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와 영조, 그리고 나의 아버지
작년 겨울이었나. 상경논총 출판회식을 하는데, 옆자리에 앉은 S 누나가 나랑 동성동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전주 이 씨 효령대군파 23 세손이다. 태조 이성계의 아들이자 세종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의 직계자손이다. 우리 가문에선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이이'와 조선 후기 문신이자 실학자인 '이익'을 배출하였다.
공명첩을 산건 아닌가 의심스러워 족보를 비롯한 자료들을 찾아보았지만, 나의 고조부는 조선말기 강원도에서 향교 서원을 운영한 선비였고, 나의 증조부는 일제강점기 공부에는 뜻이 없었던 강원도 지주였다.
나의 아버지는 술 마시고 행패를 부릴 때마다 내가 '왕족'의 자손이라고 소리를 지르곤 했다. 그놈의 왕족의 자손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조선 왕조 500년 중에 제일 특이한 사건을 꼽으라면 난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 이야기를 꼽고 싶다. 세계사에서 왕정 시대 때 수많은 왕자들이 왕권 찬탈을 위해 아버지 왕을 죽인 사건은 많았지만, 왕권 유지를 위해 아들인 왕자를 죽인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2015년에 개봉하였고 송강호, 유아인 주연의 '사도'는 그런 측면에서 이 역사적 사실을 관계적 내러티브 측면에서 잘 해석하고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영조는 극심한 붕당 정치에서 체제 유지를 위해 아들인 '사도'를 가혹하게 키울 수밖에 없는 '왕'이었고, 사도는 그저 아버지의 따뜻하고 다정한 사랑이 필요한 '아들'이었다.
내가 사회에 대해 불만이 많고, 타인에 대해 경계심이 많은 건 사실 아버지 탓이 크다. 10대 때 내 눈앞에서 자행된 수많은 폭음과 폭언과 폭력, 수차례의 외도와 사업 실패, 자살 시도까지. 너무 큰 트라우마 때문에 나는 아직도 의사가 처방해 준 수면제 없이는 잠을 자기가 어렵고,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심장이 쿵쾅거려서 힘이 든다. 매일 밤 수면제를 먹을 때마다 안 좋은 기억들이 떠올라 괴롭다.
조승우가 부른 ost '꽃이 피고 지듯이'의 유튜브 댓글을 보고 인상 깊은 부분이 있어서 발췌한다.
"자식은 부모에게서 버림받아도 사랑하고 원망하고 그리워하지만, 부모는 자식을 버릴 수 있다. 그게 세상이 슬픈 이유다. 어른이 아이를 착취하거나 학대해도 아이는 늘 한편에선 그리워한다."
신앙을 가진 뒤로 3명의 목사를 모셨다. 그들도 나에게 언어적이든, 비언어적이든 작지 않은 상처를 남겼다.
그래도 괜찮다. 아버지든 목사님들이든 다 사정이 있었겠지. 돌아가신 할머니가 세상 모든 일에는 다 사정이 있는 거랬어. 아빠도, 목사님들도 다 자신만의 사정이 있어서 그랬을 거야.
비록 이제는 아버지께 직접 말하지는 못하는 비겁한 나지만, 여기에 내 속마음을 적어 놓는다.
"아빠, 너무너무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