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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작가 Jul 15. 2020

지금 시대, 한 직장에 오래 일했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

당신은 늑대인가? 개인가?


"퇴직 소감이 있겠습니다."

.

.

.

"지난 30년 동안 누구보다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래서 미련이나 후회도 없습니다."

.

.

“기쁘고 제 자신이 자랑스럽습니다.”

.

(중략)..."감사합니다."

.

.

.

짝짝짝(박수)


어느 날 퇴사를 앞둔 분의 마지막 소감을 들으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많은 분들이 퇴사했고 소감을 이야기해왔지만, 어느 누구하나 행복한 표정을 짓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내가 있는 직장 혹은 퇴직한 분이 문제일까?

아니면 무엇이 문제일까?


그들의 얼굴에는 미련과 후회 그리고 두려움... 걱정, 쓸쓸함만이 보일 뿐이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왜 그럴까?




그들의 말과 다르게, 행동을 비롯해서 보여지는 모습과 표정은 왜 다른 것일까?




질문에 답을 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유명한 개와 늑대의 일화를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느 날 목줄을 한 개는, 지나가던 굶주림에 허덕이는 늑대에게 이런 제안을 한다.


"늑대야, 너도 인간들에게 순종한다면 나처럼 풍요로운 음식과 안락함을 얻을 수 있어. 더 이상 굶주리지 않아도 돼."


"너도 나처럼 목줄을 하고 이렇게 사는 게 어떠니?"

그러자 늑대는 개를 보며 말한다.


"너처럼 목줄에 묶여서 안락함과 풍요를 누리는 것보다 나는 굶주림을 택하겠다."



일화에서

‘개'는 목줄에 묶여 자유를 잃는 대신 안락함, 편안함을 선택했고,


'늑대'는 굶주림... 자유를 선택하게 된다.




우리의 직장 생활도 목줄을 한 '개'의 삶과 다를 바가 없다.


최소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의 개인 시간, 인생의 중요한 시간을 포기해야 하고,

다른 직장 동료와 트러블 없이 지내야 한다.

또한, 조직의 요구를 잘 따라야 한다.


그렇게 20년, 30년을 보내야 비로소 목줄을 벗어던질 수 있다.

(던지고 싶지 않더라도 목줄이 풀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떤가?

그들은 대단한 사람인가? 행복한 사람인가?


과연 그런가?

(과거와 달리 지금은 목줄을 한 '개'도 되기가 힘든 상황에서 목줄을 한 '개'도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본질은 그렇지 않다.)



조금 더 생각해보자.


일반적으로 직장 생활을 오래 한 사람은 순종적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앞에서 이야기 한 생활을 20년 넘게 지속해야 한다고 생각해보면 그들의 성향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이 택하는 대화 주제는 자신이 곧 회사의 일부인 것처럼...

주로 회사 이야기를 하고, 회사 생각만 하는 경우가 많다.


즉, 자신, 개인의 정체성보다는 회사가 우선시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들은 첫 직장에서 퇴직할 때까지 일하고 행복한 노후를 맞이할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 무사히(?) 퇴직을 한 사람들은 순종적이며, 개인 정체성을 포기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그들이 대단한가? 존경스러운가?


오히려 평생 목줄을 한 ‘개’의 삶에게 대한 연민, 동정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 아닐까? 자유가 없는 삶에 대한..



목줄을 한 '개'가 살아가는 혹은 추구하는 모습과 퇴직을 위해 일하는 우리의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그들은 20년, 30년 동안 열심히 일하고...


퇴직 혹은 구조조정, 희망퇴직 등으로 직장을 떠나게 되면 이들 대부분은 절망하고 상실감을 느낀다.


회사 밖에서는 어떤 직장을 구할 수 없다.


길들여진 삶에서 거친 야생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근속연수가 긴 사람들은 현재 직장 외에는 다른 방안, 대안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결국 목줄이 풀릴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이 처한 상황을 냉정하게 보게 된다.

'늑대'가 추구한 삶을 부러워하면서 말이다.


퇴직하는 사람들이 왜 슬퍼 보이는가?

자유를 원하지 않는가?




'개'와 '늑대'라는 일화에 비추어 극단적으로 삶을 비교했지만,


우리의 삶은 이 일화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지금의 시대에는

목줄을 한 '개'도 되기 힘들고. 오래 목줄을 하고 있을 수도 없다.

목줄을 한 '개'의 삶도 장기간의 안락함과 편안함을 얻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일자리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기업은 더 이상 장기간 근속을 보장해주지 못한다.(참고로 한국의 평균 근속연수는 6년이다.)


그래도 목줄을 한 ‘개’가 되고 싶은 것인가?





이제는 '늑대'가 유일한 선택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쩔수 없이 ‘늑대’가 될수밖에 없는 상황.


이에 따라 사람들,

즉, 젊은 사람들은 변하고 있다.


여전히 목줄을 찾아다니는 청년도 있지만,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뛰어난 능력, 기술을 갖추려고 노력하고 자유를 가지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좋은 경험을 쌓기 위해 이직하기도 한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자유를 찾아가고 있다.

나는 그들을 자유인, '늑대'라고 부른다.



한편,

이미 목줄을 한 직장인들에서도 변화가 보인다.


직장인들 중 개와 늑대 이야기'의 '개'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늑대'가 등장하고 늘고 있는 것이다.


직장 내에서 ‘늑대’는 누구인가?

조금만 주위를 살펴봐도 알 수 있다.

이들 '늑대'는 직장 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고 현재 직장에 목메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의견도 강하며 다른 곳에서도 이들을 원한다.


목줄을 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직장인인 것이다.


그들은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있다.


따라서,

'늑대'는 자유가 있다.


그리고,

'늑대'는 자유를 누릴만한 자격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과 기술을 갖추었고,

무엇보다 과감하게 도전하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즉, 과감하게 도전하고 성취한 대가로 자유를 보상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여전히, 많은 직장인, 직장 내 '개'들은 일화에서처럼 '늑대'에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목줄을 하고 있지만 굶주림에 허덕이는 늑대보다 우리가 훨씬 나아"



하지만, 그들의 바람과 달리 퇴직자들의 모습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정말 운이 좋아서, 행운이 따라준다면,

그들은 앞서 이야기한 퇴직한 사람의 한 명이 될 수 있다.


그런 삶을 살고 싶은가?


그들에게 퇴직 이후의 삶은 그다지 좋은 경험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한 직장에 오래 일했다는 것은 결국 목줄을 한 '개'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 아닐까?


지금 시대에 한 직장에서 오래 일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

.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목줄을 한 ‘개’의 삶을 살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다.


인간이라면 그렇게 갈망하는 자유를,

그렇게 쉽게

자기 손으로 포기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인생의 초라함을 느끼고

허망함을 느낀다.

.

.

훗날 목줄을 한 ‘개’는 굶어서 죽어가는 늑대를 비웃는다.


하지만, ‘늑대’는,

진정한 자유를 느껴보지 못한, 경험하지 못할 ‘개’에게 오히려 연민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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