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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seeker May 28. 2020

(1/2) 강렬한 희망의 의지 해바라기

해바라기, 빈센트 반 고흐, 그림이야기

"나를 웃게 하는건... 희망입니다"


영화 해바라기의 포스터 속 주인공 오태식 (김래원)이 활짝 웃는 건 오직 희망 때문이었다. 고교 중퇴 후 주먹으로 살아가는 인생, 술 먹으면 개가 되고 싸움을 하면 피를 본다는 그는 칼도 피도 무서워 하지 않는 잔혹함으로 ‘미친 개’ 라고 불렸다. 석방이 되고 과거는 모두 잊어버린 듯 목욕탕도 가고, 호두과자도 먹으며 일상을 누리며 살아가는 주인공은 감옥으로 찾아와 희망 수첩을 줬던 덕자 (김해숙)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친아들 이상으로 챙겨줌에 희망을 품고 세상에서 오직 그녀와 딸만의 믿음 속에서 그녀들이 운영하는 희망의 쉼터, 해바라기 식당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는 내용이다.    

 영화 ‘해바라기’ 포스터 (출처 : 네이버영화)

그렇게 해바라기는 항상 뜨거운 태양을 향해 꼿꼿하게 머리를 세운 당당함 만큼이나 희망에 대한 마스코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정 폭력이나 불우한 환경의 아이들을 보호하는 시설이나 단체들은 보통 해바라기나 그 이름에서 파생된 변조어를 이용해서 명칭을 짓기도 한다. 종교적으로도 주바라기와 같이 열망하고 희망하는 것에 대한 메시지를 담을 때 빠지지 않고 사용되는 것이 해바라기이다. 유독 해바라기를 좋아하는 필자는 촘촘히 짜진 일정의 배낭여행 동안도 Eurail을 타고 이동 중 이탈리아 어느 들녘에 펼쳐진 해바라기 밭에 매료되어 중간 정차역에 계획도 없이 불쑥 내려 해바라기 밭을 바라본 경험이 있다. 여행의 즐거움과 의미를 배가하는 것에는 그 여행의 컨셉이 매우 크게 작용하는데 이런 해바라기를 생각할 때 젤 먼저 생각나는 것 중 하나가 해바라기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이지 않을까? 필자는 빈센트의 해바라기 그림을 모두 찾아 보겠다는 의지로 여행을 기획하기도 했었다.

이름도 모른는 이탈리아 어느 역 앞 해바라기 들녘


해바라기 화가 빈센트 반 고흐 (1853 - 1890)


37년의 짧은 삶이었지만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로 기억되는 빈센트 반 고흐, 그 기억의 대부분은 그의 작품의 미술사적 가치와 의미보다는 빈센트의 삶과 예술가로서의 광기어린 열정에 매료된 이들의 마음이 반영된 것이다.  빈센트는 사랑 받는 숱하게 많은 작품들을 가졌지만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해바라기 일 것이다. 해바라기는 빈센트 자신에게도 매우 큰 의미가 있는 그림들이고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그림이다.
빈센트 반 고흐는 마음에 드는 소재는 디테일을 달리해서 여러 점을 되풀이해서 그렸다. 그 중에는 Replica (원작자가 자기신의 작품을 동일한 재료, 방법, 기술을 이용하여 똑 같은 모양과 크기로 원작을 재현하는 것) 작품도 있는데 ‘감자를 먹는 사람들’, ‘자화상’, ‘구두’, ‘랑글루아 다리’, ‘씨 뿌리는 사람’, ‘빈센트의 침실’, ‘자장가’, ‘보리밭’, 그리고 ‘해바라기’ 그림이 이에 해당된다.




빈센트 반 고흐는 모두 12점의 해바라기 그림을 그렸는데 Sunflower 그림에는 두 가지 시리즈를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는 1886 ~ 1887년 그가 파리에서 동생 테오와 함께 있을 때 그린 5점이고, 다른 하나는 1888년부터 1889년까지 프랑스 남부 아를에 정착하여 그림에 몰두했던 시절 그린 작품들로 모두 7점을 그렸다. 두 시리즈의 해바라기 그림에서의 큰 특징은 꽃의 놓여진 상태에서 구분된다.

Two Cut Sunflowers, 1887 Metropolitan Museum, New York, USA (좌),
Two Cut Sunflowers, 1887 Kunst Museum, Bern, Switzerland (중)
Four Cut Sunflowers, 1887 Kroeller-Mueller Museum, Otterlo, Holland (우)


