“야 이 새끼야, 내 이름은 배가 아니고 백이야. 백 해봐. 백은 영어로 100이란 뜻이야. 따라서 나는 너보다 100배 더 강해. 지금부터 나는 너에게 100개의 펀치를 날리겠어. 나는 이 100번의 펀치가 너를 진짜 인간으로 만들 것이라 확신한다, 이 개새끼야.”)
그러면서 백은 겁에 질린 에드워드를 벽 구석에 밀어 넣은 뒤 일단 에드워드의 턱에다 오른손으로 강력한 어퍼컷을 날린다. 엔진이 꺼진 승용차처럼 푹 내려앉은 에드워드 몸을 담의 모퉁이 구석에 구겨 넣고서 그의 복부를 학생 시절 복싱 도장에서 샌드백을 치던 기억을 더듬으면서 강타하기 시작하자 옆의 두 아가씨는 어찌할 줄 몰라한다.
5
20년 후
리오건설회사의 휴게실이다. 사원 둘이서 커피가 든 종이컵을 들고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번 오시는 팀장님은 어때? 오대리가 전에 같이 근무했다며.”
걱정스레 물어보는 조 과장은 약간은 통통하며, 머리숱이 적은 머리는 크지 않은 키 때문에 더욱 크게 보인다.
“저희는 행운이죠. 그런 분하고 같이 근무한다는 것이.”
조 과장과 비슷한 키의 오 대리는 숱이 많은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고 얼굴의 피부가 윤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30대 초반인 듯하다.
“전에 모사인 리오제철에 계실 때 상무님과 실장님보다 더 선임이셨는데 건설로 오셔서 진급이 늦어져 이제껏 고생하시다가 이제 제자리 찾아오신 거예요. 우리 회사로 오신 것과 진급이 늦은 것은 출신 학교가 좋지 않아 그랬다고 해요. 선배가 있나요, 집안 빽이 있나요. 그렇다고 윗분들 의중을 잘 헤아려 모시기를 잘하나…. 그런데 그분에 대하여 나쁜 말 하는 부하직원은 못 봤어요. 다른 팀장과 많은 점이 달라요.”
오 대리의 설명에 조 과장은 안심의 미소를 띠면서 커피 한 모금을 목으로 넘긴다.
“저 팀장님, 시간 됩니까?”
의자의 머리 받침에 머리를 대고서, 손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있는 백에게 조 과장은 서류를 한 아름 들고서 말을 건다.
“엉, 어 조 과장. 무슨 일이야?”
눈을 뜬 백은 조 과장을 보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양손 깍지를 끼고 머리 뒤로 제치는 기지개를 켜면서, “어휴 어제 마신 술 땜에 죽겠다. 예전 같지가 않네. 허허허.” 하며 웃는다.
“아, 그럼 이따가 오겠습니다.”
“아냐, 이리 앉아.”
백은 자기 책상 옆에 붙은 사이드 테이블을 가리킨다.
“대구달성쇼핑몰 현장에서 타일의 구매의뢰가 왔는데,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조 과장은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문제? 무슨 문제?”
“인도네시아산 타일을 주문하였는데, 물량이 엄청납니다.”
“물량이 엄청난 게 문제야?”
무슨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백은 일부러 딴청을 피운다.
“그것은 아니고, 수의계약으로 요청하였습니다. 그쪽에서 수의계약 요청한 업체는 인도네시아에 소재한 업체로서 이탈리아 포세린타일을 OEM으로 생산하는 업체입니다. 생산기술은 매우 뛰어나 이탈리아의 원 제조사의 제품과 품질상으로 90% 이상의 품질을 가진 제품을 생산합니다. 하지만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포세린타일을 OEM 방식으로 생산하는 업체는 인도네시아뿐만 아니라 중국, 베트남, 태국 등 동남아시아에도 몇 군데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생산하는 타일도 인도네시아 제품과 품질 면에서 별반 차이가 없다는 소견서도 확보했습니다. 따라서 첫째, 이 제품을 수의계약으로 요청하였다는 자체가 큰 하자입니다.”
침착하게 설명하는 조 과장을 바라보는 백은 숙취에 해롱거리던 눈은 사라지고 사냥감을 채기 직전의 맹수와 같은 눈으로 변하였다.
“그래! 구매예정가격은?”
“예, 그게 더 큰 문제입니다.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구매적정가격은 160억 미만입니다만, 현장의 구매예정가격은 210억입니다.”라는 조 과장의 말에 백은 “허허허”하고 헛웃음을 터뜨린다.
“입찰에 부치면 적정가격의 몇 %로 구매할 수 있겠어?”
“세게 붙이면 60~70%로 구매 가능합니다.”
“헉, 100억 이상이 어디로 새지? 도적놈들…,”
백은 조 과장이 들릴까 말까 한 소리로 신음 뱉듯이 한다.
