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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태 Dec 22. 2023

기도 or 명상?

진정 이루어지길 바라는가?

지난 10월 어느 날, 오랜만에 다시 탄 자전거 라이딩 중에 적어둔 메모를 올려본다


자전거 타기ㆍ명상ㆍ글쓰기,  오랜만에 미뤄졌던 아침 일과를 다시 시작해 본다.


며칠을 두고도 움직이지 않던 글이 달리기 시작한다.

탄천 벤치, 혼자다.

뒤져볼 책도, 검색해 볼 인터넷 정보도 없다.

의지할 것이 없어지고 미룰 다음이 없이 오롯이 나와 지금만 남게 되니, 갑자기 움직인다.

얼어붙어 있던 , 잠자고 있던 사고가 저절로 줄지어 연결되어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진다.


의지할 수 있는 그 무엇, 미룰 수 있는 다음 순간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진정한 기도는 지금에 충실하는 것이다. 

잘하려고도 말고, 두려워할 필요 또한 없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주어진 그대로 임할 뿐이다. 

그게 최선이고, 최고의 결과를 위한 기도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 또는 막연한 기대가 클수록 무엇인가에 매달리고, 기도하게 된다. 따지고 보면 그래서 신앙이 생겨나게 된 걸 수도 있겠다...

알 수 없고, 의지대로 되지 않기에, 대자연은 신비하고,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나약한 인간들은 자연과 신을 경배하고, 이를 통해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불안감을 해소하고 위안을 얻고자 하는  막연한 마음에서 기원한 게 아닐까? 이런 것들을 우리는 미신이라 이름 지어 왔다.


근데, 되짚어보면 신앙이란 것 또한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인간과 절대자 신과의 관계가 신학이고, 절대자 신에 대한 인간의 의지와 믿음이 신앙이라면, 이 또한 오늘날 우리가 과학이라는 기준으로 분석하자면 규명되지 않고, 근거가 없으니 미신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다만 다수의 집단에 의해 지지받고 있는가 아닌가의 차이일 뿐.


냉정히 놓고 보면 기도하고 소망하는 것들이 이루어질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애초에 실현가능성이 낮으니 비는 것 아닐까?


또 한편으론, 아인쉬타인이나 테슬라 같이 시대를 앞서간 천재 과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해왔다.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고. 우연이란 신이 설명키 귀찮을 때 하는 말이라고.. 


“Coincidence is God's way of remaining anonymous “
우연이란 신이 익명을 유지하기 위해 쓰는 방법이다.   <아인쉬타인>


y=f(x), 즉 원인이 있었으니 결과가 있고, 씨를 뿌렸으니 작물을 거둘 수 있는 것임을.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일어나는 결과란 없다.
다만 f라는 조건ㆍ환경에 따라 그 결과가 지금 나타날 수도, 알 수 없는  먼 미래에 나타날지도 모를 뿐..


다만 모를 뿐, 물을 뿌렸으니, 비도 오고, 구름도 되고, 눈도 되고...

지나가버린 과거에 대한 후회, 미련  또는 집착은 고통만 낳을 뿐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막연한 기대 또한 마찬가지다.


스티브잡스가 했던 스탠퍼드대의 졸업축사 구절, "... connect the  dots..."  결국 과거에서부터 이어져오고 현재 이 순간에도  이어져가는 점들만이 미래로 연결될 뿐이다. (미래에서 지금으로 이어 줄 수는 없다)

결국 연기이고, 또 다른 이름은 과학이다. 이래서 과학문명이 발달한 오늘날 탈종교현상이 일어나고, 다시 신르네상스, 인문학이 부활하고 있나 보다.


불교에서의 자연본성에 대한 탐구법이 기반이 된 참선 명상이 구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  "Here &now" 수처작주 입처개진"이다. 고대 로마의 격언 또한 "Memento Mori Carpe Diem"이라 했다.

다음 순간, 다음 순간, 그 마지막엔 무엇이 있을까?  결과만 따진다면 너나 나나 모두에게 분명히 나타날 fact는 죽음뿐인 것을. 중간의 그 어떤 성취도 일시적일 뿐, 결국은 추락하고, 죽음을 맞게 된다.


그래서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진정 소중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이다. 결과보다는 과정에 최선을 다하고, 즐겨야 하는 이유다. 아이러니하게도, 젊은 층일수록 현실도피나, 막연한 기도와 염원을 좇는 안타까운 모습들이 보인다.


지미카터, 김형석 교수  이런 분들을 보노라면, 삶의 지혜가 절로 묻어져 나온다. 무거운 과거의 영광일랑 내려놓고, 봉사와 감사, 용서로 살아가는 모습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용서는 스스로를 과거로부터의 구속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이며,
감사는 현재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에너지임을...


기도보다는 현재에 대한 알아차림으로 최선을 다하는 명상하는 삶의 자세가 미래에 대한 진정한 답임을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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