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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Jan 20. 2021

여전히 낯선, 새로이 낯익은.

코디 펀(Cody Fern)(3)



*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yonnu2015/89



코디 펀(Cody Fern)
as 자비에 플림톤(Xavier Plympton) in <American Horror Story: ‘1984’>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연기를 자기 스타일대로 ‘잘’하는 모든 배우가, 타고나지는 않았다. 노력파/천재파로 구분하는 것도 의미 없는 짓이다. 다만 내가 덕질하는 여러 배우들 중, 특히 좋아해서 관심을 갖고 지켜보게 되는 이들 중엔, 유독 노력을 통한 달라짐이 묻어나서 더 애정이 가는 이가 있다. 코디 펀이 그렇다. 역할을 위해 열심히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는, 극에 녹아든 형태에 스스로가 묻어나는 배우다.


<AHS: 1984>(FX). IMDB 이미지.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1984>의 경우, 처음부터 그 녹아듦이 완전하지는 않았다. 쇼 전체가 그랬다. 일단 세컨 오프닝은 훌륭했다. 팔과 입을 쭉 벌리며 쾌활한 표정을 짓는 자비에를 시작으로, 다섯 친구가 차례로 에어로빅을 하며 등장한다. 아 이번 시즌 왠지 제대로 ‘아메리칸 (코미디) 호러 스토리’일 것 같다,는 예감과 함께, 쇼와 자비에에 빠져들 준비를 했다. 그러나 음악이 멈추고, 이들이 모여 대화를 시작하며, 불안감이 밀려왔다. 완벽한 오프닝 크레딧과 패션에 비해 한참 부실한 대사, 어쩐지 서로 맞물리지 못하는 연출과 연기들. 살아남은 건 빌리 로드의 몬태나 정도였다.

기대를 지나치게 한 탓이었을까, 자비에조차, 매력은 분명했으나 연기가 살짝 덜 녹은 기분이었다. -좋아하는 배우의 연기는 관대하게 보게 되기보단 더 관심을 둬서 그런지 살짝만 어색해도 캐치하게 된다- 백팩을 매고 끈을 잡는 제스처나, 자리를 뜨며 다리를 흔드는 모양새, 평소와 약간 다른 목소리와 억양. 대충 제작진이 그린 자비에의 그림은 보였다. 본인은 게이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클리셰적으로 ‘게이스러운’ 느낌을 풍기는(‘대디’와의 차 뒷좌석 대화, ‘암 낫 게이’에서 확신했음.), 별 생각 없이 쾌활하거나 시니컬하게 깝죽대는, 그런데 놀랍게도 비밀이 있는, 인물로 구상했던 것 같다. 뭐가 문제였는지, 노력은 묻어났으나, 충분히 방정맞지 못한 느낌이었다.


<AHS: 1984>(FX). IMDB 이미지.


1화가 채 지나기도 전에, 위화감은 녹아내리고, 연기는 화면에 녹아들었다. 셰프 버티에게 들이댔다가 짐만 건네받고, 무거워 죽겠다는 듯 바로 레이에게 넘기는 넋 빠진 표정부터, 본격적으로 집중력이 돌기 시작했다. ‘미스터 징글스’ 괴담을 언급하는 리타를 막으며 은근히 브룩 옆에 가 앉을 때, 침대에 걸터앉아 다리를 까딱거리다 그대로 올라가 옆으로 누울 때, 샤워장을 손전등으로 비추며 ‘what the hell’을 중얼거린 후 새침하게 비누와 수건을 찾을 때, 자비에는 핫하고 가볍고 자연스럽다. ‘boys and girl together’는 절대 안된다는 마거릿에게, 대놓고 장난스럽게 태클을 거는데, 매번 먹히지 않는다. 팔을 문에 올려 기댄 자세로, “Sex won.” 이라고 눈웃음을 치며 속삭였다가, 점점 흥분해 연설을 늘어놓는 마거릿을 보며 지루해 못 견디겠다는 듯 눈을 감으며 고개를 젓는다. 밤에 모여 있다 걸리고 난 후에도 두 손을 모으고 빈정거리지만, 저쪽에서 정색하고 몰아붙이자,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당황한 듯, 약간 상처마저 받은 듯, 눈을 뜨악하게 뜨며 얼굴을 움직이다 조용히 나간다. 아니, 입은 조용한데, 표정이 시끄럽다.

