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다큐프라임 [호랑이의 땅]
호랑이는 그 이미지에서 오는 영적인 느낌 때문에 수많은 콘텐츠들에서 꾸준히 활용되는 소재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익숙한 호랑이의 모습은 사람의 손이나 컴퓨터를 거쳐 재탄생된 모습이고, 동물원에 있는 호랑이를 제외하고는 실제 호랑이의 모습에 익숙한 사람은 많지 않다. 게다가 동물원에 있는 호랑이들도 대부분이 아프리카나 남반구에 서식하는 종이고, 북반구 호랑이는 대부분이 멸종한 상태이다.
호랑이가 가진 영적인 이미지는 호랑이가 사신(四神) 중 유일하게 실존하는 동물이라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청룡, 주작, 현무는 모두 상상 속의 동물이지만, 서방을 담당하는 백호는 실존하고(돌연변이이긴 하지만), 사신 중 지상 동물들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호랑이는 작품에 따라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수호자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 양가적인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이 바로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다. 바다에 표류한 주인공을 끊임없이 위협하지만 동시에 그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 만들어서 삶에 대한 의지를 이어가게 하는 호랑이 ‘파이’가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이‘만들어진’ 호랑이에 익숙한 상황에서 실제 호랑이의 모습을 담기 위해 노력하는 최기순 감독이 있다. EBS 다큐프라임 [호랑이의 땅]은 EBS 창사 42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자연/호랑이 전문가인 최기순 감독이 직접 러시아 시호테알린 산맥(Sikhote-Alin)에서 찍은 작품이다.
시베리아 바로 밑에 있는 타이가 지대 시호테알린의 보호 구역. 시호테알린 남부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블라디보스토크로, 백두산 유역과 맞닿아있다. 그래서 이곳에 서식하는 아무르 호랑이는 백두산 호랑이의 후손이다.
이 지역의 모습은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더 월(The Wall)을 연상케 한다. 일 년 내내 눈 덮인 야생 지역의 모습이 그렇다.
호랑이는 숲 속에서만 살 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바다를 접하고 있는 이곳에서는 바닷가도 호랑이의 활동 영역이다. 자기가 지나다니는 구역에 영역표시를 해놓고 주기적으로 구역을 돌아다닌다고.
감독은 숲과 바다의 중간 즈음에서 호랑이를 포착하기 위한 카메라를 설치해놓고 혹시 모를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나무 위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한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무려 30일 동안 잠복해서 기다린 후에야 호랑이를 담아낸다.
자연 다큐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결정적 한방을 보여주는 것이다. 산악 다큐에서 정상을 정복하는 순간이 가장 극적인 것처럼, 호랑이 다큐에서는 동물원에서만 보아왔던 호랑이가 30일 만에 드디어 야생의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이 가장 극적이다.
하지만 PD는 의도적으로 그 장면을 맨 처음에 배치한다. 강렬한 첫인상을 전달해서 시청자를 화면 속 시호테알린으로 끌어들이다. 동시에 전반적인 내용을 호랑이의 단순한 등장이 아닌 호랑이의 일상과 이곳을 보호 활동을 보여주는 데에 보여주기 위함이기도 하다
시호테알린의 원주민인 우데게이 족을 보면서는 [왕좌의 게임]에서 수천 년간 더 월(The Wall)을 지켜온 나이트 워치(Night’s Watch)가 떠올랐다. 눈으로 덮인 지역과 우데게이 족. 이들은 시호테알린을 지켜왔다는 점에서 스타크 가문을 떠오르게 하기도 하고 호랑이를 신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숲의 아이들(Children of the Forest)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나는 나의 길을 가고 너는 너의 길을 가라
아무르 호랑이가 우데게이 족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인간 모두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공존하려는 마음도 담겨있다. 실제로 호랑이를 직접 마주친 경험이 있는 주민들에 의하면 호랑이는 지능이 상당히 높기 때문에 먼저 해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 호랑이가 먼저 공격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저 문장에는 호랑이를 간섭하지 말자는 보호 팀의 소망도 반영되어 있다. 2부 전체를 호랑이 보호 문제를 다루는 데에서 알 수 있듯 당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호랑이 밀렵 실태는 심각하다. 밀렵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성인 호랑이가 잡혀가면 새끼 호랑이도 제대로 성장하지 못해서 죽을 확률이 높아지고, 그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면 먹이사슬 피라미드 최상위에 있는 개체가 사라져 버려서 시호테알린 생태계 전체가 균형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왕은 고독하다.
동물의 왕인 호랑이는 고독하게 사는 존재다.
고독하지만 우직하게 살아가는 마지막 북방계 호랑이의 모습을 감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