“예 상무님, 이리 오십시오.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하는 여종업원의 말씨가 무척 공손하고 상냥하다. 여기는 시내의 일식집이다. 입구에서부터의 분위기로 보아서 고급 일식집으로 보인다.
맨 안쪽 방으로 안내된 50대 중반이며 중키의 마른 체형과 얼굴에 신경질적인 면이 보이는 권 상무는 문을 열고 들어가니 60대 중반의 중키에 통통하고 앞머리가 거의 사라져 대머리인 신사가 자리의 바깥쪽 자리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난다.
“아 회장님, 번번이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제가 일찍 오려고 하였는데 더 일찍 오셔버리면 제가 죄송하지요. 자 안쪽으로 가시지요.”
권 상무는 매우 미안함을 표하면서 안쪽 자리로 상대방이 가기를 요청한다. 상대방은, “이번에는 상무님께서 안에서 드셔야죠.” 한다.
“아닙니다. 회장님께서 안에 계셔야지 이 방의 분위기가 삽니다.”
하면서 자기의 양복 상의를 벗는다. 여종업원은 양복을 받아서 입구의 오른편에 있는 옷걸이에 미리 걸어둔 양복의 왼편에 걸어둔다.
안쪽으로 옮겨 앉은 윤치도는 자리에 있는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면서, “상무님, 요사이 일들이 많이 몰려서 정신이 없으시겠네요?” 하며 상대방을 쳐다보며 웃는다.
“어휴, 말씀 마세요. 음식 많은 곳에 똥파리도 많이 모인다고 정신없습니다.”라 말하면서 ‘아차, 내가 말실수했구나. 이 양반도 똥파리의 일종인데.’ 하고 느낀다.
“하하, 죄송합니다. 이 똥파리가 상무님을 괴롭히려고 상무님을 뵈러 와서….”
윤치도는 순간적으로 기분이 상하여 빈정거리는 말투로 말한다.
“아니, 회장님, 무슨 말씀입니까? 저에게 회장님은 최고로 귀중하신 분이신데요. 제가 회장님의 덕으로 이제까지 버티고 있잖습니까?”
권 상무는 무심결에 뱉은 진심을 잠재우려고 해서는 안 될 말을 한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상무님께서 저를 그렇게 생각하여 주신다니. 자 상무님이 좋아하시는 정종을 준비하여 놓았습니다. 한잔 받으시죠.”
오늘은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되는 자리인지라 바로 기분을 푸는 행동으로써 윤치도는 미리 시켜놓은 따듯한 정종을 권 상무의 작은 잔에 두 손으로 따른다.
정종 잔 3~4잔을 비우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다가 윤치도는 본론을 꺼낸다.
“권 상무, 전번에 부탁드린 대구의 쇼핑몰 타일 구매 건 말입니다.”
호칭이 ‘상무님’에서 ‘상무’로 바뀌었다.
“우리 담당자 말을 들으니까 내가 부탁한 대로 진행이 안 되는 것 같은데 무슨 사정이 있어요?”
‘허, 이 사람, 사정을 다 알고 있으면서 나에게 물어보면 어떡하나?’ 라 권 상무는 생각하면서, “아 대구쇼핑몰 타일 말씀이죠. 저도 어제 담당 팀장에게서 보고 받았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그 업체 못지않은 품질의 제품을 생산하는 업체들이 있으니 경쟁으로 돌리겠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아니, 권 상무는 그게 가능하다고 보세요?”
윤치도의 목소리와 표정은 위협적이고 고압적인 것으로 바뀐다.
“아니 무슨 말씀입니까? 모사의 전양준 회장님께서는 우리 구매부서의 수의 계약률이 너무 높아서 예산 절감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고 하십니다. 회장님의 지시로 저희는 매달 수의 계약률을 회장님에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번 달도 전번 달과 비교하여 수치를 보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윤 회장님께서는 나름의 입장이 있으시겠지만, 저도 어려운 사정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까지 저자세였던 권 상무의 태도는 아주 단호하다.
“아니 전양준이가 그래요? 수의계약은 안 된다고.”
“아니 이번 건을 꼭 집어서 하시는 말씀은 아니고 전반적인 상황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리고 담당자가 더욱더 좋은 품질의 물건을 더욱 싸게 구매하겠다는 것에 대하여 아무리 제가 상무지만 그것을 막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윤 회장님께서도 저의 한계를 인정하여 주셔야 합니다.”
“그럼 양준이를 잠재우면 되겠네, 이 친구 저 만들어준 게 누군데, 배은망덕한 것 같으니.”
“제가 우리 회장님을 어떻게 하라 할 수는 없잖습니까?”
“알겠어. 내가 윗동네 동생에게 이야기하겠어요. 그러면 되겠지?”