자비에는, ‘자비에와 친구들’의 자비에다. 제안하고 주도하는 역할을 주로 맡지만, 가장 ‘하찮’다. 그 ‘하찮음’은, 본인은 심각한 상황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I’m Method.” 씬이 그 시작이다. 주변 사람들이 그를 믿고 의지하는 것은 막지만,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한다. 일종의 사소한 캐릭터 반전으로, 초반 비밀의 뉘앙스는 자비에에게 주로 풍긴다. 몰래 공중전화에서 협박 메시지를 듣고, 눈꺼풀에 힘을 줘 불안하고 날카롭게 뜬 눈을 빠르게 한 번, 두 번 굴려 주변을 살핀다. 다문 채 한쪽 꼬리를 올린 입에서 불안이 읽힌다. ‘사람’을 쳐 놓고 삿대질을 하며 ‘얘기를 맞춰 놓자’는 단호한 말투, 경고하듯 브룩을 응시하는 눈빛 때문에, 이 인물의 다른 면을 상상하게 되지만- 비밀은 예상보다 빨리 밝혀진다.

블레이크에게 붙잡혀 차에 강제로 태워진 자비에는, 내키지 않는 듯, 약간 비장하게, 치켜 올린 눈썹을 떨며 ‘fine’ 이라고 뱉은 후, 고개를 옆으로 꺾고, 시선도 옆으로-그러나 정면으로 도발하듯 던지며, 불쾌한 긴장을 드러내는 콧소리와 숨을 잔뜩 섞어 묻는다, “What the hell, DADDY?”. 이의를 제기하는 대사지만, 미세하게 떨린다. 두려움이 섞여 확장된 눈으로는 눈치를 살피고 있다. 상대의 말에 집중하는 와중, 받아 든 담배를 입술 사이에 끼워보지만, 취향에 맞지 않는 듯 오만상을 찌푸리고 재를 떨거나, ‘네 행동이 멍청했다’는 말을 들을 때 곰곰이 생각하듯 바닥을 보는 등의 디테일이 캐릭터를 굳힌다. 블레이크가 협박의 수단으로 과거를 언급하자, 자비에는 언다. 눈은 멍하게 굳고, 입은 살짝 벌어진 채 겨우 떨린다. 정말 마주하기 싫지만 고개를 돌릴 수 없는 상태다. 곧 눈에 눈물이 고이고, 얇게 흔들리는 문장이 흘러나온다. “I’m not gay.” 가느다란 목소리에 진심이 한가득이어서, 에구 소리가 절로 나온다. 콧물까지 흘리며 그대로 언성을 높여 토로한다. 너무 애처로워, 계속되는 협박에 결국 트레버를 팔아도, 비겁하다고 할 수가 없다. 이때쯤, 깨달았다. 쇼에는 영원히 빠져들지 못하겠지만, 자비에에겐 이미 빠져들었음을.


<AHS: 1984>(FX). IMDB 이미지.

 
점점 세트에 적응하고 있는 게 보인다며 뿌듯해하던 팬은, 자비에가 공포에 떨기 시작하면서 잠시 주제넘었음을 반성했다. 연기 ‘포텐이 터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패닉해가지고서는 눈물을 또르르 흘리는 장면 하나하나가 굉장했다. 함께 두려움에 떨면서도, 웃음을 흘리게 만들었다. 미안하지만, 고통 받는 자비에는 너무 최고로 아름답고 웃겼다.

