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 돌아보는 2009년 여행
가도 가도 끝없는 길을 가고 또 갔다. 도대체 밴쿠버는 언제 도착할까. 빅토리아로 가는 페리를 타는 Tsawwassen 항구는 또 언제 도착할까. 오늘 내로 갈 수는 있을까. 가는 중간에 개스를 또 넣었다. 오늘 아침에 넣었는데 하루 만에 개스를 두 번 넣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운전하는 나보다 더 피곤해 보이는 소피와 세라를 싣고 하염없이 간다. 얼마나 피곤하면 깨어있는 시간보다 조는 시간이 더 많을까? 운전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차만 타는 것도 참 피곤할 일인가 보다.
마침내 GPS가 도착시간 30분 이내를 표시하고 있다. 한참 운전하고서 얼마쯤 남았는지 GPS를 힐끗 쳐다보면 겨우 5분이나 10분쯤 줄었다. 거의 도착했는데 항구 들어가는 길이 상당히 복잡해서 한 20분쯤 헤맸다. 그래도 결국은 도착했다. 페리로 들어가는 차들이 여러 줄로 늘어서 있다. 차를 타고 부두로 들어가면서 페리 승선권을 샀다. 우리가 승선하는 페리는 오후 7시 출발이다. 한 30분 정도 시간이 있었다. 차를 줄 세워놓고 번갈아 가며 화장실도 다녀오고 젤라또도 사 먹었다. 이제 고생은 끝났다. 차에서 내리는데 엉덩이, 어깨, 다리... 온몸이 뻐근하다. 그래도 결국 오늘 내로 밴쿠버 아일랜드로 들어가게 됐다. 섬에서 맞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렇지, 오늘 잘 호텔을 예약해야 하는구나. 먼저 안내책자와 항구에 있던 브로슈어를 보고 몇 개의 호텔을 점찍어 두었다. 몇몇 호텔에 전화해 봤지만 방이 없거나 가격이 너무 비싸거나 였다. 이따가 배에 탄 다음에 하자. 너무 피곤하다.
차를 배에 싣고 맨 앞쪽, 경치 좋은 카페테리아에 자리를 잡았다. 배는 정시에 움직이기 시작했고 쾌적했다. 밖을 바라보며 잠시 쉬다가 호텔 브로슈어를 다시 연구하기 시작했다. 배가 도착하기 10분 전에 차로 내려가서 몇몇 호텔에 전화를 하고 결국 한 호텔로 점찍었다. 이름을 많이 들어본 호텔이라면 그냥 예약하겠지만 처음 들어본 이름의 호텔이니 어떤가 직접 가 본 다음에 결정하기로 했다. 마침내 항구에 도착했다. 거기서 또 한 15분쯤 운전해 찍어둔 호텔을 찾았다. 아주 좋은 호텔은 아니지만 있을 것 다 있고 실내가 꽤 넓었다. 너무 피곤해서 맥주를 사러 나갔지만 너무 늦어서 가게가 모두 문 닫았다. 그냥 호텔에서 우리가 가진 양식으로 대충 저녁을 때우고 꿈나라로 논스톱 직행.
그래도 아침에는 비교적 일찍 눈이 떠졌다. 오늘 구경할 것이 많고 빅토리아에서는 오늘 나가기로 되어 있기 때문일까. 몸이 스케줄대로 움직이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오늘 들러야 할 곳은 가까운 Fairmont Empress Hotel을 시작으로 브리티쉬 콜롬비아 박물관, 주청사, Butchart Garden 등이다.
먼저 우리가 묵은 호텔에서 잠을 싼 후 아침을 밖에서 먹을 생각으로 밖으로 나왔다. 호텔 주변이 Inner Harbor다. 가운데 항구가 있고 거의 빙 둘러 거리가 있는 풍경이 인상적이다. 재즈 페스티벌이 열리는 곳이 바로 이곳이라고 하는데 그 분위기가 눈에 선하다. 항구를 둘러싼 곳곳에 하얀색 의자가 놓아지고 곳곳에 사람들이 앉아서, 서서 색소폰, 클라리넷, 플루트, 오보... 그리고 기타의 소리가 어우러진 화음을 듣는 분위기 아닐까.
아침을 어디서 먹을까 하다가 마침 구경하던 Fairmont Empress Hotel에 브런치가 있어 거기서 먹기로 했다. 굉장히 비싼 호텔이긴 하지만 식당 분위기가 아주 좋다. 가격도 브런치라 그리 비싸지는 않다. 아침으로서는 좀 비싸긴 하지만. 메뉴에 있는 이름이야 거창해도 결국 계란, 감자, 소시지, 야채, 이런 것들이 다다. 여러 잔의 커피와 함께 천천히 오랜만에 여유 있는 아침을 즐겼다.
