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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ue Bird Jul 24. 2020

캐나다 로키 여행 10

2020년에 돌아보는 2009년 여행

재스퍼를 벗어나서 한참 달리다 보면 만나는 경치

밤 10시쯤이다. 온천이 거의 끝날 시간인데도 아직 해가 지지 않았다. 오늘의 숙박지는 바로 코앞이다. 샤워 한 번 한 후 슬리퍼를 끌고 어슬렁어슬렁 방갈로로 왔다. 방갈로로 들어오니 별로 할 일이 없다. 방갈로 안에는 벽난로가 있지만 때가 여름이라 벽난로를 피울 수도 없고, 마시멜로를 구워 먹을 수도 없다. 맥주 두 캔 들고 방갈로 바로 앞에 있는 피크닉 벤치에 앉았다. 이제 조금 있으면 해가 서서히 지고, 노을이 타오르는 시간을 즐길 생각이다. 나는 이 방갈로가 괜찮은데 세라는 앞으로 방갈로 같은 데는 절대로 안 오겠다고 한다. 세라가 그러는 이유는 호텔보다 좀 지저분하기 때문일까? 밖에 가끔씩 벌이 왔다 갔다 하기 때문일까? 산속 방갈로의 매력이 이런 터프한 맛인데 세라는 아직 그런 맛을 잘 모르는 나이인 것 같다. 이런데 여럿이 와서 노는 거, 그런 게 얼마나 재미있는데..  


해지는 재스퍼

밖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는 내가 처량하게 보였는지 잠시 후 소피도 나왔다. 문 꼭 닫고 방갈로 안에 있던 세라도 심심했던지 뒤따라 나왔다. 노을이 아름다운 색을 마음껏 뿜어내고, 주위는 점점 어두워지고...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내일을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내일은 일정이 빠듯하기 때문에 새벽부터 움직일 생각이다. 당초 계획은 재스퍼에서 캠룹으로 간 다음 거기서 하루 자고 밴쿠버 아일랜드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굳이 캠룹에서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는 바에야 그냥 밴쿠버 아일랜드로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 싶어 일정을 변경했다. 거리상으로 좀 무리한 계획이라는 것은 알지만 "가는 데까지 가보자"는 생각이다. 어찌 될지 몰라 호텔 예약도 하지 않았다. 눈을 뜨자마자 출발하자.  


사람이 일찍 일어나겠다고 마음먹고 자면 일찍 일어나게 마련인가. 세시 반 정도부터 잠이 깨어 통 잠이 오지 않는다. 먼길을 운전하려면 잠은 충분히 자야 하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그때부터 자다 깨다를 반복 하다 5시 반쯤 일어났다. 컵라면 먹고, 커피까지 챙겨마시고 그렇게 방갈로를 새벽같이 출발했다. 6시도 채 안되었지만 날이 벌써 훤했다. 꼬불꼬불 들아왔던 산길을 한참 돌아나가야 한다. 

"이런 새벽엔 짐승들이 아침을 먹으러 나오기 때문에 곰이 나올지도 몰라" 

어디서 읽은 것은 아니지만 상식적인 생각으로 세라에게 그렇게 말한 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았다. 모퉁이를 하나 돌아서 조금 올라가는데 아스팔트 도로에 블랙베어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나도, 세라도, 소피도, 곰도, 차도 모두 깜짝 놀랐다. 속력을 줄이며 서서히 앞으로 가자 곰은 힐끗 우리 쪽을 한 번 보더니 숲 속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사진, 사진.." 내가 말하자, 세라가 제 딴에는 얼른 카메라를 찾아서 파워를 켰지만 곰은 유유히 사라진 뒤였다. 세라는 또 곰이 나올지 몰라 카메라 파워를 켠 채 들고 있었지만 산길을 벗어날 때까지 곰은 나타나지 않았다. 


재스퍼에서 빅토리아로 가는 중에 만난 야생동물


산길을 벗어나 하이웨이를 달리는데 머리에 뿔이 멋있는 엘크, 사슴 같은 초식동물들이 군데군데 모여있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로키는 동물의 왕국이다. 재스퍼에서 빅토리아가 있는 밴쿠버 아일랜드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일단 캐네디언 로키에서 가장 높은 Robson Mt. 쪽으로 갔다가 5번 하이웨이를 타고 캠룹쪽으로 내려오는 길이다. 그리고 계속 5번 도로를 따라 내려가 tsawwasen 항구에서 페리를 타고 빅토리아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이 길을 하루 만에 갔지만 누가 우리처럼 하루 만에 가겠다고 하면 말리고 싶다. 운전자가 여럿이면 몰라도 혼자서는 정말 무리다. 달리고 달리고 달리고... 졸면서 달리고, 노래 크게 틀어놓고 달리고, 핸들 오른손으로 잡았다가 왼손으로 잡았다가 하면서 달리고, 좀 쉬다가 달리고.. 별짓 다해도 무진장 피곤했다. 내 모습이 거의 못 봐줄 지경에 이르렀는지 소피가 자기가 잠시 운전해보겠다고 자원한다. 소피가 운전을 못하는 건 아닌데 아무래도 손에 익은 우리 차가 아니고 랜트카 인 데다가, 차도 크고 무겁고, 길도 처음 가는 길이라는 이유로 운전대를 맡기지 않았었다. 소피도 운전하기를 꺼려했다. 하지만 너무 피곤해서 한쪽에 세우고 " 딱 5분만 쉬었다 가자"  말한 후 잠시 생각해보니 갈 길이 먼데 쉬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았는지 잠이 오지 않았다. 방금 전까진 눈꺼풀이 마냥 내려왔었는데.. 오는 중간에 커피를 서너 잔 마시고, 세라가 "5 hour energy"라고 해서 안 먹던 레드 불까지 마셨는데... 졸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한 5분 쉬는 동안 운전해볼래?"

