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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태 Dec 06. 2023

불교 명상법

 사마타, 위빠사나 그리고 메타 수행

명상의 대상과 기법에 따라 다양한 이름의 명상법들이 소개되고 있다. 이중, 오늘날 명상의 기반이 되고 있는 불교 명상 기법을 크게 나누어 본다면, (1) 집중명상(사마타 수행), (2) 통찰명상(위빠사나 수행), (3) 자비명상(메타 수행)을 들 수 있다.

사마타는 멈춤(지/止)을 뜻한다. 옳고 그름의 분별을 멈추고 깨어서 자신과 명상의 대상에 마음을 몰입한 상태에 머무는 선정을 얻기 위한 수행이다. 마음이 평온한 상태에 들지 못하게 되면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을 유지하지 못하고 이내 산만해지거나, 생각으로 대상을 따라다니기 때문에 산만해지기 쉬우므로, 사마타 수행을 통해 고요하고 평온한 선정 상태로 몰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위빠사나는 관찰 또는 통찰을 의미한다. 현상에 대한 허상과 편견을 멈추고, 명상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봄을 통해, 인연 따라 생겨나고 소멸(무상)하는 본질적 원리를 알아차리고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통찰, 열린 마음의 눈)를 닦는 수행이다.  사념처(四念處, 4가지 알아차림의 대상), 신수심법(身受心法), 즉 나의 몸(신), 느낌(수), 마음(심) 그리고 마음이 머무는 대상인 현상(법)을 관찰의 대상으로 한다. 나라고 생각했던 몸, 느낌, 마음, 대상 등이 영원하지 않고 수시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임을 깨닫고, 고통의 원인인 집착을 놓아 해탈(자유)을 구하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수행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 만물은 항상 변하여, 고정된 실체가 없음에도, 이에 집착하여 놓지 못하니 모든 것이 고통스럽다.)    


그러나, 이 두 기법이 각각 독립된 별개의 수행법이라 할 수는 없고, 상호 연동된 수행과정을 기법의 주안점 또는 특징을 중심으로 나누어보자면 그렇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지관쌍수(止觀雙修) 또는 정혜쌍수(定慧雙修)라는 표현으로 강조한다. 진정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지와 관을 함께 수행하여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사마타를 통해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에 든 후에, 위빠사나, 즉 관찰 수행을 이어가라는 것이다. 멈춤을 통한 몰입이 선행되어야 두루 살피는 관찰과 통찰력을 얻게 되고, 종국적으로 진정한 평온과 깨달음에 다다르게 된다는 말이다. 두 기법이 분리된 별개의 수행법이 아니라, 매 순간에 대한 알아차림을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도록 상호 유기적으로 보완해 주는 일련의 과정을 구분하여 설명한 것일 뿐이다.


달리 설명하자면, 지금 이 순간의 알아차림(사띠, 념/念)을 통해 명상으로 접어든 후, 일상의 복잡한 번뇌망상을 멈추고, 허상이 아닌 본질을 잘 들여다 보고, 매 순간 알아차림을 지속해 갈 수 있는 마음 근육을 기르기 위한 과정이 사마타라 불리는 집중명상의 단계에 해당한다. 이러한 집중에 대한 훈련을 통해, 다음 단계에서 이어질 통찰을 지속 가능케 하는 마음의 근력(심근)을 형성하게 된다. 집중하는 훈련을 통해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고요히 머물러 마치 바람 없는 호수와 같은 마음상태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비바람이 잠든 거울 같이 고요한 호수의 표면이라야, 비추어지는 대상이 명료하게 잘 보이는 이치라고나 할까. 해가 지나가면 해를 보여주고, 달이 지나가면 달을 보여줄 뿐, 그 어느 것에도 머무름이 없고,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

우리가 삼매라 부르는 몰입의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독서 삼매경, 또는 영화 삼매경, 심지어는 게임 삼매경에 빠져들게 되면 그 대상 외의 나머지는 사라지고 오로지 그것만이 자리하게 되는 경지를 일컫는 단계라 할 수도 있겠다. 이러한 몰입을 통해, 외부의 잡음이나 번뇌망상에서 벗어나 알아차리고자 하는 지금 이 순간 그 대상을 보다 명료하게 관찰할 수 있게 된다. 간화선에서의 화두나 위빠사나에서의 명상 주제, 염불 또는 만트라(주문) 외기, 생활명상에서의 들숨, 날숨 이름이나 숫자 세기 또는 108배와 같이 특정 근육활동을 되풀이 하는 등이 이런 몰입을 위한 방법에 해당한다.    


