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 되돌아보는 2004년 여행
호텔에 체크인한 시각은 오후 7시였다. 로비에서 느낀 호텔의 인상은 괜찮았다. 그러나 막상 방에 들고 보니 힐튼이라는 이름을 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낡은 시설에서 풍기는 느낌은 '전통'이 아니라 '꾀 제제'였다. 그래도 우린 힐튼이라는 브랜드 네임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데 이게 뭔가. 실망이다. 그냥 짐을 풀까 하다가 믿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방을 바꿔달라고 전화로 프런트 데스크에 요구했다. 호텔 직원은 처음에는 좀 못마땅해하는 듯했다. 왜 그러냐고 묻길래 방이 좁고 깨끗하지 않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자 잠시 고민하다 새로 리노베이션 한 곳으로 바꿔주겠다고 했다. 가방을 끌고 새로 지은 옆 건물의 방으로 들어갔다. 크기는 첫 번째 방과 같지만 새로 지은 것이라 깨끗했다. 미국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불평을 해야 한다.
샤워를 하고 잠시 쉬다가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호텔이 시내에 있으니 바로 앞에 식당들이 많아서 좋았다. 일식집에 들어가서 돈부리, 우동, 히레까스를 시켜서 맛있게 먹었다. 길고 긴 하루였다. 아침에 도착해서 생전 처음 와본 샌프란시스코와 나파, 소노마 와이너리 이곳저곳을 돌아 이제야 여행 첫날을 보내는구나. 얼마 전까지 시내에서 길 헤매던 것을 생각하니 새삼스레 진땀이 났고, 그래도 지나고 나니 그것도 재미있었다고 생각된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하지만 여행이라는 고생은 사서라도 할만하다. 그런 하나하나의 순간들이 모여서 추억이 되고, 경험이 되고, 인생이 되고, 옛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 아닌가.
다음날 아침은 준비해 간 컵라면과 햇반으로 때웠다. 우리 가족은 여행 때 햇반을 애용한다. 아침을 거하게 먹을 필요도 없고 시간도 절약되고 밥맛도 좋다. 김, 김치, 이런 것들과 함께 또는 컵라면과 함께 먹으면 훌륭한 아침식사가 되기 때문이다.
자 이제는 본격적인 샌프란시스코 여행에 나설 시간이다. 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가.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어떤 순간에 행복을 느끼는가. 나는 바로 이 순간에 행복을 느낀다. 여행지에 도착해서 이제 막 여행을 시작하는 순간.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것을 찾아 막 떠나는 순간. 처음이라 낯설지만, 익숙한 길이 아니라 어설프지만, 여행을 떠나는 길은 행복 그 자체다.
첫 목적지는 호텔에서 가까운 사이언스 뮤지엄이다. 우리가 이곳을 택한 이유는 가깝기도 하지만 이미 인터넷으로 구입한 시티패스(City Pass)에 이곳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티패스는 그 도시에서 가볼만한 몇 곳을 묶어서 반값 정도에 갈 수 있도록 만든 패스다. 만약 시티패스가 다섯 곳의 관광지를 묶어놓았다면 시티패스 구입한 사람이 그 다섯 곳을 다 갈 경우 훨씬 이익이다. 샌프란시스코 시티패스는 아시안 뮤지엄을 포함해 박물관 몇 곳과 배 타는 비용, 샌프란시스코의 명물 케이블카를 언제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이 패스를 이용하려면 처음 방문한 곳에서 입장권으로 바꾸면 된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사이언스 뮤지엄에서는 개미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살아있는 개미, 죽은 개미, 개미 사진, 개미사회의 모든 것을 - 모든 것은 아니겠지, 우리가 모르는 개미사회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 전시해 놓았다. 하찮게 보이는 조그만 개미가 고도로 발전된 사회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있는지. 인간이 멸종해도 개미는 멸종하지 않을 만큼 강한 생명력을 개미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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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여행 갈 때 과일과 기내에서 먹을 것을 싸가지고 다녔다. 호텔 내에서 간단히 해 먹을 수 있는 물 끓이는 도구와 컵라면, 햇반, 약간의 반찬도 가져갔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것들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편하기는 지금이 좋지만, 소피 세라와 아웅다웅 호텔방에서 컵라면이나 3분 카레 등을 해 먹었을 때가 재미는 더 있었다.
여행지에 도착해서 호텔에서 하루를 자고 다음날 아침 여행을 떠나는 순간을 가장 좋아했던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벌써 18년이나 지났음에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