“어휴, 그건 만으로는 안 됩니다. 요새 회사는 옛날 같지 않습니다. 위에서 이야기한다고 다 듣는 것은 아닙니다. 요사이 직원 중 회장님 말씀도 듣지 않는 특이한 독종들이 있습니다.”
“아니, 그러한 직원들은 임원이 관리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아니에요. 이러한 친구들은 자기 목을 들이대면서 대드니까 잘못하면 같이 가는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노리고 my way를 외치니 그러한 독종을 만나면 저와 모사의 회장님도 별수가 없습니다.”
“그건 인사권으로 해결하면 되잖아요.”
“그리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이 친구는 자기 목에 칼이 들어오면 그 칼을 되치는 무서운 독종이니, 저도 간단치가 않습니다. 이번 건만 해도 자기하고 담당자 깜빵 보낼 일 있냐고 대드는데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누구의 힘이 필요합니까?”
“힘 있는 사람이 인사 쪽에 압력을 집어넣어 하루아침에 조용히 없애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럼 동생에게 같이 부탁할까?”
“아니 그곳까지는 필요 없고 우리 건설사장님에게 조용히 말씀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아주 조용히 신속하게 해결하라고 부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그 친구 이름은? 아, 나중에 내 휴대폰으로 넣어줘.”하며, 자기 잔에 채워진 정종을 마시고서 빈 잔을 한 손으로 권 상무에게 건넨 후 정종을 가득 부은 후, “참, 그리고 이번 건 외에 3~4개월 후에 서울 광진구의 복합센터에 들어갈 석재류가 있는데 그것도 신경 좀 써줘야겠어. 물량이 이번 것보다 훨씬 크니 특별히 신경을 써 줘야겠어.”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것 제가 언제 거절한 적 있습니까?”라는 권 상무의 말에 윤치도는 미소를 지으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양복이 걸려있는 곳으로 가서 자기 양복의 왼쪽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서 권 상무의 양복 안주머니에 넣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권 상무 용돈 좀 챙겨 왔는데 많지는 않지만 좀 쓰시고 이번 건 잘 되면 그때 다시 한번 보자고.” 한다. 오른쪽 주머니에는 또 하나의 더 두꺼운 봉투가 있지만, 그것은 아껴둔다. ‘너도 나에게 부탁할 것이 있으니 이것으로 족하겠지.’ 생각한다.
권은 윤치도의 행동을 보며 웃으면서, “아니, 회장님 그러실 필요 없는데요. 저도 회장님 신세를 앞으로 볼 일이 있는데…,” 하면서 멀리서 봉투의 두께를 짐작한다. ‘두께로 봐서 200장은 되겠는데. 200 x 50,000, 어휴 날강도 같으니 그 푼돈으로 그 어마어마한 돈을 처먹으려구, 도적놈.’이라 생각한다.
“회장님, 내년 3월에 저희 회사 주총 있는 것 아시죠. 또한 제가 임기 만료인 것도요?”
돌아와 자리에 앉은 윤치도에게 권 상무는 목을 앞으로 쑥 뽑으면서 말한다.
“아니 벌써 2년이 지났어. 세월 빠르네!”
속으로, ‘이 친구 임원 만들어줘서 아직 뽑은 것 별로 없는데 세월은 빠르네.’라고 생각한다.
“아직 5개월이나 남았는데, 그때 가서 작전을 한번 세워 보자고. 이번에는 진급을 하면서 연장해야 할 것 아냐?”
“어휴, 형님! 이번에도 신경 써 주시면 제가 알아서 잘 모실 테니 부탁드립니다.”
권 상무는 자기가 받은 잔을 마신 후 그 잔을 윤치도에게 두 손으로 공손히 건넨다.
구매계약실 권 상무실이다.
“심 실장, 광진구 복합단지 현장 소장 잘 알지?”
“예, 그 친구와는 고교 동문입니다. 2~3년 후배입니다.”
심 실장은 권 상무의 얼굴을 멀끔히 쳐다보면서 대답한다.
“그쪽에서 건물 외벽에 붙이는 석재를 구매할 예정이라는데 언제쯤 구매의뢰 예정인지를 알아보고 어떤 방식으로 구매 의뢰할 것인지를 알아보지. 총 구매 예정액하고.”
“알겠습니다. 바로 전화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아니야, 전화는 하지 말고 직접 찾아가서 물어보고 우리에게 구매의뢰를 내년 3월 이후에 할 수 있도록 조정해봐. 이것은 매우 중요하니까 심 실장이 직접 찾아가서 상의하고, 아무에게도 이야기해서도 안 돼. 알았지? 특히 백이 알면 절대 안 돼.”
윤치도 사무실 소파에서 심 실장과 윤치도가 각자 앞에 커피를 앞에 두고 앉아있다.
