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순간, Here & Now
긴 장마에 이어진 무더위 탓인지 탄천 자전거길에 지렁이가 수도 없이 많이 보인다.
아무 생각(?) 없이 내 갈길을 가면, 귀중한 생명을 마구 짓밟고 달리게 될까 저어 되어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해 본다.
이리저리 피하다, 앞서 걸어가는 보행자를 칠 뻔도ㆍㆍㆍ
바로 앞이 아니라 조금 더 멀리에 시선을 두고 달려본다.
잘 보인다. 하나가 아니고 수십 마리의 배열이 보이고, 오가는 사람까지도...ㆍ
이리 보면 알아차림은 부주의의 반대말이긴 하나, 한곳에 집중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듯하다.
늘 오던 목표 지점에서 멈추고 잠시 좌정에 들어본다.
몸은 멈추고 앉았는데, 갑자기 찾아든 배고프다는 생각이 화두를 연다. 돌아가면 뭘 먹지? 이건.. 저건...
생각이 꼬리를 문다. 그러다 오늘 식사약속 걱정까지 이어진다...
뭐 하고 있는 거지?
이상하다, 몸은 멈추었는데, 머릿속은 여전히 잡생각으로 바쁘다.
번뇌망상!
멈춤은 이런 잡생각을 멈추라는 뜻인 것을 ㆍㆍ
몸의 멈춤은 생각의 멈춤과 비움을 돕기 위한 것일 뿐인데, 몸이 멈추고 조용히 앉으면 멈춤이 될 거라는 착각에 빠진다.
명상을 서양에선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라 한다.
이 영어 단어는 빨리어, 사띠(Sati)를 번역한 것인데, 한문으로는 념(念)에 해당한다.
사띠의 정확한 영역은 ‘기억한다’(remember)로 암기를 뜻하는 memory와는 다르다. ‘기억하려면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으므로 그리 옮긴 듯도 하다.
한문으로 풀어보면 더욱 이해가 잘 된다.
지금 (今)과 마음 심(心)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지금 마음을 살펴본다는 뜻인 듯하다.
과거, 미래, 온갖 허상을 멈추고, 지금 여기에 온전히 마음을 두라는 뜻이니, '마음챙김'이라 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원어, 사띠에 충실한 번역은 알아차림이 될 것 같다.
결국 명상의 기본은 알아차림이다.
내 앞에 펼쳐진 지금 이 순간을 왜곡 없이 오롯이 알아차리기 위해
내 시선을 가로막고, 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잡념을 멈추고 비우라 한 것이다.
멋진 프랑스 식당에서 고급진 안심이 올려져 있는데도, 좀 전에 먹었던 크림수프의 짠맛에 실망하고, 다음에 나올 디저트는 “무얼까?” “어떨까?”를 생각하느라, 지금 내 앞에 놓인 안심의 맛과 향은 느끼질 못하는 아둔함이랄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지금, 그리고 여기는 계속 놓치고,
가버린 과거에 연연하거나, 오지도 않은 미래에 휘둘려 다니고 있다.
지금 이 순간만이 實在요, 과거나 미래는 허상임에도..
Here & Now, 지금, 여기서!
수처작주(隨處作主), "어디에 있던 주인으로 임하라!"
Menmento Mori, Carpe Diem!
"죽음을 기억하고 오늘을 잡아라!"라는 로마의 명언을 떠오르게 한다.
다시 눈을 뜨고 평안한 마음으로 그저 바라만 본다.
보인다!
어디에도 머무름 없이 펼쳐진 전체가 내게로 들어온다.
알지 못함 (無明, 無知)으로 인해, 습관적 탐진치(貪瞋痴)가 무의식적으로 계속 일어나고 증식된다.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 속에 탐진치가 남아있는 한, 苦痛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에 대해 무지하기에 어리석은 마음의 습관적 반응에 갇혀 사는 것이다.”
통찰지혜(智, 明知)를 완성하면 어둠(무명)이 사라지고, 어둠속에 숨어 움직이던 탐진치까지 소멸된다.
이에 이르는 첫 단계가 알아차림(念)이다.
또한, 알아차림은 과거나 미래의 환상에 끌려들지 않고 지금 이순간에 머물 수 있게 잡아주는 닻과 같다.
알아차림이란, 지금 이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를 잘 지켜보는 수행이다. 무의식적 습관적 반응 대신 멈추고 통찰을 통해 악업(惡業)으로 연결됨을 예방하기 위한 첫 단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