구분될 수 없는 유기적 2단계의 기반을 형성하고 있는 또 다른 요소가 자비(慈悲, Metta), 즉 자애(慈愛)와 연민이다.


강한 것은  부러진다 했다. 이솝이야기 속, '바람과 해'처럼, 나그네의 외투를 벗길 수 있는 힘은 센 바람과 같은 물리적 강압이 아니라, 따사로운 사랑이다. 삼매로 이끌 수 있는 힘은, 강제력이 아니라, 좋아서 하는, 즐기는 긍정적 에너지였다. 사랑이라는 긍정적 에너지라야만 진정한 몰입과 통찰로 인도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지도자들께선 집중 명상이란 표현이 잘못이라고도 지적한다. 오히려 집중하려는 노력조차 놓아 버려야 한다고 한다. 지나치게 놓아버리면 해태와 혼침(게으름과 졸림)에 빠지게 되어 알아차림을 할 수가 없으니, 졸림에 빠지지 않을 정도의 중도적 '주의'가 적절한 자세일 것 같다.


한편, 사마타 수행이 집중을 통한 몰입이나, 이런 경직된 몸과 마음으로는 진정한 평온이나 알아차림에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으니, 관찰(위빠사나) 수행으로 바로 들어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신다. 그러나, 필자는 오랜 시간 관찰과 통찰을 할 수 있으려면, 사마타 수행을 통한 심근(마음의 근육)이 형성되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본다. 힘들지만 오랜 시간 근력을 키워왔기에, 단박에 훅 들어가는 몰입이나, 이를 통한 관찰이 가능해진 것 아닐까? 아직 서지도 못하고 걸음마도 떼지 못한 아이에게 "걷는 것보다, 뛰는 것이 더 빠르다!"라고 설명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집중하려는 강압적 노력 없이 몰입으로 이끌 수 있는 에너지는 좋아서,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는 긍정의 힘이다. 그래서 사마타 수행에서도 고행이 아니라 자바로운 마음가짐이 기저에 자리하여야 진정한 몰입으로 접어들 수 있게 된다.


모든 물질은 4요소(지수화풍(地水火風); 흙, 물, 불, 바람)로 이루어졌음에도,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제5원소, 즉 에너지, 또는 기(氣)의 차이라 한다. 물질의 화학적 특성을 유지한 최소 단위인 원자가 고유의 형체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원자핵과 전자 간의 밀당, 밀고 당기는 힘(에너지, 기)의 균형으로 인한 것이고, 형체를 이루고 있는 물질 또한 이들 원자 간의 밀당에 의해 이루어진 공간의 모습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영화 제5원소에서처럼, 결국 다섯 번째 원소, 사랑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진정한 긍정의 힘을 불어넣어 준다고 믿는다.


미움, 원망, 후회, 분노는 지금 이 순간이 아닌, 과거라는 허상의  늪에서 허우적대게 만들 따름이다. 긍정의 힘이라야 현재에 충실하고, 매 순간 마주하는 지금, 이 순간이 이어져 미래로 나아가게 한다. 욕심, 분노, 어리석음이 아니라 사랑, 용서와 감사가 그 긍정의 에너지다. 부정 에너지는 결과를 끌어낼 순 있지만 고통, 분노, 좌절일 뿐, 긍정, 사랑은 현재요, 즐겁고 행복한 과정이다. 미래의 성공, 실패는 중요치 않다.


결과로써의 '나'이기를 원하는가? 나는 오히려 과정으로서의 '나'를 염원한다.  연결고리로서의 '나', '우리'로 이어지는 '나',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내 할아버지가, 내 아버지로, 그리고 나로 이어졌듯이, 나 또한 내 자식, 손자로 이어져가길 바란다. 진정한 사랑과 행복은 희생과 봉사를 거름으로 꽃 피워질 열매다.  한 씨앗에서 시작된 나무가, 꽃 피우고 열매 맺고, 다하듯 스러지지만, 거름 되어 다시 꽃 피우고, 열매 맺는 아름다운 순환의 과정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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