“선배님, 회사가 일취월장하고 있네요. 야, 정권 바뀌고 가장 잘 나가는 사람은 선배님 아닙니까?”
심 실장은 호기스러운 큰 소리로 이야기하니, “허, 심 실장아, 너 말조심해라. 내가 진즉 길을 잘 닦아 놨으니 내 갈 길로 가고 있는 것이지 누가 도와주어서 그러는 줄 알것다, 이 친구야. 웬 일이노?”
“며칠 전에 우리 상무 만났습니꺼?”
“엉, 그제 만났다. 상무가 그러더나?”
“아니요, 비서 메모장에 적혀 있어서 알았지요. 제가 줄을 놔서 두 분은 서로 잘 나가는데 나는 생기는 것 없능교?”
“야 덕분에, 니 구매실장이 되었잖노”
“아니 선배님, 저도 이제는 구매실에서 최고참 아닙니꺼? 저도 별 달 때가 되었습니다.”
‘하 이 친구도 욕심이 있구나. 이 친구가 더 유용할 수도 있겠는데. 게는 가재 편이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 넌 우리를 우째 도울낀데?”
“여보세유, 형님 전 봉수입니다. 드릴 말이 있어서유.”
권 상무가 윤치도 회사의 경비로 취직시켜준 고향 친구의 동생인 봉수의 전화였다..
“어, 봉수야, 무슨 일 있나? 나 바쁜데 용건 빨리 얘기 혀라.”
“형님 회사의 구매실장이라는 사람이 우리의 윤 회장님 만나러 와 있는데유.”라는 봉수의 말을 듣고 권 상무는 갑자기 표정이 험악해진다.
봉수의 전화를 끊은 후 권 상무는 비서를 호출하였다.
“예. 실장님께서 그제 상무님 스케줄을 물어보셔서 알려드렸는데요.”
비서인 미스김의 말을 들은 권 상무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전화로 미스 김에게 지시한다.
“미스 김, 최양래 차장 들어오라고 해.”
수첩을 들고 들어온 최양래 차장에게, “최 차장, 재작년의 심 실장 캐디 폭행 사건 정리한 것 있지?” 하고 묻는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최차장은, “예, 감사실에서 사본받아 놓은 것 있었는데 감사실에서 더는 문제 삼지 않기로 합의 후 폐기 처분하였는데요.” 하자, 권은, “그 사건 조사담당자가 자네 후배, 맞지?” 하면서, “가서 술 한잔 사주면서 그때 그 자료를 다시 찾아서 한 카피 나에게 가져와.” 한다.
갑작스럽고 의심스러운 지시에 대답하지 못하는 최 차장에게 권은, “자네 이번에 팀장 대상 0순위 아닌가?” 하자, 최 차장은, “아닙니다. 홍 차장이 0순위이고 저는 그다음입니다.” 한다.
“그 순서는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인사권자의 의견이 중요한 거라는 것 알지? 조만간 팀장 중 한두 명 교체 예정이니까 열심히 해.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 내일 오전 중 그 자료 내 손에 쥐여줘.”
“심 실장님, 처신을 잘 하시고 다녀야지, 우리 회사 아니 우리 리오 그룹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다닐 행동을 하고 다녀서야 되겠습니까? 윤리경영을 최우선으로 삼는 리오그룹에 해가 되는 행동을 하고 다녀서는 안 되죠.”
정색하면서 말하는 권 상무의 말에 심 실장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본다.
“아니, 상무님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자세한 내용을 말씀하셔야 제가 대답을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아니 아무리 홀인원도 좋지만 캐디 아가씨의 이가 부러지도록 패는 것은 정도가 지나친 것 아닙니까?”
“아니, 그것은 없었던 거로 감사실과 합의된 것 아시잖아요? 피해자와 합의를 봐서 충분한 보상도 해 주었고요.”
“아니 우리 감사실만 눈감는다고 해결됩니까? 그 자리에서 목격자들이 다수 있었다는데 그 목격자들의 입은 다 어떻게 되는 거요?”
“아니 목격자들도 모두 보답을 해서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문제가 왜 지금 와서 대두되는 거죠?”
“재작년이면 그리 먼 기간이 아닙니다. 법정 시효도 한참 남았고요. 홀인원 했다고 캐디들 다 술집에 데려가서 무엇을 하려고 그랬습니까? 나도 그때 그것을 잠재우려 큰 노력을 하였지만 현시점에서 모사 및 모종의 신문사에서 문제를 제기하는데 내가 어떡하면 좋겠어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이를 잠재우려 노력하고 있지만, 심 실장님은 나의 이러한 노력에 전혀 호응해주는 것 같지 않아 내 마음도 갈등을 느끼고 있어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상무님의 뜻에 맞춰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일단은 광진구 현장에 가서 석재 구매의뢰를 내년 4월에 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다른 지시사항 없으십니까?”