자비에는, 비겁함의 정도마저 완전치가 못하다. 블레이크의 시체를 보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흥분해 소리를 지르다가도, 과도하게 관계를 부정했다가, 뒤늦게 죄책감에 멘탈이 나간다. 처음엔 보통으로 불안하게 중얼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나머지 둘이 키를 찾은 후 보니, 이 인간이 갑자기 침대 옆에 주저앉아 있다. 다리는 옆으로 가지런히 널브러져 있고, 왼손으론 침대 기둥을, 오른손으론 심장을 부여잡은 채다. 이마엔 주름이, 잔뜩 커다래진 눈 밑엔 다크서클이 선명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두 사람에겐지 신에겐지 모를 고해성사를 시작한다. 처음엔 가만히 얼어 있던 고개와 손은 제 감정에 취하며 이리저리 움직이고, 목소리는 자꾸 울음에 잠기고 까지며, 가슴의 떨림이 입술로 새어 나온다. 누가 배우 아니랄까봐, 감정의 결이 단순하면서도 굉장히 풍부하다. 몬태나는 화가 나고, 트레버는 갑갑해하고, 나는, 안타까우면서도 자꾸….웃기다.

본인은 진지하다. 왜 그렇게 패닉했는지도 대충 알겠다. 근데, 타이밍이 너무하다. 심지어 화면 분위기도 자비에에게 맞춰주지 않는 상태다. 노크 소리가 나자 어수선하게 자꾸 움직이던 얼굴은 정지해 문을 향하고, 상체는 뒤로 물러난다. 두 사람의 팔을 잡고 자꾸 바닥으로 꺼지며 눈물콧물 범벅이 돼서 하는 “We are all gonna die.”, 문을 두드린 자들의 정체가 밝혀지자, 화내는 몬태나 옆에서, 홀로 다른 방향으로 서서 조용하고 멍하게 진정하곤 눈물을 슥 닦는 마무리까지다. 코디 펀은 자비에의 역할이 주로 웃기는 것임을, 그러려면 본인은 심각해야 함을 알고 있다. 인물의 서사와 심리를 완전히 이해하고, 풍부하고 여린 정서와 까다로운 소울을 자기 식대로 진지하게 배출한다. 바로 그 진지함으로, 웃음을 유발한다.


<AHS: 1984>(FX). IMDB 이미지.


진정한 이후부터 자비에는, ‘노말하게’ 공포에 떨며,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자’는 주장을 한다. 내내 두려움으로 긴장해 있으면서도 마거릿과 버티를 구하자고 속삭이는 그의 단호한 말투와 찍 올라간 눈썹은, 이것이야말로 본성임을 드러낸다. 평소엔 종종 비겁하고 예민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타인을 생각하며 용기를 낸다. 단, 여전히 온통 겁내면서.

트레버와 숲을 지나다 함정에 묶인 챗을 발견하고, 자비에는 그를 구하려 내려간다. ‘gonna be okay’라고 말은 하지만, 목소리가 하나도 안 오케이하다. 애써 아무렇지 않으려는데, 끝이 몹시 떨린다. 상황이 긴박해지자, 흥분해 고개를 빠르게 흔들며, 목을 눌러 “I don’t wanna kill him!”이라고 내지른다. 말끝을 보통으로 내리는 대신 살짝 띄우듯 올려, 끝맺지 않은 느낌을 얹어 불안정한 심리를 드러낸다. 어쩔 수 없이 ‘챗 어깨 구출’을 시도하기 직전, 자비에는 미간을 찌푸린 채 챗과 눈을 맞춘다, “If I kill you, I’m so sorry.” 힘을 뺀 가느다란 목소리, 역시 끝은 내리지 않고 띄운다. 문장 전체가 공기중에 둥둥 떠다닌다. 홀로 매우 진심으로 아련해서,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 이거 웃으라는 장면 맞다. 개인적으로 시즌 명대사 중 하나였다. 자비에 플림톤식 ‘깝’은, 이토록 자잘한 모먼트가 진정 핵심이다.