그가 화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던 초기인 파리 시절에 그린 해바라기는 둘 또는 네 송이로 주로 놓여진 모습이었고 아를에서 그린 꽃들은 풍성하게 활짝 핀 모습으로 꽃병에 꽂혀져 있었다. 아를에서의 해바라기는 작품 수가 더해질수록 해바라기의 송이가 많아지고 시들기 전 작업을 마쳐야 하는 어려움에도 폭발적인 힘으로 엄청난 작업 양을 만들어 내고 붓터치의 중량감이 느껴져 완성도와 화가의 만족도가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폭발적인 작업량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곧 실현되는 고갱의 방문으로 그가 꿈꾸던 예술가들의 공동 창작공간을 완성하게 되고 그 공간을 비춰주는 빛과 같은 존재의 의미로 워너비인 고갱이 극찬하고 좋아했던 해바라기의 다작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 일화는 1887년 파리에서 빈센트와 고갱이 처음 만났을 때 서로 작품을 주고 받았다. 이때 빈센트가 고갱에게 준 작품이 파리에서 그린 해바라기 2점이었다. 고갱은 해바라기의 작품에 경의를 표하고, 고갱 자신이 재정적인 문제로 1890년 모든 소유를 팔고 파리를 떠나 남쪽 바닷가로 이주하기 전까지 그의 파리 아파트 침실에 이 작품들을 걸어두었다. 그리고 아를에서 도망치듯 떠난 고갱은 후에 빈센트의 동생 테오를 통해 사과의 편지를 보내면서 빈센트에게 노란집 고갱의 방에 걸려있던 해바라기를 선물로 보내주기를 청했다고 하니 고갱이 빈센트의 해바라기 그림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빈센트를 해바라기의 화가로 불리게끔 한 것은 아를 시기의 해바라기 때문이다. 파리에서도 해바라기를 그린 적이 있었으나 해바라기의 화가의 면모는 역시 태양을 쫓아 절규하는 황색의 해바라기의 모습이 황색의 테이블 위에 있는 황색의 꽃병에 담긴 그림 때문이었다. 강렬한 생명력에 불타는 새로운 해바라기로 그의 7점의 해바라기 그 이전도 이후도 전무한 살아있는 듯한 그림 이었다. 붓질, 색채의 구사, 구도 등에서 독자적인 조형 기법을 한껏 발휘한 작품들로 그것은 여러 가지 꽃들을 그린 전통적인 장식적 정물이 아니라 태양의 조각이요, 빛과 강인한 발육의 기쁨을 노래한 시이다. 빈센트는 해가 뜨자마자 일어나 이른 아침에 꽃들이 시들기 전에 재빨리 그려야만 했다. 노란 햇빛의 도취가 캔버스 전체를 물들인다. 빈센트는 형식에 거의 얽매이지 않고 본질적으로 자유로우며 균형 잡힌 관대한 배치를 찾아내어 이 거대한 꽃의 전반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그의 붓은 여느 때와 같이 솔직하게 통상적인 빛나는 배경을 바탕으로 꽃잎과 꽃받침, 잎, 줄기의 다양한 질감과 색조들을 모색해 내었다.

구글 크롬 마크에도 쓰여진 크롬 옐로 색상에 굉장히 의존했던 빈센트는 이 노란색을 이용하여 균형 잡힌 구성을 이끌어내고 인상주의자들이 극적인 효과를 위해 쓰는 보색의 대비를 충분히 강렬하게 자아내었다. 예전부터 쓰였던 색이 아니다 보니 빈센트는 더욱 크롬 옐로를 많이 활용했다. 크롬 옐로는 1762년 시베리아 안쪽의 베레소프 금광에서 발견된 진홍색의 수정에서 비롯되었다. 홍연광 또는 향신료 사프란을 일컫는 그리스어 크로코스로 불리는 이 광물은 과학자가 발견해 프랑스에 의해 플롬 루즈 드 시베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크롬 옐로가 애초부터 안료로 쓰인 건 아니다. 공급이 너무 불규칙하고 가격 또한 너무 높았다. 하지만 프랑스 화학자 니콜라스 루이 보클랭이 홍연석을 연구해 이내 새로운 요소를 함유하고 있는 오렌지색 광물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리스어로 ‘색깔’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착안해 이 금속에 크롬 또는 크로미움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크롬염은 정말 빼어난 수준으로 다양한 색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화가와 미술 애호가들에게는 슬프게도, 크롬 옐로는 시간이 지나며 갈색으로 변하는 단점이 있다. 암스테르담에서 빈센트의 그림을 수년간 연구한 학자들은 햇볕에 노출된 꽃잎의 크롬 옐로가 심각할 정도로 진하게 변색되었음을 밝혔다. 그래서 빈센트의 해바라기는 실제 꽃이 그렇듯 시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빈센트의 해바라기에는 더욱 살아 숨쉬는 듯한 강렬함과 생명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Three Sunflowers in a Vase, 1888 USA 개인 소장 (좌)
Vase with five Sunflowers, 1888 2차 세계대전시 소실 (우)


아를 시대의 7점의 해바라기 중 가장 첫 작품은 미국의 재력가가 개인 소장하고 있고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해바라기는 일본의 실업가가 1920년에 구입하여 개인 소장 중이었으나 2차 세계대전 당시 집이 불타면서 함께 없어졌다. 빈센트는 기회가 되는대로 아를로 오겠다는 고갱의 편지를 받고 그를 기다리면서 1888년 8월 21일부터 하순 사이에 해바라기를 4점이나 그렸다. 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엔 “나는 캔버스 세 개를 작업하고 있다. 첫 번째는 초록색 화병 속에 커다란 해바라기 세 송이를 밝은 배경에 그린 15호 캔버스야 (위 좌측 그림) 두 번째도 세 송이인데 파란 화병 밖에 꽃잎이 떨어진 것과 꽃봉오리가 놓인 25호 캔버스 그림이야" (위 우측 그림)라고 남겨져있다.




굳이 짧게보다는 한번에 이해도 되고 필자의 감정선을 따라오게끔 적는 걸 즐기지만 이번 글도 어김없이 Long take라 쉬어갑니다

다음 편에 남은 아를에서 그린 해바라기 화가 반 고흐의 대표작과 필자의 여행, 해바라기에 얽힌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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