권으로부터 아무런 대답이 없자 심 실장은 고개를 푹 숙이며, “저 나가서 상무님의 지시사항을 충실히 이행하겠습니다.”란 말을 남기고 문을 열고 나가자 권 상무는 하이에나의 눈으로 출입문을 바라보면서, “디질라고 까불어 씨.”란 말을 내뱉는다.
리오건설 감사실장실이다.
“구매계약실에서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길래 모사 감사실에 그리 많은 문제를 진정서로 제출하면 어떻게 됩니까? 구매계약실이 그렇게 문제가 많은 부서입니까?”
눈, 코, 입이 가운데로 몰린 감사는 신경질적으로 권 상무에게 질타하듯 이야기한다.
“아니, 우리 구매계약실이 무슨 힘이 있다고 자체적으로 문제를 일으킵니까? 전부 사업 시행부서에서 일을 추진한 것을 구매부서에 던진 것이 문제가 된 것이지, 우리 부서에서 원천적으로 문제를 일으킨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특히 감사님께서 지금 말씀하시는, 대구 달성동 쇼핑몰 타일, 광진동 복합단지 석재류, 부산 서면 고층아파트 소방설비, 인천 송도아파트 단지 석재 등과 같은 문제는 모사 전양준 회장님의 지시사항이라는 것을 인지하셔야 합니다.”
권 상무의 적극적인 반격에 감사는 기가 꺾여 “아니 모든 게 다 구매계약실의 문제라는 것이 아니고 구매계약실의 간부였던 자가 적극적으로 모사의 감사실에 진정하니 모사의 감사는 우리 회사에 커다란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말하며, 그러한 친구를 꼭 회사에 남길 필요가 있는 것인지 여부를 인사 담당도 아닌 나에게 물어보니 참 어이가 없습니다.”
이제는 살짝 인사부서에 화살을 돌린다.
“방금 권 상무가 회장님의 지시사항이라 하였는데, 회장님께서도 그리하고 싶어서 하셨겠어요? 큰 조직을 이끌어 가시면서 큰일을 하시다가 그러한 조그마한 문제점들이 드러난 것인데 그러한 것들을 우리 같은 임원들이 막아주지 못하면 어떻게 이 조직을 이끌어 가시겠습니까? 문제는 회장님의 큰 뜻을 모르고 무작정 정의를 외치는 백과 같은 직원들이 문제이지요.”
건축사업본부장을 맡은 큰 키에 이목구비가 수려한 최시복 전무가 시원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그럼, 백 이 친구를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사표를 받을 명분은 없습니까? 지금 구매부서에는 없고 총무부 인천파견 사무소에 근무하고 있는데 그 부서는 처치하기 곤란한 친구들을 모아둔 임시조직 아닙니까?”
굳게 입을 다문 채 듣고만 있었던 인사상무는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으면 자기에게 화살이 쏟아질 것 같아 입을 연다.
“문제는 처치하기 곤란한 친구들끼리 모아둔 것이 문제이지요. 교도소에서 큰 죄 저지르는 방법을 배워 나오듯이 그런 친구들끼리 모아둔 것은 다시 생각해야 할 것 같은데요. 듣기에는 이 사람 양복 속주머니에 사표와 진정서 아니 고발장을 동시에 가지고 다닌다고 하는데 그대로 두면 큰 화근이 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내가 알기로는 그 사람 처남과 친구들이 언론계에서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 그대로 방치하면 문제 생길 것 같은데 방안을 세워야 합니다. 당장 사표 받을 명분도 없다면 아예 감시하기 좋은 본사 부서로 불러서 집중적으로 감시하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최시복 전무는 명쾌한 해법을 제시한다.
“그럼 권 상무님, 구매계약실에 다시 백을 받아서 집중 관리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느 팀으로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까?”
즉시 인사상무가 말을 받는다.
“아니 백 그 친구는 너무 고참이라 어느 팀장 밑에 두기가 곤란합니다. 모든 팀장은 어려워할 터이고, 백 이 친구도 그러한 수모를 당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더욱 좋아요. 후배 밑에 있는 수모를 당하지 않으려면 사표를 쓰는 방법밖에 없을 테니까요.” 최 전무가 시원하게 뱉어내는 말에 인사상무는, “맞아요. 팀장 중 제일 대가 세고 막내인 변중기 부장 밑에 발령 내고 집중관리 하시지요, 권 상무님.”
인사상무는 해결책을 찾은 것에 대한 만족의 표시로 싱긋이 웃는다.
권 상무실에서 권 상무는 변중기 부장과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백을 당신 밑으로 발령 낼 테니, 자네가 집중관리 하란 말이야. 이 문제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말고 해. 경영진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자네 능력을 보여줘.”