챗의 상태를 살피다가 발소리를 듣고 금방 무서워 표정이 굳었다가, 근육이 어쩌구 하며 달려나가는 트레버를 보고 코를 찡그리며 입모양으로 ‘what the fuck’을 중얼거린다. 그의 ‘성공’에 얼떨떨한 듯 눈을 껌벅껌벅 거리고 안절부절 못하다, 달려나가 소리를 지르며 하이파이브를 한다. 포르노! 블레이크!를 외치며 캐딜락을 떠올리고 새된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가, 또 금방 불안에 뺨이 어두워진다. 공포로 인한 긴장을 바탕에 깐 채로, 매초 변하는 감정을 풍부하게 덧씌웠다 벗겼다 하는 코디 펀의 모습, 새롭게 낯설었고, 또 만족스러웠다.  


<AHS: 1984>(FX). IMDB 이미지.


코미디 요소가 없는 씬에서는, 이 배우의 순수한 공포 표현에 감탄했다. 온 힘을 다해 기어나가려는 리타를 막다, 이기지 못하자, 오만상을 찡그리며 몸 전체를 아주 미세하게 떨기 시작한다. 트레버는 고개를 돌리고, 몬태나는 눈을 내리깔았다가 슬쩍 들어 살핀다. 자비에는, 고개도 눈알도 움직이지 못하고 죄다 목격한 후, 천천히 입으로 손을 가져간다. 이마에 힘이 한껏 들어가 핏줄이 두드러진다. 고개를 조용히 몬태나 쪽으로 돌리지만, 눈은 들지 못한다. 기어나와, 똑바로 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시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못한다’는 표현을 여러 번 썼다. 자비에의 상태가 그러함을 코디 펀이 온몸으로 알려 주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트레버는 몬태나를 팔로 감싸주었지만, 그 순간 누구보다도 감싸져야 할 사람은 자비에 같아 보였다.

버티를 건지려고 주방에 갔을 때도, 유사한 결의 연기가 보인다. 어정쩡하게 서서 온 힘을 다해 설득하다가, ‘징글’ 소리가 들리자, 눈이 휙 돌아가 한층 더 사색이 되어서는, 재빨리 테이블 밑으로 들어간다. 숨어있는 자리 바로 옆에 벤자민이 앉자, 입모양으로 비명을 지른다.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흐른다. 빵이 잘리며 텅 하고 테이블이 울리자, 놀라 몸이 움찔 하며 낑 하는 비명이 새어나온다. 숨어있는 상황에서 극도로 두려워 심장이 졸아드는 상태를 보여주는, 캐릭터에 어울리게, 예쁘고, 실감나는 표현이었다.


<AHS: 1984>(FX). 트레일러 스크린샷.


그러나 역시, 그의 장면들은 대개 코미디다. 트라우마적 경험과는 별개로 맞이한, 죽음의 순간마저, 잔인하게도. 탁한 목소리로 증오와 함께, 로빈 후드 역할을 했었다는 TMI를 씹어 뱉으며 벤자민에게 활을 날린다. 각본 약간 무리수다 싶었으나, 진지하게 뿌듯해하는 얼굴, 놀랍게도 폼나는 자세에,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가만히 서서 쓰러진 적을 노려보다, 숨이 끊어지자 온몸을 날려 나이스 제스처를 한다. 그렇게 감정과 표현이 풍부했던 사람인데, 표정 변화가 거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직후, 자비에는 제가 구해 준 마거릿의 칼에 찔려 즉사한다. 그렇게, ‘사건’이 ‘일단’ 일단락된다. 나는, 미안하지만, 이후 변한 모습으로 등장할 자비에를 기대할 수 밖에 없었다. 옳은 일을 하려다 오븐에 갇혔고, 구하려던 이를 칼로 찔러야 했고, 자신이 구한 자의 칼에 찔려 죽고 난, 다크 버전의 지박령 자비에를.


