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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May 12. 2020

오므라이스!

<온다>(2018)


<온다>(2018, 감독: 나카시마 테츠야)

원작, 사와무라 이치, <보기왕이 온다>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을 영화나 드라마로 각색한다면, 여러 방법이 있겠다. 그대로 만들 수도 있고, 설정이나 묘사만 바꿀 수도 있고, 방향을 아예 틀수도 있다. 각색자와 감독의 선택이고, 답은 없다. 허나 독자이자 관객의 입장에서, 원작과 비교한 감상을 적는 건, 꽤나 재미있다. 물론 개인의 취향과 가치관에 기반 해서 이니, 흘려버리고 다음 문단으로 넘겨도 상관없다. - 원작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는데 딱히 임팩트가 없어서, 원작을 읽은 후 영화를 다시 보니 연기 말곤 딱히 흥미롭지 않았던 경우: <악인>(2010), <눈먼 자들의 도시>(2008). 원작을 따르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미지와 연기, 적절한 생략과 추가 때문에 ‘다른’ 걸작이 나온 경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 원작을 그대로 살리면서 의미를 넓히고, 영화적으로도 완벽했던 경우: <작은 아씨들>(2019). 몇 가지 기본 설정만 가져와서 아예 현대적이고 새로운 작품을 탄생 시킨 경우: <셜록>(BBC One), <더크 젠틀리의 전체론적 탐정 사무소>(BBC America). 그대로 가는 듯 하다 결정적인 전개를 뒤집어 의미도 분위기도 바꿔버린 경우: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2017).


앞에서 나열한 작품들에 대한 내 호불호는 분명했다. 헌데 <온다>(2018)는, 모호했다. 틀은 유지하면서 이야기의 방향에서도, 이런 저런 묘사에서도, 각색된 요소들이 보였는데, 결론 먼저 적으면, 글을 영상으로 옮기며 바뀌거나 추가된 이미지 묘사들은 탁월했다. 그러나 이야기가 흐르는 방향은 분명 원작의 것이 내 가치관에 부합했다. 달리한 까닭이 무엇인지, 분위기의 일관성을 위한 것이었는지, 감독의 가치관을 반영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궁금해졌는데, 후자라면 글쎄다. (아무래도 후자인 것 같다.) 허나 영화만이 가진 특별함 또한 있었다.



<온다>(2018). IMDB


원작에서 초점을 둔 폭력은, 대물림 되는 가부장의 가정 폭력이다. 히데키는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고 대처하기보단 남편이 생각하고 결단을 내리는 게 중요하다’고 대놓고 독백한다. 그의 외할아버지 긴지처럼 아내와 딸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진 않지만, 이 가식과 무관심도 폭력임을 작가는 암시한다. 히데키의 숙모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의 폭력으로 상 모서리에 머리를 찧어 죽게 된 것과, 치사가 뛰어 놀다 머리를 찧어 피를 흘리고 있을 때 히데키가 멍하니 있던 장면이 겹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패닉 상태는 그가 부친에게 비슷한 폭력을 겪었을 가능성을 떠올리게 하고, 이후 블로그에 올린 글에선 히데키가 행하는 폭력의 형태가 드러난다. 치사는 ‘아빠에게서 무서운 냄새가 난다’며 꺼려한다.


원작이 차근차근 허물을 벗겨내며, 고토코나 노자키의 입을 빌려 ‘그것’의 시초와, 다하라 가족을 찾게 된 경로[입을 줄이기 위해 산에 버려진 아이들이 ‘그것’‘들’이 되었다. ‘그것’은 아이의 부모를 ‘평가’하여 통과하지 못하면 먹어치우고, 아이를 데려가 자기들 중 하나로 만든다. 시즈가 폭력을 행사하는 긴지를 없애고 싶어서 ‘그것’을 부르기 시작했고, 비극적으로 후손에까지 이어졌다.]를 분명히 알게 해 준다면, 영화에선 관계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는 점은 분명히 하며, 외로웠던 치사가 ‘그것’을 불러들였다,는 내용도 나오지만, 마코토나 고토코를 통해 ‘왜인지는 중요치 않다, 어떻게 막는지가 중요하다’를 반복해 강조한다. 왜,는 관객의 상상에 맡긴다. (초반의 가족 모임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가정사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 히데키도, 엄마의 죄를 답습했던 카나와 같은 패턴이지 않을까 짐작할 수는 있다.