“아 알겠습니다. 벅차기는 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구매계약실에 평사원으로 이전한 백의 자리는 사무실 입구에 위치하였다. 사무실로 들어오면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가슴높이의 칸막이로 빙 둘러서 책상 3개가 들어갈 자리를 만들어 그 중간에 백의 책상을 배치하고, 부서의 공용 컴퓨터 프린터와 복사기가 책상 좌우로 놓여있다. 직원들이 프린트를 출력하거나 복사를 할 때 백의 주위를 맴돌도록 만든 지능적인 배치다. 더욱이 백은 사무실의 입구를 정면으로 바라다보게 되어 사무실에 들어온 사람은 처음으로 백과 딱 마주치게 되어있다. 아파트 입구의 경비실과 같은 형태이다.
“나 오늘 사표 내고 올 테니 그리 알아.”
출근하면서 백은 비장한 각오로 말을 하니, “아 여보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해?”하며 아내는 울상을 짓는다.
왼쪽 안주머니에 있는 사표를 꺼내서 책상 위에 놓고 마음을 다스리고 있다. ‘이 친구 면상에 던지고서 「너 다 해 처먹고 자손 대대로 잘 살아라, 이 개새끼야!」 하고서 나올까, 아니면 「너 인생을 이따위로 살고서 너의 자식들에게 뭐라고 할 말 있겠니? 이 새끼야」 이렇게 할까?’ 사표 던질 때 할 말을 정리하고 있는데, 책상 위 전화가 울리기에 전화를 들고서, “여보세요” 하니, “여보 저예요. 우리 윤아가 대학에 합격했대요. 전번 수시로 응시하였던 Y 대 경영학과에 합격했어요. 사고 치지 마시고 이따가 퇴근 후에 바로 집으로 와서 애들하고 저녁 먹으러 가요.”
전화를 끊은 백은 팔짱을 끼고서 책상 위에 놓여있는 사표를 한참 째려보더니 한숨을 쉬면서 그것을 집어 속 안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주변에는 서류를 복사하러 온 직원들과 컴퓨터로 작업한 서류를 프린터 출력하러 온 직원들이 백의 이상한 행동에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고 있다.
백은 자리에 앉아서 컴을 켜고서 인터넷을 보고 있으니, “형님! 형님이 명령 났다기에 왔습니다. 그런데 자리가 왜 이 모양입니까? 형님이 구매계약실의 경비입니까?” 하며 사무실에 들어오는 사람은 백을 평상시에 따르던 국내영업팀의 서기상 차장이다.
“야, 조 과장! 형님을 이런 식으로 대접하면 되나? 구매계약실 개판이네.”
마침 서류를 복사하러 온 조 과장에게 서 차장은 큰 소리로 질책한다.
“야, 서 차장 조용히 해라. 힘없는 조 과장이 무슨 잘못 있다고 그러니? 회사가 문제지. 이 친구들 내가 구매계약실로 다시 오니 자리가 이 자리밖에 없다고 하네. 그래도 없는 자리 어렵게 마련한 것이니 앉아있으라 하니 어떡하니? 안 짜르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식이니, 참 더러워서.”
조 과장은 복사하려던 서류를 가지고 자기 자리로 황급히 도망간다.
백의 담당업무는 구매계약 개선책 수립이다. 혼자서 국내외 구매계약 개선책을 마련하라니 이런 황당무계한 경우도 없다. 팀장에게 인원 지원을 해달라고 하니 현업 업무 인원도 부족하니 혼자 하란다. 국내외 현장에 전화하여 관련 자료를 요청해도 전혀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백은 나름의 경험에 의하여 ‘구매계약혁신방안보고서’를 만들어서 보고하니 현실성이 없단다. 아예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자리에 있다가 퇴근하라는 식이다. 출근하였는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관심도 없다.
가장 고욕은 점심시간이다. 전에 같이 근무했던 후배 직원들과 식사를 하자고 하니 다 약속이 있다고 이리저리 뺀다. 처음에 같이 식사도 하고 사무실에서 다정하게 이야기를 하던 전의 부하직원들도 해당 팀장의 엄중한 경고가 들어갔는지 이리저리 피한다.
오늘도 점심시간 일찍이 식당에 가서 한쪽 구석에서 홀로 점심을 먹고 사무실에 들어온 백은 직원들이 자기를 대하는 태도에 열이 받쳐 눈을 감고 분을 삭이고 있다. “저 여기 권칠수 상무님 자리가 어디세요?” 하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눈을 뜨니, 전에 구매설비팀장이었을 때 회사와 첫 번째 계약을 체결하고서 매우 고마워하면서 백을 자기의 은인처럼 떠받들던 전기업체의 봉 사장이 눈앞에 있다. “아니, 팀장님 아니십니까? 어쩐 일로 여기에 계십니까? 자리가 여기입니까?” 하며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백은 “아, 봉 사장님이시네요. 권 상무님 실은 저 왼편 안쪽에 있습니다. 저는 다른 부서로 유배 갔다가 지난주에 다시 왔습니다. 저의 현 보직은 보다시피 구매계약실의 안내입니다. 하하하.”