"우리 차랑 똑같아"

"하이웨이가 더 쉬워" 

소피가 용기가 났는지 해보겠다고 나섰다. 얼른 자리를 바꿔 핸들을 내주고 나는 옆자리에서 의자를 좀 눕혀놓고 잠을 청했는데... 이놈의 졸음은 운전할 때만 오는지 또 잠이 안 온다. 이번에는 소피가 운전 잘하나 걱정이 돼서 감시하느라 잠을 못 자는 거다.

"앞차랑 너무 붙지 마" 

"맨 앞에 가지 말고 항상 다른 차를 따라가"

이런 소리를 하다가 졸다가 깼다가 그렇게 두 시간 정도 지나니 이제야 캠룹이 나왔다. 아까 말은 안 했지만 이전까지는 지대가 높아서 차가 구름을 뚫고 지나는 경우가 많았다. 경치는 기막힐 정도로 좋았지만 몇 시간을 가야 마주오는 차를 겨우 한 대 구경할 수 있을 정도로 한적했었다. 그러니 졸릴 수밖에. 캠룹에 왔다는 말은 오늘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의 반 정도를 왔다는 말이다. 쉬었다 가야겠다. 차가 많아지니 운전을 다시 내가 하는 게 좋겠다. 웬디스가 눈에 띄었다. 햄버거, 프랜치 프라이, 커피, 음료를 먹으며 한 시간 정도 푹 쉬었다. 온 만큼 또 가야 하기 때문에. 거의 다 먹어가는데 가방 속을 더듬던 소피의 얼굴색이 변했다. 

"여권 하고 신분증이 어디 갔지..."

".... 뭐...?..." 

신분증을 재스퍼의 방갈로에 두고 왔다면 미국 입국 시 곤란해질 것이 큰 걱정이다. 오늘 새벽부터 지금까지 고생하며 왔던 길을 다시 가야 한단 말인가? 갑자기 등골이 오싹, 앞이 깜깜.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나? 거긴 가까운 공항이 없는데... 방갈로 오피스에 전화 해서 FeDex로 붙여달라고 해볼까... 별 생각이 다 들던 찰나, 다행히 다른 작은 가방에 잘 있다고..... 죽다 살았다. 놀란 가슴 달래며 다시 캠룹을 출발했다. 씩씩하게 빅토리아를 향해서.




여행하면서 소피가 내 가슴을 철렁하게 한 적이 몇 번 있었다. 아마도 그중에 재스퍼에서 빅토리아로 가는 도중 "여권이 안 보인다"라고 했을 때가 압권이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7~8 시간을 운전해서 힘들게 왔는데 여권을 두고 온 것 같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다. 오래 운전하느라 눈은 감기고 허리는 쑤시는데 그 길을 다시 돌아가서 여권을 가지고 다시 온다고 생각하면 까마득하지 않을 수 없다. 


뉴욕의 공항에서도 그랬다. 막 도착해 공항 내 트램을 타고 베기지 클레임으로 가는 도중에 소피가 끌고 다니던 캐리어가 하나 없어진 것이다. 멀쩡하게 잘 들고 다니다가 트램을 갈아타면서 그냥 차에 두고 내린 거다. 끌고 다니던 캐리어를 두고 그냥 가면 손이 뭔가 허전할 텐데. 안내원에게 말해서 결국 캐리어를 찾았으니 다행이다. 이제 막 여행지에 도착한 상황인데 짐의 반 정도가 들어있는 캐리어를 잃어버렸다면 무척 곤란했을 것이다.


뉴욕에서는 또 한 번의 사연이 있다. 뉴저지에 호텔을 잡고 맨해튼으로 구경을 나왔는데 지하철에서 나오면서 지갑이 없다는 것이다. 가방이 열려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지하철에서 날치기당한 것 같은데 확실치는 않다고 한다. 호텔에 놔두고 온 것 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약 지하철에서 날치기를 당했다면 얼른 신용카드 회사에 전화해서 막아놓는 것이 상책이다. 만약 호텔에 놔두고 왔다면 신용카드를 막을 필요가 없다. 호텔에 돌아가서 확인하려면 하루가 다 깨지고 오늘 맨해튼 구경도, 뮤지컬 관람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어찌해야 하나.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지갑이 호텔에 잘 있을 것이라 믿고 그냥 맨해튼 구경하고 뮤지컬도 봤다. 이따금씩 지갑 생각이 났지만 일부로 생각을 다른 데로 돌렸다. 저녁에 불안한 마음으로 호텔에 갔더니 지갑은 시치미 뚝 떼고 방에 얌전히 있었다. 그때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던 일들이었는데 지나고 나니 그 또한 추억이 된다. 그래서 여행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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