<온다>(2018). IMDB



원작에서는 각 핵심 인물의 포지션을 구분한다. 히데키는 피해자이자 가해자, 카나는 피해자, 노자키는 관찰자다. 원작에 없던 카나와 노자키의 ‘죄’는, 가장 크게 각색된 점 중 하나다. 카나의 캐릭터성을 바꾸며 ‘히데키의 실체를 드러내는’ 부분을 약화한 것인지, 화자가 히데키일 때도, 그의 ‘죄’를 암시했기에, 원작에서 시점이 카나의 것으로 바뀔 때 찾아오는 충격은 없었지만, 짐작만 했던 부분이 들어맞았음을 확인하는 것도, 흥미를 돋웠다. 쿠로키 하루의 담백하고 건조한 독백, “히데키가 죽어줘서 기뻤다.”와 함께 찾아오는 잠깐의 정적이 충분히 소름 돋았다.


<온다>(2018). IMDB


원작의 카나는 히데키의 입장을 뒤집는 서술을 하며, 오로지 피해자의 위치에 있었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부모의 잘못을 답습하지 않으며, 치사에게만은 헌신한다. 히데키와 확실히 구분되는 지점이다. 영화의 카나도 물론 치사를 사랑하지만, 아이는 카나의 인생을 지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가 된다. 사실 현실적이고 중요한 지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게 원작의 출산 부분에서 잠깐 암시됐듯 ‘모성애’가 당연하지 않음을 드러내다가 말고, 꼭 카나에게 ‘착한 엄마/ 나쁜 엄마’ 프레임을 씌우는 것 같았다. 카나는 히데키와 동일한 패턴으로, 자신을 내팽개친 엄마의 길을 밟는 듯 보이며, 그 신호는 섹스-화장으로 이미지화 된다. 난장판이 된 집안에서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며 그림을 그리는 치사와, 화장을 하는 카나 - 분위기 자체는 사실 감각적이고 좋았는데, 의미하는 바는 좀 고민이 됐다. 히데키는 나쁜 놈일 뿐이다, 남성이기 때문에. 그러나 여성인 카나에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는 뉘앙스가 있었다. 꼭 ‘엄마답지’ 못해서 ‘벌을 받은’ 것만 같았다. 감독의 무의식적 가부장적 편견이 스며든 걸까, 그냥 내가 예민하게 느끼는 걸까.


<온다>(2018). IMDB


원작에선 매력은 덜했을지언정 이런 류의 불편함은 없었다. 덧붙여 예를 들면, 가다쿠라 온천에서 히데키가 아이를 갖고 싶다며 카나가 불임일 경우 ‘치료’ 하자고 스스럼없이 말하고, 카나가 충격 받는 부분에서, 작가의 표현력과 감수성이 드러난다. 뭐 감독이 어떤 생각을 갖고 만들었건, 카나를 마냥 비난할 수 없다. 캐릭터에 양면성이 생기면서 흥미로워지기도 했다. 헌데 결국 그 ‘악행’이 츠다의 ‘조종’에 의한 것으로 밝혀져, 오히려 애매해지고 말았다. 서사를 ‘넓혔’는데, 과연 넓힌 것이 맞는가,에 대한 고민이 들었다. (물론, 배우 쿠로키 하루의 이미지는 넓혔다.)


영화도 카나가 츠다를 본인의 의사로 선택 혹은 거부 했다면 좋았으련만. 허나 그게 나름의 일관성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카시마 테츠야는 그렇게 치사의 부와 모에게 본인들 부모의 과오를 반복하는 대칭(그래도 여전히 대칭은 아니지만)적인 죄악을 부여한 듯하다. ‘입을 줄이기 위해 산으로 데려간 어린아이들이 변했고, 그렇게 보기왕은 형체를 늘렸다.’ 원작의 내용이다. 보기왕은 그 아이들의 시선으로 부모를 ‘심사’해, 통과하지 못하면 이름을 불러 산으로 데려간다. 원작의 카나는 통과했고, 영화에선 통과하지 못할 요소를 집어넣어 죽였다.