다음 날부터는 일찍 사무실에 나와 책상에 서류를 펼쳐놓고, 노트북을 켜놓고서 밖으로 나간다. 근처의 공원 벤치에서 멀리 보이는 회사의 사무실을 바라보면서 묵주기도를 드린다. “하느님 제발 저를 저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6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이다.
“이 양반 정신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 차기 정부는 우리와의 동맹을 날려버릴 것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아야 한다니요. 이번에도 일본의 농간 아닙니까? 도대체 우리와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일본만 끼어들면 그들 쪽 편에 서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침통한 표정으로 말하는 대통령은 말은 점잖게 하지만 그의 표정으로 보아 매우 분노에 차 있다. 대통령의 책상 앞에 서 있는 국가안보실장은 안절부절못한다. 마치 자기의 직무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으로 대통령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너무 미안한 생각이다.
“관련 부서와 다시 밀접한 연락과 조치를 하여 최대한 좋은 결과를 도출하겠습니다.”
국가안보실장은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손바닥으로 훔치면서 이야기한다.
청와대 국가안보실이다. “실장님 미국 의회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에드워드 의원이십니다. 1번입니다.” 비서의 전화 안내에 최 실장은 전화기 1번을 누른 후, ”Hello, Choi Speaking. (여보세요, 최입니다.)” 원어민 수준의 발음으로 말한다.
“Hi Sir, I’m Edward Second. (여보세요, 저는 에드워드 2세입니다.)”
상대방의 젊고 탱탱한 목소리가 전화기로 흘러온다.
“Oh, Senator! Very nice to hear your voice again? I was about to call you to discuss about something important. By the way, what can I do for you? (오 상원의원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되니 매우 반갑습니다. 제가 중요한 무얼 좀 상의하느라 전화를 드리려 했는데요. 그런데, 제가 해드릴 일이 있나요?)”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매우 반가운 마음이 들지만, 목소리의 톤을 관리하고 응답하니 상대방은 바로 본론에 들어간다.
“Sir, please do me a favor. I’m looking for a man, a very nice and tough guy. (실장님에게 부탁할 일이 있습니다. 저는 한 사람을 찾고 있는데요, 아주 멋지고 터프한 사람인데요.)”
오늘도 백은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사무실을 올려다보면서 묵주기도를 하고 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아멘! 오, 하느님 저를 저 악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게 해 주옵소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삐리릭 삐리릭” 휴대폰이 울린다.
“여보세요.” 백은 약간은 짜증스레 전화를 받는다.
“Hi, Mr. Baeg, one hundred! (여보세요, 미스터 백, 100!)” 순간 백은 멍하다. “여보세요, 누구... Hey you! you!, I don’t remember your name, but I know you. The guy severely beaten up by me long ago. (야, 당신 당신이구나. 난 당신의 이름은 기억을 못 하지만 당신을 알아. 당신 오래전에 나에게 얻어터진 사람이지.)”
“Yes I’m Edward Second. Twenty years ago, I was punched by you one hundred times. Ha ha. (맞아요. 난 에드워드 2세입니다. 20년 전에 난 당신한테 100대나 맞았어요.)”
“Not that many, but many times. By the way, why did you call me? Do you want to revenge on me? (100대까지는 아니지만, 많이 때렸지. 그런데 왜 전화했습니까? 나한테 복수하고 싶어서요?)”
“Yes, I want to get it back at you. I hope to see you soonest. Why don’t you come to the States. I’ll send you round air tickets. (예, 난 그것을 갚으려 당신을 빨리 보고 싶어요. 왕복항공권 보낼 테니 미국에 오세요.)”
“Wow amazing! However, come to think of it, I don’t want to get there. I’m afraid of getting hit by you. (야, 진짜 대박이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당신한테 얻어터질까 봐 가기 싫어.)”
청와대 국가안보실이다.
백은 어정쩡한 자세와 표정으로 국가안보실장실의 소파에 앉아있다. 국가안보실장이 들어오니 자동으로 벌떡 일어난다.
“아 조백 부장님, 반갑습니다. 저 안보실장 최장실입니다.”
“예 조백입니다. 무슨 일로 저를....”
“에드워드 2세 상원의원을 만나러 가신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에드워드 상원의원과 어떤 관계이신지요? 에드워드 2세가 다음 유력한 대권 후보인 킹 에드워드의 아들인 것을 아십니까?”
