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 돌아보는 2009년 여행
밴쿠버에서의 여행 일정은 3일 정도로 잡았다. 첫날은 될 수 있으면 교외 쪽으로 나가고, 둘째 날은 밴쿠버에 갔다가 안 가보면 이상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유명한 스탠리 공원 중심으로, 그리고 셋째 날은 오후에 호놀룰루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야 하니 멀리 안 가는 일정을 세웠다.
그래서 밴쿠버에서 첫 밤을 보내고 다음날 일찌감치 간 곳은 어딜까? Fishery다. 연어의 알을 부화시켜 어미연어로 키우는 곳이다. 아침 일찍 와서 그런지 아주 한적하다. 사람들이 그리 많이 찾는 곳은 아닌 모양인지 시설도 관광객의 관심을 끌 정도로 잘 되어 있지는 않았다. 여러 수족관이 연결된 것 같은 모양의 통 속에 연어가 수 천마리, 수 만 마리 가득하다. 통이 좀 더 깨끗했으면 잘 볼 수 있을 텐데. 피셔리 그 자체보다는 주변 경관이 한적하고 고요한 것이 마음에 든다. 계곡과 산이 어우러져 있는 곳인데 옛날에는 이 자연 상태의 계곡을 연어가 뛰어올라갔다고 한다. 계곡이 꽤 높아서 나도 기어올라가기 어려울 정도인데 어떻게 발 없는 연어가 올라갔을까.
약간 걸어서 올라가니 나무가 하늘을 찌르듯 서 있는 곳이 있다. 10여 명의 단체 관광객들이 앞에서 걸어 올라가고 있다. 미국에서는 단체관광객을 보기가 어려운데 이렇게 산 같은 곳에서는 소규모로 가이드가 안내하며 다니는 것을 종종 볼 수가 있다. 에코 투어라고 부르는, 자연을 안내하는 소규모 여행사들이 운영하는 프로그램이다.
다음 목적지인 Grose Mountain은 피셔리에서 10분도 안 걸리는 가까운 곳이다. 겨울에는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 스키를 타고 내려오는 이곳은 밴쿠버 시내에서 가까워 시민들이 스키 타러 많이 찾는 곳이다. 여름에도 그 시설을 그냥 두지 않고 곤돌라를 그대로 운영하면서 위쪽에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며 보이는 밴쿠버 일대의 경치가 일품이다. 갑자기 단어 선택에 한계를 느낀다. 어떻게 여러 다른 경치를 표현하는데 '일품이다'라는 말로 밖에 설명할 수 없을까. '죽인다' '멋지다' 이런 말도 진부하다. 말이 부족하다.
위에 올라가서는 무진장 떨었다. 위쪽에서 몇 가지 쇼를 보다 보니 높은 곳에서 두세 시간 머문 것 같은데 추워서 혼났다. "2009년 여름, 한 여름 대낮에 그로우스 마운틴 꼭대기 근방에서 추워 벌벌 떤 날" 이렇게 기억해야겠다. 위에서 하는 쇼는 대개 나무를 소재로 하는 것. 무진장 높은 나무로 올라가서 떨어질 듯 말 듯 사람 등골을 오싹하게 하거나 도끼로 나무 조각하는 시범, 물 위에 통나무 하나 띄어놓고 두 명이 올라가서 서로 떨어뜨리는 게임, 다양한 새 조련 시범.. 이런 것들인데 그들이 나누는 대화와 표정이 상당히 재미있다.
거기서 오랜 시간을 보내다 밴쿠버 시내로 들어오면서 캐나다 플레이스에 들렀다. 관광책자에 '가스 증기로 가는척하는 시계' 어쩌고저쩌고 써놓았지만 별것 아니다. 옛날에는 증기시계였지만 지금은 증기는 모양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걸 찾으려고 한참을 헤맷는데 스타벅스가 나타나서 '커피나 한 잔 하고 천천히 찾아보자' 하는 생각으로 스타벅스에 들어가려는 순간 바로 앞에 문제의 시계가 떡 버티고 서 있는 게 아닌가.
일단은 커피를 한 잔 하고 나와서 시계 앞으로 다가가는데 어느 백인이 다가오더니 자기가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한다. 여기도 꽤 친절하군... 생각하며 고맙다며 카메라를 맡겼다. "좀 더 앞으로, 뒤로, 왼쪽으로..." 프로처럼 자리를 선정해주더니 한 장 딱 찍고 나자마자 홈리스 도네이션으로 2달러를 달라고 한다. 사진도 찍어 줬는데 안 줄 수도 없다. 이것이 이 사람의 비즈니스다. 시계 앞에서 얼씬 거리다가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나면 사진 찍어준 후 푼돈 받아 챙기는 비즈니스. 그 돈이 홈리스에 전달되지는 않을 듯싶다. 얄팍한 상술에 (이건 상술이 아니라. 조그만 계략이 맞는 표현이다) 약간 기분이 상했다. 어쨌거나 거리를 좀 더 걸어 올라가 캐나다 플레이스에 들렀다. 캐나다 플레이스도 겉모양만 멋질 뿐, 극장과 바다, 새가 어우러진 특이한 모양의 건물에 불과했다.
어딘가에 여행 갔을 때 대체적으로 인공적인 것을 봤을 때보다는 자연적인 것을 봤을 때가 감동이 훨씬 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봤던 인공적인 것 중에서 가장 감동이 큰 것은 무엇일까? 이탈리아 로마의 포로 로마노를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옛날 로마시대 그들의 삶의 중심지였던 그곳이 감동이 컸던 이유는 그 시대의 역사가 유적지에 투영되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로마 역사를 읽었고,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문학작품을 읽었기 때문에 그 무대가 되었던 곳을 직접 가보게 되니 감격이 더했던 것이다. 그런데 포로 로마노는 건물들이 모여있는 하나의 지역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인공적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자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인공적인 것으로서 그다음으로 꼽을 만한 것들은 로마의 콜로세움, 바티칸 대성당,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등이 있다. 그밖에 많은 인공적인 것들은 그 유명세에 비해 그리 감동적이지는 않았고,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이 많았다.
반면 자연적인 것들은 의외의 장소에서 감동적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 캐나다 로키의 밴프에서 재스퍼 가는 길에서 끊임없이 펼쳐지는 설산 봉우리들과 호수들이 감동을 주었다. 애리조나와 유타주의 그랜드캐년, 자이언캐년, 브라이스 캐년, 유타주의 물길 따라 걷는 네로우 계곡 이런 곳들도 역시 큰 감동을 주었다. (그랜드캐년은 기대를 너무 해서 그런지 오히려 다른 계곡보다 감동이 크지는 않았다. 너무 멀고 나와 동떨어진 느낌이었다고 할까. 그래도 다른 인공적인 것에 비하면 훨씬 감동적이었다) 그뿐 아니라 알래스카나 워싱턴주, 미동북부 버몬트 등에서 차를 운전하면서 그냥 스쳐 지나며 보는 자연의 모습도 인공적인 것이 주는 감동에 비하면 비교가 안될 정도로 컸다. 인간이 아무리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낼지라도 자연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보잘것없음을 새삼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