<온다>(2018). IMDB


노자키의 경우, 관찰자에서 죄인의 포지션이 덧붙으며, 여러 모로 완전히 바뀌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서사가 ‘안’ 괜찮아졌다. ‘노자키는 불임이었고, 아내가 아이를 갖고 싶다는 말로 이별을 통보했다’는 과거가, ‘노자키가 아이를 원하지 않아 애인이 임신중절수술을 하게 만들었고 결국 헤어졌다’,로 바뀌었다. 원작의 노자키가 ‘결혼해 아이를 가지는 것을 당연하게 정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싫어했다면-본인은 그게 본인이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자격지심이라고 깎아내리지만 사실 의미 있는 문제 제기다- 영화의 노자키는 그냥 아이를 싫어(하는 줄 알았으나 사실 잃을 까봐 무서워)한다.


때문에, 똑같이 불임이지만 태도가 갈렸던 마코토와의 관계성도 영화로 옮기며 좀 흐려진 느낌이 있었다. 치사와 함께하는 마코토를 보며 노자키가, ‘결국 너만 상처 받지 않냐’고 하는 장면이 원작과 영화에 모두 등장한다. 원작에선 본인의 상황을 대입해 나온 말이라 사고 과정과 의미가 분명하고, 두 사람의 태도 차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지만, 영화에선 그 과정이 불분명해서, 충분히 깊지 못한 걱정에서 나온 배려 없고 주제 넘는 말로 들린다. 인물의 서사는 바꿨는데 대사를 그대로 한 것이 잘 한 선택이었는지 모르겠다. 허나 달리 해석하면, 원작에서 그 부분이 노자키와 마코토 모두의 장면이었다면, 영화에선 오로지 마코토의 씬이 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버려진 아이들로 가득한 황야를 지나는 노자키와신처럼 군림하며 이 나라는 이런 식으로 생명을 없앴죠라고 말하는 고토코의 이미지를 보며, ‘낙태죄를 물으려는 건가 하고 찜찜한 긴장이 맴돌았으나나중에 나온고토코 본인도 아이를 싫어한다는 언급과 함께 목에 걸린 것을 겨우 넘길 수 있었다헌데 각색에서 치사가 그것을 불렀다는 설명이 덧붙으며고토코가 치사를 해하려는 제스처를 취하고노자키가 자기 아이를 버렸던’ 것을 뉘우치고 구함으로써 죄를 씻는’ 전개가 이어지는데아니 그게글쎄다


<온다>(2018). IMDB



마코토는 거의 책 그대로. 고토코는 약간 다르다. 아마도 가장 강한 인물일 테고, 그 점엔 변화가 없다- 그런데, 성격의 미묘한 변화로 이미지적으로도 더 강해졌다고 할까.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본다. 분장을 먼저 살피면, 영화의 고토코는 비슷하게 블라우스에 정장을 입고 있기는 하나, 옷 무늬나 색상 같은 미묘한 차이, 힐과 선글라스 등의 아이템으로 인해 수수함에서 세련됨으로 바뀌었다. 책의 고토코에게는 좀처럼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사이사이 아픔이나 따뜻함, 애정이 엿보이지만, 영화의 고토코는 때로 차갑고 강한 말을 던진다. ‘이 힘은 유전이 아니고, 오로지 내게 온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대사만 읽으면 오만한데, 마츠 다카코의 건조한 말투를 통하니 그런 느낌이 없다. 그 자신만만한 태도는 모조리 멋지다. 나카시마 테츠야에겐 시선을 끄는 이미지에 대한 감각이 있었고, 마츠 다카코에겐 디렉팅 그 이상을 해낼 능력이 있었다.