…..이라고 적었지만, 후반부 자비에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자비에와 친구들’이 메인인 듯 시작했다가, 도나, 벤자민, 마거릿 등이 등장하며 중심이 이동하는 전개라, 결과적으로 온전히 메인 롤 이라고 할 만한 건 다섯 중 몬태나와 브룩이 다다. 도나-브룩의 파이널 걸 서사, ‘정신 차린’ 몬태나 서사는 아주 괜찮았지만, 자비에를 그 정도로 소비한 건 살짝 아쉬웠다. 허나 몇 되지 않는 등장마다 인상을 확실히 남겼던, 코디 펀의 한층 꼬인 재치에, 그런대로 만족하며 마무리를 관람했다.


<AHS: 1984>(FX). IMDB 이미지.



안정적인 발성의 칼칼한 목소리로 흐느적흐느적 팔을 휘저으며 자비에가 ‘재’등장한다. 찌푸린 미간, 찍 올라간 눈썹. 방금 막 관광객을 죽인 몬태나를 향한 “Bitching kill babe, I call next.”에는 욕망과 동질감, 경고가 모두 묻어난다. ‘머더 파트너’가 되어 살인을 잔뜩 하고 다니는 두 사람, 또 죽였냐며 화내는 레이를 함께 비웃는다. 큰 입을 완전히 사용해 무심하게 픽 웃는 코디 펀은, 모조리 얄밉다. 이어, 경험에 기반한 논리를 펼 때는 상당히 진지해진다. 차분하게 상기된 말투, 손을 가슴 높이로 올려 흔드는 일관된 손짓은, 스스로의 말에 완전히 몰입했음을 나타낸다. “I fuckin’ saved Margaret!”이라고 할 때는, 어이없는 흥분으로 웃음이 픽 새며 눈썹이 올라가고, 다음 순간 “…and she killed me.”에서는 목소리와 얼굴 전체가 착 가라앉는다. 감상에 살짝 젖는 건 여기까지. 다음 대사부터는, 최선을 다해 못되게 굴려는 듯, 한 발짝 다가가, 턱을 올리고 눈을 내리깔아 상대를 제압하며, 낮고 허스키한 보이스로, ‘신경 끄라’며 협박한다. 고갯짓과 눈썹을 단어의 강조에 조화롭게 이용한다. 그가 “Nothing happens.”를 뱉는 부분에는 레이의 일그러진 얼굴이 잡히는데도, 웃음기 섞여 약간 째지는 그 목소리에, 집중하게 된다. 심플하고 단호하게 중지를 날리는 마무리까지. 과하지 않게 강렬했다. 다크 자비에의 변한 행동과 매력을 완전히 설득하는 모먼트였다.  

브룩의 사형집행 소식에 레이가 업셋하자, 장난기 가득한 눈을 그에게 고정 시킨 채, 뒷짐을 지고 몸을 건들거리며 혀를 쭉 내밀어 입술을 핥는다. 몬태나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짐짓 진지하게 인상을 쓰지만, 딱히 진심은 아니다. 목적은 레이를 괴롭히는 것이다. 죽기 직전, 순수한 마음으로 했던 ‘옳은’ 행동들은 죄다 의미를 잃었고, 결국 살해당했다. 지금은 행동의 기준 자체가 달라졌다. 살짝 귀찮은 듯한 유머감각과 새침한 폼은 평범하게 살아 있던 시절과 유사하지만, 베이스 자체가 시니컬을 넘어 어두워졌으며, 감정의 폭이 확 줄어들었다. 이제 그는 두려움에 벌벌 떨거나, 기뻐 몸을 날리지 않는다. 입을 비죽거리거나, 냉소적인 시선을 휙 던질 뿐이다. 우는 일은 절대 없으며, 비뚤어진 의도로 과장된 미소를 짓는다.