“전에는 몰랐는데 그 사람의 전화를 받은 후 인터넷으로 조사해보니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 정보부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다가오는 올해의 대선에서 킹 에드워드가 될 확률이 제일 높다고 합니다. 90% 이상의 확률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에드워드2세 상원의원의 장모는 현재 국무장관인 엘리엇 여사이며 다음 달에는 킹 에드워드 씨의 러닝메이트로 지명될 예정입니다.”
“예, 저도 그 사람이 그 정도의 거물인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제가 20여 년 전에 두들겨 패 놓은 것이 현재의 그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너무 아이러니합니다. 당시에는 친구 여동생의 친구를 희롱하는 것에 화가 나서 두들겨 패준 것인데요.”
“하하하, 두 분의 관계는 두 분 사이에서 푸셔야겠지요. 아 언제 미국으로 출발하십니까?”
“오늘 에드워드에게서 연락 왔는데 다음 주 월요일에 자기가 시간이 되어 공항에 마중 나올 수가 있다고 일요일에 출발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조백 부장님, 이제는 우리나라의 외교 및 운명이 부장님 어깨에 달렸습니다. 이번에 가시면 에드워드 의원과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의 실정 및 한반도의 상황을 잘 설명하여주시고 각하의 뜻을 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번에는 두들겨 패지는 마시고 즐겁게 지내다 오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대사관에 지시를 다 해두었으니 필요한 사항은 그쪽에 연락을 하시면 됩니다. 잘 지내다 오십시오.”
7
인천공항이다.
“아빠 엄마 다녀올게. 딸들 잘 지내고 있어. 서로 다투지 말고 밥 잘 챙겨 먹고 너무 늦게 나다니지 말고…,”
큰 키에 지적인 모습을 갖춘 백의 부인은 자기보다 키 큰 딸들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걱정스럽다는 듯이 이야기한다.
“어휴, 걱정일랑 마시고 모처럼의 해외여행 잘 다녀오세요. 아마 두 분만 가시는 첫 해외여행인 것 아녀요?”
큰딸은 웃으면서 엄마를 안은 후 백을 꼭 껴안는다.
작은딸은 엄마를 껴안은 후 안타까워 엄마를 못 보내겠다는 듯이 계속 안고 있다.
“자, 윤아야, 아빠도 안아줘야지.” 하면서 작은딸을 엄마에게서 떼어놓고 자기가 꼭 안아준다.
“자 엄빠 들어갈게. 잘 있어.” 하면서 둘은 각자 여행 가방(캐리어)을 끌고서 출국장의 체크인 장소로 간다.
근처에 건장한 두 명의 젊은이들의 경호를 받으며 국가안보실장이 기다리고 있다가 백 부부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니 백 부부도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아니, 휴일에 이렇게 안 나오셔도 되는데…, 제가 찾아갈 수도 있었는데요.”
백은 미안하다는 듯이 최 실장의 손을 잡으면서 이야기한다.
“아닙니다. 중요한 일 하러 가시는데 제가 나와 직접 전해드려야죠.”
최 실장이 안주머니에서 꺼낸 하얀 봉투를 조심스레 백에게 전하니 백은 여행 가방 손잡이에서 왼손을 떼고서 양손으로 그것을 받아서 오른손으로 안주머니에 조심스럽게 집어넣는다.
최 실장이 악수를 청한다. 백은 양손으로 악수에 응한다. 최 실장은 자기의 왼손을 백의 오른손 위로 얹어서 부드러운 압력을 주면서 백의 얼굴을 보면서 간곡하고도 정중한 미소를 보낸다.
백은 왼손으로 캐리어를 끌고 오른손으로는 아내의 어깨를 감싸 안고서 공항 VIP 휴게실로 들어선다.
백이 탄 비행기가 인천공항을 이륙한다.
기내 특등실(프레스티지 스위트: Prestige Suite)이다.
백은 옆 좌석에서 잠들어 있는 아내를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안주머니에서 서신 세 통을 꺼낸다. 백은 각 서신의 봉투에 적힌 발신자와 수신자의 이름을 확인하면서 굳게 닫힌 입술에 더욱 힘을 준다.
- To: Mr. King Edward Ⅱ/Senator of United States of America
From: President of Republic of Korea
- To: Mrs. Susan Elliott/Secretary of State of United States of America
From: President of Republic of Korea
- To: Mr. King Edward
From: President of Republic of Korea
조백은 작은 가방에서 서류철을 꺼내어 세 통의 서신을 조심스럽게 끼워 넣으며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짓는다.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두 마리의 백조가 밝은 햇빛을 등에 업고 조용히 힘차게 날아오른다.
Toward a new world are two swans silently and briskly flying up, with their backs to the bright sun, in the vast sk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