<온다>(2018). IMDB


때문에, 이야기의 메인은 아니지만, 마코토와 고토코의 관계도 조금 다르다. 특히, 이미 위에서 언급한 대사로 드러나는, 고토코가 마코토를 대하는 태도가. 원작에서 고토코는 힘의 차이는 알고 있을지언정 마코토를 동료로 인정한다. 걱정하고, 위하고, 협력한다. 동생이 자신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며 괴로워하고, 그 자학을 ‘그것’을 부르는 데에 사용한다. 짧지만 감정적으로 진한 ‘저주’ 장면은 고토코와 노자키 캐릭터의 깊이를 더하는 데에 사용된다. 둘은 마코토를 중심으로 함께 한다. ‘의뢰인’인 그녀의 집에서 ‘그것’을 불러, (물론 대부분 고토코가 하지만 어쨌건) 세 사람이 힘을 합쳐 처리하는 형태로 일이 진행된다. 허나 영화에는 확실한 서열이 있다. 고토코는 두 사람을 하대하진 않지만, 노자키는 물론이고 마코토가 다룰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항상 상기시킨다. 동생을 보호하는 동시에 대놓고 핀잔을 주고 능력을 무시한다.


노자키를 대하는 고토코는, 음….고토코가 노자키 때리는 부분이 진짜로, 가장 순수하게 재미있었던 장면 중 하나였다. 노자키의 서사를 바꾼 건 아직 찝찝하지만, 결과적으로 고토코의 매력이 다르게 발현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는 점은 만족스럽다. 페브리즈 언급은 원작에도 있는데, 영화에서 고토코가 우아하고 무심하게 페브리즈를 슥 슥 뿌리는 모습과, 노자키가 겁에 질려 엄청난 속도로 뿌리고 또 뿌려대는 모습 둘 다 매우 흥미로웠고, 일이 다 끝나고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는 씬도 웃겼다. 잡아 놓은 폼이 망가졌는데 또 그 상태로 폼을 잡아 웃음을 유발한다. 이런 사소한 재미는 글을 영상으로 옮기며 발현된 감독의 특이한 센스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이게 장점의 다는 아니다.


<온다>(2018). IMDB



서사의 변화는 글쎄였으나, 연출에는 매우 감탄했다. 초반 히데키의 집 장면, 결혼식 장면, 집 초대 장면 등을 구체적으로 구현해 길게 잡았다. 분명 다들 웃고 떠드는데 흐르는 묘한 불쾌감, 위화감. 감독의 능력이다. <고백>의 초반, 아이들이 밝게 떠드는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의 전작들에서 죽 보였던, 우울하거나 폭력적인 내용에 상반되는 활기차거나 상큼한 음악의 사용 등도 효과적으로 쓰였다. 사람들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느낌을 받게 하는 카메라 구도도 비슷하게 자주 쓰였다. 더욱이 이번에는 어쩐지 ‘그것’의 시선으로, 인물들을 ‘심판’하는 기분이 들어 묘했다.


<온다>(2018). IMDB


원작과 달리 영화에선 ‘그것’, 그러니까 ‘보기왕’의 형체를 분명히 보여주지 않는다. 신체의 일부만 보이거나, 벌레, 아는 사람을 통해 드러난다. 잘 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공포는 사적일 때 극대화된다. 앞 문장은 관람하는 관객 자신에게도, 관객이 이입할 캐릭터에게도 해당된다. 먼저 관람자의 입장에서: 원작에서는 글로 묘사된 형체를 상상하는 데에서 오는 공포도 상당했지만, 영상으로 구체화하는 건 다른 문제다. 최종적 공포가 특정한 이미지로 드러나면, 아무리 괴기하고 생소하더라도 결국 ‘공공연’해진다. 또 그 이미지만으로 작품이 규정될 수도 있다.(그런 마스코트 같은 형상들은 내가 이제까지 호러를 즐겨 찾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다.) 그리고 캐릭터의 입장에서: ‘그것’이 무서운 까닭 중 하나는, 아는 사람의 목소리로 말을 건다는 점이다. 감독은 이를 잘 포착해, 그것의 형태 대신, ‘아는 사람을 흉내내는’ 부분을 늘려 효과적으로 공포를 대체했다. 히데키의 회사 동료, 카나의 엄마, 츠다, 치사와 ‘치사’-의 몸을 통해. 웨딩비디오 속 츠다가 노자키에게 말을 거는 연출도 괜찮았다.