<AHS: 1984>(FX). 트레일러 스크린샷.


레드우드로 돌아온 벤자민을,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는 자비에의 눈엔, 누구보다 차분하고 냉정한 분노가 서려 있다. 허나 곧 냉소적인 태도 뒤로 감정을 감춘다. 몬태나 뒤에 서서 몸을 건들거리거나, 혀와 입술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뚱한 표정으로 괜히 나뭇가지에 기대 폼을 잡는다. 이야기를 듣고 감정이 살짝 동한 듯, 눈이 확장되고 입이 벌어진다. 몬태나가 지시하자, 금방 팔을 으쓱 하고 눈썹을 치켜 올리며 거부감을 표시하지만, 이내 귀찮다는 듯 쓱 내려와 터벅터벅 걷는다. ‘그 집’ 앞에 다다른 자비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며 조용히 질색한 후, 벤자민의 뒷모습을 약간의 걱정과 공포가 담긴 눈으로 응시한다. 다크 버전이 되었지만, 살아 있을 때 느꼈던 공포, 공감 등의 정서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음을, 코디 펀은 세세한 움직임으로 드러낸다. 앞장서서 못되게 굴었던 자비에가 이후 행동의 방향을 트는 까닭을, 과정의 묘사 없이 설득하는, 감정적인 복선이 되어 주는 연기들이었다.

웬 똘마니와 합심해 ‘미스터 징글스’를 찾기로 한 리처드 라미레즈 앞에, 자비에 플림톤이 등장한다. 목적이 맞아떨어져서다. 화려한 무늬의 밝은 색 플리츠 팬츠, 짙은 보라색 민소매와 톤이 매치되는 진청 베스트, (분명 젤로 세운)금발. 여전한 분위기를 두른 채, 코를 톡톡 건드리거나 흐느적흐느적 말하고 움직이는 자비에는, 마초스럽고 사이코패틱한 두 살인범들과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 셋이 한 컷에 있는 모습은, 희한하게 신선하다.

벤자민을 나무에 묶어놓은 유령들. 미안하다는 그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사람은 자비에다. 이미 시청자는 까닭을 이해하고 있지만, 코디 펀의 연기는, 더 나아가, 그에 이입하게 한다. 언성을 높이는데, 흥분해 발성이 넘치는 방식은 아니다. 차분하게 배에 힘을 줘 허스키하게 대사를 뱉으며, 말끝은 깔끔하게 끊어낸다. 고개는 이리저리 움직이지만 눈은 상대에게서 떼지 않으며, 칼을 든 손과, 다른 손을 번갈아 놀려 단어를 강조하는 데에 쓴다. 대사를 끝낸 후 시니컬한 상태로 돌아오는 것까지, 완벽하다. 벤자민이 아들을 언급하며 호소하자, “Boo hoo hoo.”라며 놀린다. 냉정한 무표정으로 있다가, 소리를 내는 찰나에만 눈썹과 입가를 팔자로 만들고 입술을 쭉 내밀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가, 고개를 꺾으며 사악 원래 상태로 돌아온다. 처음 겪는 코디 펀의 표정과 음성이었는데, 오 매우 새롭고 풍부했다.


<AHS: 1984>(FX). 트레일러 스크린샷.


이후 자비에는 딱히 중심에 등장하지 않는다. 라미레즈나 마거릿을 응징할 때 단체샷으로 폼을 잡고 있거나, 찌르고 자르고 덮치고 밀치거나, 씩 혹은 헤헤 웃는 등의 모습이 지나간다. 몇몇 캐릭터의 서사가 붕 뜨거나 뚝 끊기는 느낌이 있었고, 자비에도 그 중 하나였다. 근데 뭐, ‘Night Stocker Death Watch’ 씬 -비비드한 오렌지색 재킷을 걸치고, 재킷과 색을 맞춰 칠한 듯한 전기톱을 위잉거리며, 고개를 틀고 입꼬리를 씨익 올리는 컷-이 상당히 멋들어졌으므로, 그럭저럭 넘겼다.