여행을 하다 보면 가끔 약간의 사치를 부리고 싶다. 빠듯한 스케줄임에도 한가롭게 좀 쉬고 가고 싶은 것, 절약하는 가운데에도 좀 비싼 음식을 먹고 싶은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바쁘다고 얼른 구경하고 사진 찰칵 찍고 떠나는 여행... 글쎄. 그렇게 시간을 절약해서 비록 몇 곳을 더 보는 것이 좋을까. 마음이 급하고 나중에 남는 게 적다. 멋진 경치를 만나면 그곳에서 한두 시간, 또는 반나절이라도 보낼 수 있는 여유를 부릴 줄 알아야 한다. 어차피 모든 것을 구경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음식값을 절약한다고 싼 것만 먹는 것이 여행경비 절약에 도움은 될 수 있다. 하지만 때로는 먹고 싶은 음식을 먹어야 맛이다. 조금 비싸다 (너무 비싸면 곤란하겠지만) 싶어도 그 음식을 먹고 싶다면 그만한 사치는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Fairmont Empress Hotel에서 먹은 브런치가 그렇게 비싼 것은 아니지만 그 식당의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그 값이면 그날 아침에 먹으려던 우리의 맥도널드 아침식사비의 7~8배 정도는 되겠지만 그래도 그곳이 좋다면 거기서 먹어야 한다.
다시 호텔에 들어가서 짐을 싸서 나오려다가 주청사를 먼저 들르는 것이 낫겠다 싶어 그곳으로 향했다. 브리티시 콜롬비아 주청사는 외관도 멋있고 내부도 멋지다. 하지만 지난해 들른 워싱턴 주청사보다는 감동이 적었다.
내가 만약 브리티시 콜롬비아 주청사를 먼저 갔더라면 이곳에서 큰 감동을 받았을 수도 있다. 유사한 것을 두 가지 본다면 항상 처음 보는 것에 대한 감동이 크다. 우리 가족은 이런 곳에 들어오면 거의 대부분 흩어져서 구경을 한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각자의 취향이 다르고, 보는 속도가 다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세라가 가장 빠르고, 다음은 나, 꼴찌가 소피. 세라는 제대로 보는지 의심스럽고, 소피는 너무 자세히 천천히 보려다가 나중에 보게 될 것을 소홀히 하기 쉽다. 그럼 내가 가장 적절한 속도인가? 이건 순전히 주관적인 생각이겠지...
주청사에서 나온 후 호텔로 가서 체크아웃했다. 오늘 밴쿠버 아일랜드를 나가기 전에 가야 할 곳이 이제 두 곳 남았다. 먼저 브리티시 콜롬비아 박물관. 이곳은 박물관이라고 하기엔 규모가 작았다. 대부분의 전시품이 우리의 솟대와 유사한 인디언 pole이다. 나무가 많은 지역이니 아마도 인디언들이 그들의 역사를 나무에 새겨놓는 것이 하나의 문화가 된 듯싶다. 인디언을 조상으로 둔 후예라면 그 나무기둥에서 뭔가 와 닿는 느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별로다. 그저 나무에 조각을 해놓은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폴 보다는 특별 전시실에서 본 오래된 접시세트, 병, 조각.. 이런 것들이 더 내 관심을 끌었다.
마지막 남은 곳은 밴쿠버 아일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Butchart Garden이다. 이곳은 한 100년 전쯤 Robert Pim Butchart라는 사업가가 시멘트 생산을 위해 돌을 캐려고 구입한 땅이다. 그는 이곳에서 돌을 다 캐고 난 후 쓸모없어진 땅을 아내에게 맘대로 하라고 주었다. 그의 아내는 취미로 조그맣게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고, 차츰차츰 정원이 커지면서 오늘에 이른 곳이라고 한다. 이 정원의 셀 수 없는 꽃의 종류는 물론, 그 규모가 놀랍다. 꽃도 신기한 것들이 참 많다. 어떻게 저렇게 생길 수 있을까 생각될 정도의 모양, 정말 기막힌 색깔... 부차트 가든에서 느낀 자연의 오묘함은 극치에 달하고 있었다. 세라는 자기가 만약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면 매일 이곳에 오고 싶다며 좋아한다. 카메라를 주었더니 사진을 무진장 찍어댄다. 필름이 안 드니 망정이지. 땡큐 디지털 테크놀로지.
http://en.wikipedia.org/wiki/Butchart_Gardens
11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밴쿠버 아일랜드에 갔을 때 몇 박 더하고 오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 앞 일정도 그 뒤 일정도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일정 자체를 그렇게 빡빡하게 짜는 것이 아니었다. 재스퍼에서 하루 종일 운전해서 페리를 타고 들어간 빅토리아에서 하루만 자고 나올려니 그때도 좀 아쉬웠지만 지금은 더 아쉽다. 차도 있었으니 밴쿠버 아일랜드를 아래부터 위로 더 많이 구경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름난 관광지가 아니더라도 천천히 운전하면서 가다 보면 아름다운 곳, 멋진 곳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곳이 그곳이 아닐까 생각된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밴쿠버 아일랜드만 일주일 정도 일정으로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여름과 가을에도 좋을 것이고, 겨울에 가더라도 아예 추운 것을 각오하고 겨울 풍경을 만끽할 생각으로 가는 것도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될 것이다. 캐나다는 아직도 자연 그대로인 곳이 너무나 많은 곳이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곳, 아무런 정보나 관광시설이 없는 곳을 다니는 것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보의 부족은 미지의 장소에 대한 기대로 채워진다. 어떤 자연, 어떤 풍경이 갑자기 나타나서 나에게 얼마만 한 감동을 줄지 모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뻔하게 진행되는 스토리 전개보다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스토리가 더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