히데키에게 두 가지 고토코 목소리가 전화를 거는 장면은 그 긴장감을 그대로 구현한 듯 했고, 연출과 연기 모두 최고였다. 물론 ‘그것’이 등장할 수 없으므로,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달라진다. 물그릇을 밟고 뛰어오는 ‘치사’의 발, 히데키가 흔들리는 문을 등으로 막고 있는 모습 이후, 뜯어 먹히는 과정이 나오지 않고 그 잔해가 나온다. 사건이 벌어지는 과정을 생략하고, 이후 결과물을 정적으로 줌 인 하는 연출이 제대로 쓰였다. 흥미로운 점은 원작과 달리 머리통이 아닌 하반신이 찢겨 있다는 점인데, 땀에 푹 젖어 땅에 붙은 츠마부키 사토시의 얼굴이 잡히며, 그 입에서 ‘치가츠리’ 라는 단어가 흘러나오는 부분의 화면 구성과 색, 카메라의 움직임, 연기 등이 전체적으로 완벽하게 느껴져서, 잘 변형해 이미지화 했다고 느꼈다. 카나의 죽음도 대칭적인 구성이다. 카나가 치사를 안고 문틈으로 들어오는 엄마의 손과 얼굴을 본다. 화장실 바닥에 히데키와 비슷한 구도로 쓰러져 ‘치가츠리’를 중얼거린다. 히데키는 시뻘겋고 시퍼런 조명, 카나는 화장실의 지저분한 흰색과 붉은 피의 대비.


<온다>(2018). IMDB


형체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내내 등장하는 마지막 고토코의 주술 장면도 아주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모습을 그리지 않고 ‘그것’의 힘을 최대한 드러내기 위해, 또 으스스하고 묘한 분위기를 내기 위해 (그리고 아마 넣고 싶어서..?) 대규모 굿판을 연출했고, 개인적으로는 괜찮았다. 꼭 ‘그것’에게 먹힌 영혼들이 피로 나타나는 듯 했던 시뻘건 실루엣, 그리고 집이 그 피를 울컥 토하는 연출은 취향…..이었다고 조심스럽게 적어본다. 아니 그 씬을 비롯해 자주, 그러나 항상 조금씩 다르게 쓰인, 어둡고 불그죽죽하고 푸르딩딩한, 화려하고 그로테스크한 화면 자체가 너무나.


<온다>(2018). IMDB


결말은 어떤가. 원작은 죄 없는 셋이 함께 치사를 돌보는 느낌으로 마무리된다. 가부장이 죽고 엄마와 불임인 연인이 ‘함께’ 아이를 키운다는, ‘정상 가족’ 틀을 깨는 결말이다. 셋 모두에게 ‘죄’를 부여한 영화에선, 방향이 좀 다르다. 한 부모를 죽이고 ‘자격이 있는’ 새 부모를 갖게 된 느낌이다. 언뜻 원작보다 인간에 대해 냉소적인 듯 보인다. 그런데 결말은, 이상하게도 영화가 좀 더 희망적이다. 치사가 잠들어 꿈을 꾸는 장면은 같다. 원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고토코의 암시를 증명하듯, ‘사무이 사무앙 치가츠리’ 등 보기왕의 언어를 잠꼬대로 웅얼거린다. 그런데 영화는….이럴수가. 오므라이스라니. 너무 어이가 없는데, 그 놀라울 정도로 뜬금없는 연출이 매우 절묘하여 이 어처구니없는 희망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오므라이스가 아니었더라면 이 작품이 그렇게 기억에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나카시마 테츠야의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콜라주 연출과 배우들 보는 재미로 봤고, <고백>은 마츠 다카코가 다였고, <갈증>은 개인적으로, 과하고 정신없고 불편하고 불쾌했는데, <온다>는 괴기한 이미지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연출은 오히려 <갈증>에 비해 정리되어 있어서 더 보기 ‘편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영화 중 가장 취향이었다고 하겠다. 결말도 뭐, “그리하여 죄 없는 영혼 치사는 부모를 갈아치우고 오므라이스를 먹었습니다.” 음,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이게 감독이 책을 영화로 옮기며 가져간 핵심 코드였을지도.......는 아니지만, 하나의, 의외로 확실한 관람 포인트가 될 수는 있겠다.


<온다>(2018).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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