‘대디’의 말을 빌리자면, 자비에는 “Pretty as dumb.”하다. 과연, 의심의 여지 없이 pretty했지만, 코디 펀 본인이 별로 멍청하지 못해서인지, 완전히 dumb한 느낌은 아니었다. 바로 그 ‘완전히 놓지 못했던’ 연기 덕분에, 클리셰가 지워지고, 독특한 캐릭터가 탄생했다. 깝치는 듯 안 깝치고, 외향적인 듯 내향적이면서, 묘하게 ‘하찮아’졌다가, 별안간 깊어졌다. 심각하게 긴장하고 있으면 기습적으로 웃음을 줬고, 슬슬 웃고 있으면 진지하게 마음이 동하게 만들었다. 배우 자신만의 낯익은 모습이 묻어나, 다른 색으로 낯선 캐릭터가 탄생했다. 살아 있을 때는 라벤더 컬러로, 화면 한가운데에서 풍부하게. 죽고 나서는 짙은 퍼플 컬러로, 슬쩍 옆에서 혹은 배경에서 스타일리시하게. 완벽했다. 그러나 완벽한 결과물만 덩그러니 보이는 게 아니라, 속에 담긴 과정이 어쩐지 느껴졌다. 매번 그를 더 사랑하게 되는 까닭이다.  


<AHS: 1984>(FX). IMDB 이미지.

 



+
여러 모로 감상이 분열된 시즌이었다. AHS답지 않게 주연 중 퀴어 캐릭터가 없는(챗도 바이섹슈얼or팬섹슈얼임이 굉장히 대충 언급되고 지나갈 뿐…) 시즌이어서 아쉬웠고, 결말도 너무 클리어하게 해피했다. 심지어 항상 완벽했던 연기에도 좀 구멍이 보였다. 그러나 앞에도 언급했듯, 여성 캐릭터들의 서사는 괜찮았고, 대개는 또 연기를 끝장나게 해줬다. 패션은 말할 것도 없었고.(특히 후반부의 도나-브룩 투샷.) 그러고 보니, 애초에 AHS를 보기 시작한 건, 코디 펀의 몇 안되는 필모그래피에 적혀 있어서였다. 지금은 상관 없이 애정(과 증의 중간 정도)..하는 쇼가 됐지만. 그리하여 일종의 ‘초심’으로 돌아간 관점에서 본 ‘AHS: 1984’의 감상은, 여전히 분열된 채다. 코디 펀의 자비에를 보고 또 돌려 보며 꾸준히 감탄했다. 하지만 부족했다, 잔뜩 충전해 놓은 내 호들갑을 쓸 모먼트가. 그리하여 이번 글은 호들갑도 마저 쓸 겸, 자비에 플림톤 바이브에 맞게 은근히 깝치는 뉘앙스로 적어 보았다.


+
근데 역시 말투는 조금 더 자연스럽고 능청스럽게 했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는데.(물론 극초반부만. 갈수록 잘했다.) 첫 번째 문제는 대사가 좀 뻔하다는 거고. 또 코디 펀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살다 미국으로 온거라서, 아직 억양을 의식하면서 쓰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선지 발음을 너무 또박또박하게 신경 쓸 때가 종종 있어서 아쉬웠다. 흥분하면 가끔 다른 억양이 나오던데. (블레이크 시체 보고 “Somebody do something!” 하고 외칠 때 나왔음.) 근데 나는 오히려 그게 에.. 어색하다기보단 새로웠고, 또 호기심이 드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완전히 대사 자체에만 집중할 수 있는 캐릭터로 연기를 하면 뭐가 나올까 하고. 그래서 이번에 오스트레일리아 가서 찍은 작품이 굉장히 궁금해졌다는 이야기.


<AHS: 1984>(FX). IMDB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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